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Travel | 전주 ② 한옥길
Korea Travel | 전주 ② 한옥길
  • 글 채동우 기자 | 사진 양계탁 기자
  • 승인 2014.03.19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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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마을 둘레길…오목대~양사재~전주향교~전주전통문화연수원~한벽당
팔작지붕 용마루의 유려하고 웅장한 도열

조선 개국의 원대한 꿈이 살아 숨 쉬는 곳, 오목대
언제부턴가 전주 한옥마을은 단순관광, 소비 위주의 공간으로 변했다. 유구한 역사와 이야기들이 두 눈앞에 생생히 펼쳐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옥마을을 찾은 방문객은 인사동을 방불케 하는 싸구려 기념품과 MSG 향기를 풍기는 길거리 음식에 현혹되고 만다. 한옥마을의 역사를 알고 골목 곳곳에 숨어 있는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복장 터질 일이다.

▲ 오목대로 올라가는 길은 계단과 데크로 정비되어 있어 쉽게 정상에 오를 수 있다.

그렇다면 한옥마을의 진짜 얼굴과 수백 년 역사를 이해하고 둘러보기 위해선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우선 한옥마을 중심가 방문은 여정 가장 이후로 미루고 한옥마을 외곽을 걷는 한옥마을 둘레길을 걸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실제로 한옥마을 전체를 두고 봤을 때 외곽 쪽에 감동 받을 수 있는 한옥들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문화관광해설사와 동행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택이다. 안내판 너머에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생생히 들을 수 있어 알찬 여행을 즐길 수 있기 때문. 다만 20명 이상 단체 방문객에 한해 문화관광해설사 동행이 가능하니 참고하도록 하자. 예산상의 문제 때문이겠으나, 진정으로 한옥마을의 참모습을 알리려는 의지가 있다면 그보다 적은 수의 인원이라도 문화관광해설사 지원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한옥마을은 함부로 증·개축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처럼 옛날 모습을 간직한 슈퍼마켓도 만날 수 있다.

▲ 오목대 정상에서 바라본 한옥마을. 한옥마을의 가지런한 기왓장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한옥마을 둘레길은 오목대에서 시작한다. 오목대는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세우기 12년 전, 황산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돌아오던 길에 본향인 전주에 들러 여러 승리를 자축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김난희 문화관광해설사는 “오목대의 오목은 오동나무를 뜻하는데 오동나무에는 봉황이 깃든다고 한다”며 “선조들이 오동나무를 심은 데는 내 딸이 왕비와 같은 대접을 받으며 시집가기를 기원하는 마음도 숨어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목대는 조선왕조 개국의 시작점으로 알려져있다. 이 야트막한 언덕에는 유독 오동나무가 많았다고 전해지는데 그 이면에는 이래저래 많은 의미가 숨겨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전국최대규모의 향교로 알려진 전주향교는 각종 드라마 촬영지로도 유명해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오목대로 향하는 길은 데크과 계단으로 잘 정비되어 있어 힘들이지 않고 올라갈 수 있다. 특히 정상 직전 데크는 한옥마을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니 꼭 들러보도록 하자.

▲ 오목대 아래 당산나무. 매년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의 무사평온을 기원하는 당산제가 열린다.
▲ 향교내에 있는 은행나무. 보수의 흔적이 나무의 나이를 짐작게 한다.


650년 역사 지켜온 전국 최대규모 향교, 전주향교
오목대를 지나 만나는 곳은 양사재다. 현재는 방문객을 위한 숙박시설로 이용되고 있으나 원래는 향교의 부속 건물로 서당 공부를 마친 재능 있는 이들이 모여 생원 진사시 공부를 하던 곳이다. 또한 이곳은 가람 이병기 시인 머물며 많은 시를 남긴 곳으로도 유명하다. 현재까지도 구들장을 때고 있으며 최대 24명이 동시에 숙박할 수 있다. 김난희 해설사는 “양사재는 비록 크기가 아담하지만 한옥의 멋과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곳”이라며 “머름 아래 누워 마당을 지켜보거나 비 오는 날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바라보는 등 고즈넉한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 공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대성전.

▲ 현재 양사재는 방문객을 위한 숙박시설로 이용되고 있으나 원래는 서당 공부를 마친 재능 있는 이들이 모여 생원 진사시 공부를 하던 곳이다.

