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말발굽 소리
내 마음의 말발굽 소리
  • 이지혜 기자| 사진 양계탁 기자
  • 승인 2015.09.10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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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DOOR INSIGHT ②마장마술 전재식 선수 & 장애물 송상욱 선수

‘말을 타는 스포츠’라고 하면 많은 이들이 관람석을 가득 메운 인파가 열광하고 말이 경주로를 질주하는 경마를 연상할 것이다. 하지만 말과 함께하는 스포츠의 꽃은 따로 있다. 바로 말을 타고 부린다는 뜻의 마술(馬術), 즉 ‘승마’다. 여름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8월, 과천에 있는 렛츠런파크에서 두 명의 국가대표 승마선수를 만났다.

우선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두 분의 인연이 참 길다고 들었어요. 서로를 소개해 주시겠어요?
전재식(이하 전) 송상욱 선수는 우리나라 승마 장애물 종목에서 최고 실력자예요. 지난 2014년에 열렸던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는 28년 만에 한국의 개인전 금메달을 이뤄낸 선수이기도 하죠. 저와의 인연은 30여 년 가까이 됩니다. 제가 중학생 때, 그러니까 송상욱 선수가 초등학생 때 만났죠. 당연히 말 위에서요. 성격이 꼼꼼하고 세심해요. 나쁘게 말하면 예민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웃음) 승마선수로서는 최고의 실력을 갖출 수 있는 성격이죠. 경기에 대해 철저히 분석하고 준비해서 결과를 이뤄내는 선수예요.

송상욱(이하 송) 과찬이에요. 전재식 선배는 제가 걸어가고 있는 길을 다져주는 고마운 존재예요. 소속팀에서도 가장 맏형으로 제가 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세심하게 봐주시는 정신적 지주라고 할까요. 옛날부터 같은 시대에 말을 타며 아주 많은 부분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이자 스승이에요. 2002년 렛츠런 승마단에 입단하며 먼저 소속되어 있던 저와 본격적으로 함께 운동할 수 있었죠. 적지 않은 나이에도 말을 타고 국가대표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 제가 본받아야 할 점이에요.

30년간 말을 타셨다면, 국내 마장마술의 산 증인이라고까지 표현할 수 있겠네요. 그 시작이 어땠는지 궁금해요.
33년 전, 또래보다 키가 작고 왜소하다는 이유로 승마를 시작했어요. 그때는 단지 재미로, 동물을 좋아하니까 승마를 시작했어요. 사실 전 지금 말하는 소위 ‘엄친아’였답니다. 부산에서 아버지 성함을 들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부유한 집안의 막내아들로 중학생이 될 때까지 부족함 없이 말을 탔어요. 하지만 승마가 많은 사람에게 인식되어 있듯 ‘귀족스포츠’가 절대 아니란 걸 말하고 싶어요.

고등학생이 될 무렵,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져 집안 환경이 급격히 휘청거렸죠. 제 말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어 말을 팔아야 했어요. 제대로 된 레슨은커녕, 몇 배로 비싼 말을 타는 동료들과 경쟁하며 서러운 마음에 울기도 많이 울었죠. 오히려 그 때 마음먹었어요. 그냥 좋아서 탄 말이었지만, 국가대표가 되어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겠다고 다짐했죠.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았어요. 상무 부대에 입대할 땐 제 말이 없어 감독님께서 본인의 적금을 깨서 말을 구해주셨어요. 그렇게 힘들게 타왔던 말이라 그런지, 어느새 돌아보니 이미 제 운명이 되어있었죠.

운명이라. 맞아요. 말을 타는 건 운명이에요. 저는 송상욱 선수와 조금 달라요. 처음부터 가난했죠. 중2 때 우연히 국가에서 진행한 올림픽 승마 꿈나무 프로젝트에 발탁되었어요. 집에선 난리가 났죠. 돈을 벌어 집안에 보탬이 되진 못할망정 ‘귀족스포츠’라고 불리던 승마를 하겠다고 나섰으니까요. 하지만 말을 탄 그 순간부터 온 마음이 말에게 빼앗겨 있었어요. 말 그대로 운명 같았어요. 물론 현실은 쉽지 않았죠. 겨우 고3 때 승마 종합마술 국가대표가 되었는데 정작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로 발탁되지 못했어요. 제가 탄 말이 아프지도 않았는데 선발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말이 아프다는 판정을 받았어요.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는 걸 알아챘죠. 그 충격에 8개월간 말을 타지 않았던 적도 있어요.

