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탕 내리치고 대가리를 콱 깨물어라
탕탕 내리치고 대가리를 콱 깨물어라
  • 글·사진 박찬일 기자
  • 승인 2011.11.07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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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지

목포는 항구다. 그래서 산물이 모인다. 일제 때 특히 크게 성했다. 정작 목포 앞바다는 산물이 드나들기 좋을지언정, 물질하기에 맞춤한 곳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홍어도 목포산이 유명하지만, 알다시피 흑산도와 영산강, 나주로 이어지는 길목에 목포가 있었던 것이다. 나주 갈 홍어라도 목포에서 제 살을 내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듬직하고 단단한 목포는 그렇게 맛을 일구었다. 목포의 맛의 알려진 대부분은 인근 신안과 무안에서 온다. 철이 막 지난 민어도 신안에서 잡아 목포의 이름으로 유명해졌다. 신안 임자도라고 누가 알랴. 목포는 눈물이 아니라, 그 대표성으로 인근 지역을 대신해주었던 거다.

낙지도 그렇다. 인근의 무안산이 바로 세발낙지의 고향이라고들 한다. 세발낙지가 다리가 가늘다고 해서 세(細)발이 된 건 아실 것이다. 무안에 갔다. 한국에서 팔리는 세발낙지는 거개 가짜다. 어린 낙지를 세발낙지로 포장해서 판다. 어려서 다리가 가는 것과 어찌 같을 것이냐. 무안에도 세발낙지가 드물다. 그러나 맛있는 낙지는 풍부하다. 말도 안 되는 값에 세발낙지를 먹었다고 좋아하는 어수룩한 이는 되지 말자.

통째로 나온 낙지가 진짜 산낙지


원래 ‘봄 주꾸미 가을 낙지’라고 한다. 따지고 보면 낙지가 섭섭하다. 요새 미디어에서 하도 주꾸미 축제니 뭐니 떠들어서 그렇지 두 물상이 서로 비교될 수준은 아니다. 낙지가 훨씬 윗길인 것이다. 가을 낙지가 확실히 맛은 좋다. 그러나 봄 낙지도 맛있다. 대가리를 콱 깨물면 밥알 같은 알이 가득 찼다. 응? 그건 주꾸미 얘기 아니었어? 천만의 말씀이다. 낙지라고 머리(실은 몸통이다) 말고 어디에 알을 품으랴. 게다가 비슷한 두 녀석들 아닌가.

낙지 하면 산낙지를 떠올리게 된다. <올드보이> 덕에 한국 하면 산낙지를 생각하는 외국인도 꽤 있겠다. 뭐든 좋다. 그런데 무안 같은 곳에 가서 섣불리 산낙지 찾지 말라. 외지인 티가 나서 웃는다. 여기선 산낙지라고 하는 건 그냥 통째로 나오는 낙지가 바로 산낙지다. 칼로 자르지 않고 낙지가 음흉하게 접시 위에 도사리고 나온다. 자, 어찌 해보슈, 뭐 이러는 것 같다. 엄두가 안 나는, 지구상에서 가장 손을 안대는 요리다. 그러니까 자연이 요리사인 요리다. 잡아서 그냥 낸다. 그걸 현지인들은 젓가락에 둘둘 말아(젓가락은 나중에 또 나온다) 홀랑 씹는다. 지금도 간혹 신문 ‘휴지통’ 같은 데 낙지를 산채로 먹다가 노인네가 어찌 됐네 하는 기사는 바로 이런 취식법 때문이다.

꼭꼭 씹어 먹으면 별 일 없겠는데, 이놈의 낙지가 목구멍으로 기어들면 사고가 나는 거다. 다리가 요동을 치든 말든 대가리를 콱 깨물어야 한다. 그래야 힘을 잃는다. <행복한 세계 술맛 기행>을 쓴 일본인 미식가 니시카와 오사무 선생이 산낙지 먹은 얘기를 그 책에 올렸다. 웃음이 슬며시 나온다. 그는 어느 거리 포장마차에서 이걸 처음 먹게 된다.

“젓가락으로 집었더니 접시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빨판이 즉시 뺨 안쪽에 달라붙는다. 이가 닿을 수 있도록 뺨을 일그러뜨려 힘주어 씹는다… 씹을 때의 촉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경쾌하다. 접시 위에서는 짧게 토막이 난 낙지의 다리가 한 마리 긴 애벌레처럼 여전히 꿈틀거린다. 블랙유머 같은 느낌이 든다. 가나자와(金澤)에서는 그릇 안에서 헤엄치고 있는 투명한 빙어를 산 채로 먹어본 적이 있지만 그보다 몇 배는 더 유머를 느끼게 하는 음식이다.”

블랙 유머라. 그는 정곡을 찔렀다. 죽어도 다리에 남아 있는 신경의 꿈틀거림으로 생존을 항변하는 ‘죽은 낙지’의 블랙 유머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다음 작품에서 이걸 써먹어야 한다. 이런 통렬할 데가.

낙지의 또 다른 이름 ‘탕탕’
니시카와 선생이 먹은 것 같은 산낙지는 산지에선 ‘탕탕’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러면 대접받는다. 어, 이 양반들, 좀 먹네. 낙지의 등급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탕탕이란, 다리를 자르기 위해 나무 도마 위에서 크게 탕! 탕! 내려쳐야 한다는 데서 유래했다. 산낙지 다리를 잘라본 사람만이 안다. 이건, 저미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탕탕탕 내려쳐야 깔끔하게 잘린다. 기요틴처럼 순식간에 잘라야 한다. 그 의성어의 절묘한 묘미가 음식 이름이라니. 시인들이여, 한 수 배워라. 민중은 그래서 그 삶이 시다.

낙지 호롱이라는 것도 있다. 낙지 한 마리를 소독저에 감아 굽는 거다. 매운 양념을 발라 연탄불이나 숯불에 구워야 제격이다. 맵고 구수하다. 이걸 하나씩 잡고 뜯으면, 다 같이 친구가 된다. 어설픈 교양 따위는 호롱구이 앞에 무색해진다. 자, 한 손에는 소주잔을! 물론 양념해서 불판 위에서 벌겋게 굽거나. 낙지볶음도 좋다. 아아, 낙지 먹고 싶다.

지중해쪽에서는 낙지(문어)를 부드럽게 만드는 여러 가지 비결을 갖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통째로 낙지나 문어를 잡고 시멘트 바닥에 내려치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양깃머리를 부드럽게 하려고 그렇게들 한다. 잔인하다고? 산낙지는 동서양에서 모두 그렇게 대접받으니. 한쪽에서는 내려치고, 한쪽에서는 산채로 탕탕, 자르고.

하루키의 <일상의 여백>을 보면 하와이 사람들이 낙지를 부드럽게 하는 기술이 나온다. 좀 엽기다. 옮겨 본다.

“집에 갖고 가서 일단 세탁기에 집어넣어 세탁해 버린다. 그리스에서는 잡은 낙지를 콘크리트 바닥에 내동댕이쳐 부드럽게 만들지만 미국의 낙지잡이는 그런 야만스런 짓은 하지 않는다. 시어즈 전자동 세탁기의 헹굼이나 탈수 스위치를 눌러 덜그럭 덜그럭 하고나서 그것으로 끝난다. 보고 있노라면 낙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들지 않는다. 생각해보라. 기분 좋게 잠을 자고 있다가 끌려나와 아니 이런, 하고 생각하고 있을 동안에 ‘탈수’당하면 정말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정말 그런 식으로는 죽고 싶지 않다.”
하루키 특유의 농담에 웃음이 슬그머니 배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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