양사재를 지나 곧장 향교로 향한다. 전주 향교는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는 전국의 향교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웅장한 만화루를 지나 향교에 들어서면 수백 살은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김 해설사는 “대부분의 향교에 은행나무가 심어진 이유가 있다”며 “병충해에 강해 튼튼히 자라는 은행나무는 정치판에서 더럽혀지지 말고 부정부패에 물들지 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설명했다.

평지에 지어진 전주향교는 전형적인 전묘후학의 구조를 띠고 있다. 공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대성전이 전면에 배치되고 그 뒤에 강학공간인 명륜당이 자리하고 있다. 김 해설사는 “명륜당은 본래 대성전보다 크게 지어서는 안 된다”며 “하지만 학생의 수가 늘고 수용 공간이 협소해지자 양옆으로 눈썹지붕을 올려 최대한 예를 갖춘 독특한 건물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 전주향교 명륜당의 문살. 세월의 흐름이 느껴진다.

전주 향교가 21세기인 지금에 와서도 의미를 지니는 것은 비단 유구한 역사성 때문만은 아니다. 문화재로 보존되어 박제된 공간이 아니라 지금도 꾸준히 교육의 공간으로 살아있는 것이 전주 향교의 특징이자 자랑거리다. 전북 도내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일반인을 대상으로 예절학교를 운영 중에 있으며 전통문화학교를 개설해 사자소학, 명심보감, 음양오행 등을 가르치고 있다.

소박한 전통한옥부터 위엄 갖춘 동헌까지 한눈에, 전주전통문화연수원
‘전주전통문화연수원’이라는 제목에서 약간의 거부감을 느낄 수 있으나 이곳은 단순한 연수원이 아니다. 각지에 흩어져 있던 한옥이 모여 있어 일종의 한옥 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다. 입장료 없이 누구나 관람할 수 있으니 꼭 들러보도록 하자. 각각의 한옥들이 각자 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어 뒷이야기를 알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 장현식 선생 고택은 1930년대 전통방식으로 건축한 한옥이다.

우선 이곳에 자리한 한옥 중에 가장 웅장한 규모로 서 있는 건물은 전주 동헌이다. 전주 동헌은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위용을 뽐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전주 동헌은 지금으로 치자면 전주시청 역할을 했던 공간이다. 그러나 일제가 조선말살정책을 펴면서 1934년 민간에 매각되기에 이른다. 당시 동헌을 구입한 전주 유씨는 이를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로 옮겨 문중의 제각으로 사용했다. 이후 송하진 전주시장이 동헌의 상징성과 역사성을 되살리기 위해 소유주인 유인수 선생을 설득한 끝에 제각 건물이 전주시 한옥마을로 옮겨지게 된다. 동헌이 전주를 떠난 지 75년 만의 일이다.

▲ 장현식 선생 고택 앞에 놓인 돌학의 크기만 봐도 얼마나 많은 손님이 그의 집을 드나들었는지 알 수 있다.

▲ 전주 동헌은 75년 만에야 자신의 원래 위치를 찾아 돌아왔다.

▲ 남쪽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ㅁ자 한옥인 정읍 고택.

▲ 전주 동헌의 보수 흔적. 부식된 부분을 파내고 새로 나무를 깎아 넣었다.
독립운동가 장현식 선생의 고택이 전주에 자리 잡은 사연도 애틋하다. 원래 이 한옥은 장현식 선생이 1932년 고향인 김제 금구면 서도마을에 건축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곳은 독립투사들이 시도때도없이 드나들던, 독립투사들의 사랑방이자 베이스캠프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후손들이 개인적으로 한옥을 재정비하기는 힘들어졌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전주시가 이 고택을 들여오기에 이르렀다. 장현식 선생 고택은 1930년대 전통방식으로 건축한 한옥으로, 미닫이문으로도 활용할 수 있게 고안된 안채의 퇴창문은 보는 재미뿐만 아니라 한옥 대목수의 지혜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임실 진참봉 고택은 임실군 임실읍 성가리에 소재한 진참봉댁 고택 사랑채를 옮겨 온 것이다. 안채는 용인 민속촌 조성 시 매각되어 이축 되었는데, 이 사랑채는 김봉순 씨가 매수하여 생활해 오던 중 임실군 도시계획에 의한 도로개설사업 당시 철거 예정이던 건축물을 전주시가 온전하게 인수하여 장현식 고택 옆에 이축했다.