말과의 인연이 끊긴 거네요. 그런데 어떻게 다시 돌아오게 된 건가요? 혹시 말의 매력 때문인가요?
어떻게 아셨어요? 사실이에요. 딱 2주가 지나니 눈을 감으면 눈앞에 말이 어른거렸어요. 가정환경 탓에 한 번도 제 말을 가져본 적이 없지만, 말이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어요. 선배들은 흔히 이런 증상을 ‘말 귀신에 씌었다’고 해요. (웃음) 제가 그랬던 거죠. 승마 선수라면 한 번쯤 겪는다지만, 그만두자 마음먹은 뒤라 그런지 그리움은 더 커져만 갔죠. 그러다 우연히 TV를 켰는데 아시안게임 선발전을 함께 치렀던 선수들이 금메달을 따고 있더라고요.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마음을 바꿨어요. 일단 한번 시작했으면 끝을 보자고요. 그리고 말을 다시 만났는데,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이 날 뻔했다니까요.

말은 정말 매력 있는 동물이에요. 개를 비롯한 반려동물처럼 애교를 피우고 사람 옆에 꼭 붙어있는 매력은 없지만,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사람을 치유해주는 매력이 있어요. 경기가 안 풀리거나 슬럼프에 빠질 때면 어김없이 늦은 밤 마상을 찾죠. 말은 그곳에서 묵묵히 제 옆에 있어 줘요. 가만히 말을 보고 있노라면 그 눈이 제게 “괜찮다”고, “할 수 있다”고, 또 “잘하고 있다”고 말해줘요. 저와 말만이 느낄 수 있는 교감이죠. 그 매력에 빠진 승마 선수라면, 쉽게 고삐를 놓기 힘들죠. (웃음)

두 분 다 말에 대한 애정이 상당하시네요. 그렇다면 말 이야기를 조금 더 해주세요.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아있는 말이 있으시죠?
수없이 많죠. 그중에서 저는 ‘판타지아’라는 말을 꼽고 싶어요.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제가 2관왕을 할 수 있게 도와준 말이에요. 암컷인데 곧 있으면 만난 지 1년이 지나가네요. 판타지아는 제가 33년간 타 본 말 중에 가장 어려운 말이었어요. 무척 예민하고 관리하기도 힘들었죠. 안장이 조금만 비뚤어져도 앞발을 들어버려요. 그만큼 위험하기도 했죠. 아시안 게임 퀄리파이를 위해 판타지아와 독일을 갔었어요. (퀄리파이를 통과해야 국내 선발전에 출전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첫 마장마술 경기에서 꼴찌를 했죠. 그러면서 점점 피나는 분석으로 컨디션 트레이닝을 했어요. 퀄리파이에서 5~6경기를 더 뛰며 자격을 부여받았고, 결국엔 아시안게임에서 우승할 수 있었어요.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만큼 저와의 합이 맞아떨어졌을 때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가장 잊을 수 없는 말을 ‘클래식걸’이에요. 클래식걸은 지난 12년 간 강습용 말로 살았어요. 일반인이 와서 쉽게 타 볼 수 있는 그런 말이요. 사실 클래식걸은 제가 강습용 말을 사기 위해 독일에 갔을 때 걸음걸이가 좋아 발견했는데 1800만 원짜리 저렴한 가격에 아무도 클래식걸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죠. 그런데 지난 2011년 저의 마장마술 말이던 ‘다크뷰티’가 실명해 은퇴했어요. 그때 대체말로 고른 녀석이 클래식걸이었어요. 클래식걸은 처음 출전한 마장마술 대회에서 평균 4억 원 몸값을 자랑하는 경쟁자들을 제치고 2회 우승을 기록하며 진가를 발휘했어요. 지난 아시안게임도 함께 출전했죠. 지금 클래식걸의 가치는 20배가 넘게 뛰었어요. 기품 있고 아름다운 백마로 지금은 마사회의 ‘스타마(馬)’로 유명해요. (웃음)

두 분 모두 소중한 추억을 함께한 말을 마음에 품고 계시네요. 또한, 두 분께서는 아시안게임에 사연이 깊다고 들었어요.
저는 아시안게임의 ‘불운아’로 유명해요. (웃음) 운명의 장난처럼 아시안 게임의 문턱에서 계속 좌절했으니까요. 86년 서울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전을 치르며 마음의 상처를 받았지만 결국 다시 고삐를 쥐게 되었죠. 그렇지만 시련은 쉽게 가시지 않았어요. 90년 베이징 아시안 게임에서는 승마가 정식 종목에서 빠지는 바람에 출전 기회를 자연히 놓쳤고,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은 선수들의 보이콧으로 출전하지 못했죠. 학수고대했던 98년 방콕 아시안게임도 결과적으로 나가지 못했어요. 장애물 4명 선발에 4등을 하고서도 대표 최종 명단에서 빠졌죠. ‘보이지 않는 손’이 또 저를 한 번 더 무릎 꿇게 한 거예요.

