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반은 단청 같고 반은 시와 같네
여강의 반은 단청 같고 반은 시와 같네
  • 박성용 기자
  • 승인 2011.04.05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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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TRAVEL 여주 Prologue

▲ 여강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신륵사 강월헌

여주에는 여강(驪江)이 흐른다. 강원도 태기산에서 발원하여 원주를 지나온 섬강과 충청도 속리산에서 내려와 충주를 거친 달천, 그리고 경기도 용인시 문수봉에서 발원하여 이천시 장호원을 거쳐 여주로 흘러드는 청미천을 품안에 받아들인 남한강은 여주 땅 점동면 삼합리에 들어서면서 여강이라는 이름 하나를 더 갖는다. 여강은 여주를 지나는 남한강 물줄기를 뜻한다. 

남한강과 섬강, 청미천 세 물머리가 합쳐지는 삼합리는 충청도ㆍ강원도ㆍ경기도가 만나는 접경지역이다. 이곳 토박이 노인은 “옛날 시절엔 겨울이 되면 삼도에서 모인 노름꾼들이 꽁꽁 언 강을 건너다니며 투전판을 벌였다”고 한다.       

곳곳에 비경 감춘 여강 100리길             
여강은 점동면 삼합리부터 금사면 전북리까지 약 39km, 100리길이다. 여강은 여주를 지나는 동안 금당천ㆍ양화천ㆍ곡수천ㆍ복하천ㆍ품실천 등 여럿 지천들을 받아들여 유장한 물줄기를 이루며 곳곳에 모래톱을 쌓았다. 그 모래가 얼마나 눈부실 정도로 고왔으면 금모래ㆍ은모래로 불렀을까. 생각난다. 20여 년 전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에 앉아 밤늦도록 기울였던 술잔을. 달빛이 쏟아지는 하얀 모래사장에 넋을 잃고 강물에 뛰어들고 싶었던 황홀한 밤을.

여강의 아름다움은 오늘만의 찬사는 아니다. 예전 사람들은 여강의 상단을 단강(丹江), 중간을 여강(驪江), 하류를 기류(沂流)로 나누어 부를 정도로 저 강을 뼛속 깊이 사랑했다. 목은 이색은 ‘여강의 굽이굽이 산이 그림 같아서/ 반은 단청 같고 반은 시와 같네’고 읊었다. 또 조선 순조의 외조부 박준원은 ‘바위가 우뚝 강가에 솟았는데/ 높은 옛 절 앞에다 큰 못을 만들어 두었네/ 바로 고란사와 난형난제이지만/ 은모래 먼 시야가 한층 더 아름답네’라는 시를 남겼다.  

여강이란 이름은 여주의 옛 이름인 황려(黃驪)에 기원을 두고 있다. 여주 지명의 유래는 고려시대 이규보가 쓴 ‘웅(雄)하고 기특한 쌍마(黃馬ㆍ驪馬)가 물가에서 나오매 현 이름이 황려(黃驪)가 되었네’라는 시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이렇듯 옛 선인들의 발걸음을 잡아끌었던 여주에는 팔경이 있다. 신륵모종(神勒暮鍾ㆍ신륵사에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 마암어등(馬巖漁燈ㆍ마암 앞 강가에 고기잡이배의 등불 밝히는 풍경), 학동모연(鶴洞暮煙ㆍ강 건너 학동에 저녁밥 짓는 연기), 연탄귀범(燕灘歸帆ㆍ여울에 돛단배 귀가하는 모습), 양도낙안(洋島落雁ㆍ양섬에 기러기떼 내리는 모습), 팔수장림(八藪長林ㆍ오학리 강변의 무성한 숲이 강에 비치는 전경), 이릉두견(二陵杜鵑ㆍ영릉과 녕릉에서 두견새 우는 소리), 파사과우(婆娑過雨ㆍ파사성에 여름철 소나기 스치는 광경)가 그것이다.  

▲ 고려 말기 석종형 부도인 보물 제228호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과 보물 제231호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
명성황후 등 왕비 8명 태어나    
강은 땅을 기름지게 하고 그 땅에서 나고 자라는 물산은 풍족하다. <신찬동국여지승람>은 여주 땅을 ‘강의 좌우로 펼쳐진 숲과 기름진 논밭이 멀리 몇 백리에 가득하여 벼가 잘 되고 기장과 수수가 잘 되며, 나무하고 풀 베는 데에 적당하고, 사냥하고 물고기 잡는 데에 알맞으며, 모든 것이 다 넉넉하다’고 했다.