정읍 고택은 보천교를 창시한 월곡 차경석(1880~1936)이 정읍 대흥리에 세운 50여 채의 보천교 본당 부속 건물 중 하나다. 1936년 보천교가 해체된 뒤, 정읍지역의 유지가 사들여 정읍시 장명동으로 옮긴 것을 1988년 박성기씨가 내장산으로 다시 옮겨 사용했다. 그러나 자연공원법 제정으로 국립공원 내에 위치한 고택의 유지 보수가 어렵게 돼 점차 폐가로 쇠락해 갔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소유자가 2010년 전주시에 기증했다. ㅁ자 건물의 정읍 고택은 보온 효과를 높이기 위한 북부지방 한옥 양식으로, 중부지방 이남에서는 보기 드문 건축물이다.

시리도록 맑은 전주천은 전설을 담고 흐르네, 한벽당
전주전통문화원을 한 바퀴 둘러본 후 길은 완판본문화관으로 이어진다. 완판본이라 함은 전라도의 수도였던 전주(완산)에서 발간된 옛 책과 그 판본을 말한다. 완판본문화관은 기록문화의 중요성과 과거 왕성했던 전주의 출판문화를 알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이곳에서는 출간된 완판본을 만나볼 수 있으며 목판인쇄체험과 제본체험을 즐길 수도 있다.

▲ 한옥마을 골목길은 근대와 현대가 교묘히 섞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완판본문화관을 나서면 전주천 변으로 향한다. 전주천은 자연하천 조성사업이 시작되기 전에는 심각한 오염으로 악취를 풍기는 전형적인 도심 내 하천이었다. 하지만 1998년부터 2002년까지 110억 원의 공사비를 들여 생태계 복원 사업을 진행해 현재는 1급수에 가까운 수질이 됐다. 쉬리·갈겨니·돌고기·모래무지 등 11종의 물고기 외에 다슬기, 반딧불이 유충 등이 서식하는 것으로 확인됐으며 수달이 발견되기도 했다. 날이 따뜻해지면 천변에서 탁족을 즐기는 시민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 완판본문화관에서는 출간된 완판본을 만나볼 수 있으며 목판인쇄체험과 제본체험을 즐길 수도 있다.

▲ 멀리서 바라본 한벽당.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모습이다.

전주천을 따라 걷다 보면 한벽당을 만나게 된다. 승암산 기슭 절벽을 깎아 세운 이 누각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최담이 태종 4년(1404년)에 별장으로 세운 건물이다. 누각 아래로 흐르는 맑은 물이 바위에 부딛혀 흰 옥처럼 흩어지고 얼음처럼 차갑다 하여 한벽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 때는 한벽당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전주 8경에 속할 정도였다 하지만 현재는 콘크리트 다리와 도로가 눈앞에 보여 그만한 감동은 없다. 그러나 멀리서 바라보는 절벽 위에 선 한벽당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인다.

한벽당 아래는 오래된 전설이 하나 있다. 김 해설사는 “이 아래 강물에 괴물이 살아 매년 단오가 되면 처녀를 바쳐야만 했는데 효심 깊은 처녀가 아버지를 위해 제물이 되기로 나섰다”며 “제물을 바치기 전날 사또 꿈에 성황대황이 나타나 강물에 소금을 부으라고 지시했고 다음날 꿈에서 들은 대로 했더니 거대한 지네가 둥둥 떠올랐다고 전해진다”고 설명했다.

▲ 한벽당을 내려와 걷는 전주천 변은 갈대와 억새가 지천이다.

한옥마을 둘레길은 한벽당 이후 바람 쐬는 길로 이어진다. 전주천변을 따라 이어지는 이 길은 따로 지어진 이름이 아니라 정식 행정지명이다. 이 길에도 이야기들이 숨어 있는데 며느리들이 고된 시집살이를 하다 잠깐 바람 쐬러 다니던 길이라는 것. 한옥마을 떠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즐길 수 있는 전주천의 갈대밭을 거닐면 한옥마을 둘레길은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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