이후 2002년 마사회에 입단 후 드디어 아시안게임을 위해 호주에 전지훈련을 갔지만 예기치 못한 부상으로 또 한 번 고배를 마셔야 했어요. 절치부심 끝에 벼르고 벼르던 2006년 아시안게임에 출전했지만 제 바로 앞에 출전했던 김형칠 선배가 낙마 사고를 당했죠. 뜻하지 않은 사고로 남은 경기 출전을 모두 포기했어요. 그야말로 ‘불운의 연속’이었죠. 그래도 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2010년이 되어서야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출전해 메달을 딸 수 있었어요. 아시안게임과 저는 참 기구한 운명인 거죠.

저는 사실 아직도 아시안게임 하면 가장 떠오르는 기억이 김형칠 선배의 낙마 사고에요. 당시 충격에 빠져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았어요. 동료이자 친구, 친한 선배였던 국가대표팀의 맏형 김형칠 선배의 죽음을 눈앞에서, 그것도 경기 도중 접해야 했으니까요. 처음 출전한 아시안게임에서 그런 일을 당하고 나니 선배에게 마음이 빚이 생기더군요. 장애물 종목 대표로 출전하며 가슴속에 김형칠 선배의 이름을 새겨 꼭 금메달을 따겠다고 맹세했어요. 하지만 단체전 은메달에 그쳤죠.

이후 주 종목을 종합마술(마장마술, 장애물 비월, 크로스컨트리의 3종목을 겨뤄 메달을 가르는 종목)로 바꾼 뒤 출전한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선 7위에 머물렀죠. 그야말로 문제 투성이었어요. 그러다 아까 말씀드린 ‘판타지아’를 만났죠. 어떤 면에선 판타지아와 함께 연습하며 제 마음의 상처도 치유됐던 것 같네요. 판타지아와 이뤄낸 지난 아시안게임의 금메달을 김형칠 선배에게 바친다고 자주 말했지만, 그건 제 진심이에요.

힘든 일을 겪어 내면서도 목표를 이뤄 나가는 모습이 멋지네요. 두 분이 역경 속에서도 계속 승마를 할 수 있었던 승마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한마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겠죠. 하지만. 누군가 저에게 어린 시절로 돌아가 다시 처음부터 승마를 배우라고 한다면 두 번 다시 못하겠다고 할 거예요. 그만큼 승마는 심오하고 어려운 운동입니다. 33년 경력의 저를 무색하게 할 만큼 말입니다. 그리고 그 만큼 매력 있는 종목이에요.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들죠. 전재식 선배 말처럼, ‘말 귀신에 씌었다’는 말이 정답이에요. (웃음)

맞아요. 승마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은 느끼지 못할 희열이 있죠. 말과의 교감은 그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에요. 오랜 시간 쌓아온 둘 만의 유대감은 승마를 더욱 놓치지 못하게 만들죠. 섬세하고 감정적이면서도 고난도의 기술을 필요로 해요. 그 모든 것이 맞아 떨어졌을 때, 그 느낌은 말로 표현 못 해요.

그렇군요. 마지막으로 두 분의 목표에 대해 듣고 싶어요. 적지 않은 나이에도 신화를 이어가고 계시잖아요.
신화랄 것까지는 없지만, 해외 유명한 승마 선수 중에 40~50대가 많아요. 말은 평생 탈 수 있는 스포츠죠. 개인적으로는 20년 정도를 타보니, 그제야 승마에 대해 조금 알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60살이 될 때까지 말을 타고 싶어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도 출전하고 싶어요. 또 승마가 ‘귀족 스포츠’라는 인식을 깨고 사회체육으로 확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국내에서도 승마용 마필을 생산하고, 단단한 인프라를 구축해 말을 타는 인구가 늘고 대중적으로 확산할 수 있도록 노력할거에요.

부끄럽지만 전 지금까지 스스로와의 약속을 꺾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이 길을 걸어오며 현실에 한계를 느낄 때가 많았지만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놓치지 않았죠. 제 목표 역시 선배와 비슷해요. 현직 국가대표 승마 선수라면 당장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승마하며 다른 길로의 유혹도 많았지만, 아시안게임에서 태극기를 휘날렸을 때의 성취감을 잊지 못해요. 계속해서 선수로서의 더 큰 꿈을 향해 한 발자국씩 더 나갈 거예요.


렛츠런파크 서울 시민 레저공간을 무료로 개방해 지역주민을 위한 공간으로 제공하고 있다. 말 테마 레저공간 조성을 통해 어른뿐만 아니라 어린 아이들에 친숙한 어린이승마장, 어린이휴게실, 어린이놀이터, 포니랜드 등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있다.

경기도 과천시 경마공원대로 107. 1566-3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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