<택리지>는 여주를 대동강변의 평양, 소양강 주변의 춘천과 함께 나라 안에서 가장 살기 좋은 강촌이라고 하였다. 또 여주에서 생산되는 자채쌀을 최고의 쌀로 꼽았다. 수확이 빠른 자채쌀은 윤기와 맛이 뛰어나 예로부터 임금님 수랏상에 올랐다. 자채쌀은 양화창(현재 여주군 능서면)에서 모아진 뒤 여강 물길을 이용해 서울의 경창(한강 남쪽에 설치된 세곡 저장 창고)로 수송되었다.

이 쌀로 밥을 지으면 백자처럼 푸른 기운이 돌 정도로 빛깔이 아주 희다고 한다. 밥이 너무 찰지고 기름지기 때문에 처음 먹는 사람은 설사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생산량이 적다는 이유로 1960년대 들어서 자취를 감췄지만, 땅이 기름지고 물이 넉넉한 이곳에서 나오는 쌀들은 여전히 품질이 뛰어나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지리적 환경에 힘입어 여주는 무역과 교통의 중심지였다. 당시 교역은 나루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여강에만 창남나루, 흔바위나루, 우만이나루, 부라우나루, 이호나루, 이포나루, 조포나루, 여주나루, 양화나루 등 번성했던 나루터들이 많았다.

조포나루, 이포나루는 마포나루와 광나루와 함께 조선 4대 나루였다. 이들 나루터에는 강원도에서 나오는 목재와 약재 그리고 다른 지방의 농산물과 해산물들이 수없이 모여들어 포구마다 객주들이 즐비하여 여강을 ‘한국의 양자강’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렇게 물산이 풍부하고 지령(地靈)이 남다른 곳에선 인물도 뛰어난 법. 여주는 왕비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고장이다. 고려 원종의 순경태후와 조선 태종의 원경왕후를 비롯해 숙종의 인현왕후, 영조의 정순왕후, 순조의 순원왕후, 헌종의 효현왕후, 철종의 철인왕후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운의 명성황후 등 모두 8명이다. 이중 원경왕후, 인현왕후, 명성황후는 여흥 민씨로 여주에 본관을 두고 있다.

▲ 도자 유적이 84기가 분포된 여주는 도자기 산지로 유명하다. 북내면 상교리 즘골의 김원주 도예소
옛 명성 이어가는 도자기 고장    
이런 여주 땅은 비록 한양 100리를 벗어났지만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를 모신 영릉(英陵), 효종대왕과 인선왕후가 잠든 영릉(寧陵)이 자리 잡을 만큼 명당으로 꼽혀왔다. 이밖에 신륵사, 파사성, 고달사지 등 국보 1점과 보물 18점을 비롯해 76점의 문화재들이 여주 땅 곳곳에 보석처럼 박혀 있다.

여주에서 빼놓을 수 없는 특산물은 도자기다. 여주 지역의 도자 유적은 강천면, 북내면, 산북면, 능서면, 가남면, 점동면 등 6개 면을 중심으로 모두 84기가 분포한다. 이중 북내면에  가장 많은 46기가 있다. 여주 도자기가 유명한 것은 북내면 싸리산을 중심으로 점토, 백토, 고령토 등 도자기 원료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고려 말부터 도자기를 굽기 시작한 여주는 지금 600여 개에 달하는 도자기 공장들이 들어서 있다. 매년 5월에 열리는 도자기 축제는 전 군민이 참여하고 전국에서 관람객이 모이는 국민 축제로 자리 잡았다.  

북내면 상교리 즘골에서 김원주 도예소를 운영하는 김원주씨는 “이곳 즘골에만 옛날 가마터가 여러 개 있었다. 그래서 도자기 굽는 사람을 즘놈, 즘마니로도 불렀다”고 설명했다. 그는 “가스나 기름을 사용하는 현대식 가마는 온도와 불길을 일정하게 맞출 수 있어 도자기 빛깔이 일률적이지만 불꽃이 살아 꿈틀거리는 전통 장작 가마에서는 색깔이 오묘한 도자기가 나온다”고 말했다.

예로부터 강을 낀 고장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강을 뺏고 빼앗기는 격전지이자 외침이 있을 때에는 배수의 진을 쳤던 군사 요충지 여주는 지금 또 다른 싸움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른바 한강 살리기 사업. 한쪽에선 강을 살리는 사업이라고 말하고, 다른 한쪽은 멀쩡한 강을 죽이는 사업이라고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하얀 얼음장을 뒤집어쓰고 숨죽여 흐르는 저 여강은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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