차갑게 말아먹을까 뜨겁게 말아먹을까
차갑게 말아먹을까 뜨겁게 말아먹을까
  • 글·사진 박찬일 기자
  • 승인 2011.10.05 15: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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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국수

▲ 여름에 먹는 차가운 자루소바. 보통 채반에 담아서 김을 뿌린, 츠유라는 소스에 찍어먹는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설로 꼽히는 <메밀꽃 필 무렵>에서 메밀꽃이 피는 정경의 묘사 부분이다. 사실, 나는 이 대목보다는 다음 장면이 더 아찔하고 관능적이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어쨌든 이효석의 소설 무대인 평창의 축제는 9월 초에서 중순에 열린다. 메밀꽃이 아름답게 피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꽃이 지고 메밀은 10월 중순에 수확한다. 그러니까, 메밀은 매우 늦게 열매를 맺는 곡물인 것이다. 그래서 코가 서늘하게 얼어붙는 외풍이 치는 한겨울 밤이 되어야 메밀묵 장수가 어두운 밤거리를 그렇게 누비고 다녔다.

간토지방은 길에 차이는 게 메밀소바집  “메미일 무욱! 찹싸알 떠억!” 선친은 이를 “모밀묵”이라고 부르며 아주 좋아하셨다. 깊은 밤, 막 잠이 들 무렵에 선친은 메밀묵 장수를 불렀다. 나는 달콤한 찹쌀떡을 먹고 싶었지만, 돈이 모자라 그저 메밀묵 한 모를 달랑 샀다. 어머니가 꺼내 오신 김장김치에 싸서 먹는 그 메밀묵 맛이란!

▲ 나는 뜨거운 메밀소바를 좋아한다. 낡은 미렌을 들추고 나무 탁자에 앉아 메밀소바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순간을 즐긴다.
메밀은 가을 겨울이 제철이고 길어야 봄까지 먹을 수 있다. 그건 식품의 저장기한으로 봐서 당연하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메밀이 제 맛을 낼 수 있는 한계다. 한국이 겨울에 메밀을 즐겼듯이 일본도 마찬가지다. 한 해를 넘기는 섣달 그믐날에는 메밀국수를 먹는 풍습이 있을 정도다.

메밀을 쓰는 냉면은 그래서 원래 겨울음식이었다. 한여름에 얼음을 구하는 게 어려운 일이기도 했지만, 필수적인 동치미와 메밀 맛이 좋은 겨울에 말았다. 그러던 게 냉장고가 보급되고, 계절을 거스르는 인간의 욕망이 여름냉면을 만들어냈다.

일본의 메밀국수 먹는 문화는 우리보다 훨씬 번성하고 잘 계승되었다. 한국에서 아무 때나 메밀국수-특히나 한여름에 뜨거운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집은 아주 드물다-를 먹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일본, 특히 도쿄를 중심으로 한 간토지방에서는 길에 차이는 게 메밀소바집이다.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 지방은 우동을 더 많이 먹고, 도쿄는 역시 메밀이다. 간토지방에서는 뭔가 우동이란 메밀보다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다.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메밀소바를 먹어야 한다는 은근한 정서다. 그러던 것이 신세대에 이르면 메밀의 굴욕도 일어난다. 젊은 세대가 메밀이든 우동이든 라멘보다 덜 먹게 되는 경향이다. 라멘은 일본화되었지만 원래 광둥(홍콩)의 국수 문화니까 말이다.

일본을 여행하다보면 간혹 미렌(가게 앞에 쳐놓은 휘장)에 '쥬와리소바(十割そば)'라고 적어 놓은 걸 발견할 수 있다. 메밀 100%의 면이란 뜻이다. 원래 메밀은 잘 뭉치지 않는 성질이 있어서 100% 면을 만들기 어렵다. 그래서 보통 니하치소바(二八), 즉 메밀이 8, 밀가루가 2가 들어간 반죽을 이상적으로 본다. 메밀 향은 충분하며, 반죽하기도 좋고 먹을 때 식감도 좋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냉면도 제대로 된 것은 보통 메밀 함량이 70% 이상이고 간혹 100%에 가까운 것도 있다.

여름에 먹는 차가운 자루소바
나는 뜨거운 메밀소바를 좋아한다. 한여름에도 먹고 싶다. 낡은 미렌을 들추고 나무 탁자에 앉아 메밀소바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순간을 즐긴다. 좋은 훈제고등어를 넣어 우린 국물과 향기 은은한 메밀소바의 감촉을 원한다. 하지만 여름이면 차가운 자루소바를 먹기도 한다. 보통 채반에 담아서 김을 뿌린, 츠유라는 소스에 찍어먹는 그 면이다.

한국에서도 일제시대에 전래되어 오래된 집들이 간혹 있다. 그러나 대개는 메밀 함량이 턱없이 부족해서 화만 치미는 경우가 많다. 메밀국수에 메밀이 없는 것이다. 이런 일이 어디 메밀뿐이랴만 그래도 한 그릇의 메밀국수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다는 게 얼마나 절망적인지.

자루소바는 김을 뿌린 것을 뜻하고, 보통은 모리소바가 더 흔하다. 그냥 찬물에 헹군 메밀면과 무를 곁들인 츠유(간장소스)가 나온다. 일본과 한국식이 사뭇 다른데, 일본은 츠유가 상당히 짜서 면을 젓가락으로 들고 살짝 찍어서 먹는다.

한국은 알맞게 간이 되어 있어서 국수를 푹 담갔다 먹는다. 어떤 식이든 관계없다고 생각하지만, 일본에 가서 오리지널 방식으로 드셔보시라(좀 황당한 경우도 있는데, 아예 물국수처럼 츠유를 묽게 해서 거기에 국수를 담가 주는 집도 봤다. 순전히 편리한 설거지와 그릇 수를 줄이려는 의도로밖에 읽히지 않는다).

참, 라멘도 그렇지만 메밀소바든 자루소바든 일본의 국수집에서 단무지는 대개 주지 않으니, 각오하시라. 한여름에만 가능하다는 후지산 트레킹을 마치고 간토 지방에서 진짜 자루소바 한 그릇이라면 괜찮은 투어가 아닌가. 참, 자루소바는 나무젓가락을 써야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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