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 경치가 첫째이고 관동에서도 강릉이 제일”
“관동 경치가 첫째이고 관동에서도 강릉이 제일”
  • 글ㆍ박성용 기자 | 사진ㆍ이소원 기자
  • 승인 2011.04.29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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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푸마와 함께하는 KOREA TRAVEL 강릉

▲ 온누리를 붉게 물들이는 정동진 해돋이. 사진 이소원 기자

강릉은 그리움이다. 가끔 ‘강릉’하고 중얼거리면 가슴 한곳에 묻어둔 추억이 어느새 기지개를 켠다. 추억은 바쁜 일상 틈바구니에서 그리움을 몰고 온다. 문득 바다가 보고 싶을 때, 큰 바람을 맞고 싶을 때 사람들은 먼저 동해안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러다 발동이 걸려 그 자리에서 훌쩍 떠나도 부담 없는 곳.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한 해변에서 사람들은 수평선을 바라보며 들떴던 마음을 달랜다. 누구나 한번쯤 부려봤을 젊은 객기나 이른 새벽부터 북적거리는 이방인들의 발걸음을 강릉은 말없이 받아준다.  

강릉은 싱싱한 아가미다. 주문진해변, 영진해변, 하평해변, 사천진해변, 사천해변, 순포해변, 순긋해변, 사근진해변, 경포해변, 강문해변, 송정해변, 안목해변, 남항진해변, 염전해변, 안인해변, 정동진해변, 금진해변, 옥계해변…. 강릉 북쪽의 주문진해변부터 남쪽 옥계해변까지 64.5㎞에 달하는 해안에는 갓 잡아 올린 물고기의 아가미 같은 해변이 펼쳐져 있다. 매일 아가미를 붉게 물들이는 태양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끊임없이 유혹한다.

▲ 강릉 바다는 그리움을 몰고 온다. 가끔 ‘강릉’하고 중얼거리면 가슴 한곳에 묻어둔 추억이 어느새 기지개를 켠다.

바다가 강릉 동쪽 옆구리를 적시는 동안 서쪽 옆구리에는 산줄기가 지나간다. 노인봉ㆍ소황병산ㆍ곤신봉ㆍ능경봉ㆍ고루포기산ㆍ화랑봉ㆍ석두봉ㆍ두리봉ㆍ석병산ㆍ자병산 등 병풍처럼 둘러쳐진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산들이 장엄한 백두대간 마루금을 긋고 있다. 높고 험한 백두대간은 내처 달리다가도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향해 슬며시 허리를 낮춰 주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진고개ㆍ대관령ㆍ닭목재ㆍ삽당령 등 숱한 애환이 서린 고갯길들이 생겼다.

현대식 도로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이 고갯길들은 바깥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 역할을 해왔다. 포장도로가 뚫리면서 그 옛날 우리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눈물을 훔쳐가며 오르던 고갯길 사연들은 전설로 내려올 뿐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서 사는 게 예전에 비해 풍족해지자 쳐다보기도 싫어 도리질을 쳤던 그 높은 고갯길에  웰빙이니 걷기니 하는 열풍을 타면서 다시 사람들이 모여드니 고갯길 팔자가 몇 십 년 만에 바뀐 셈이다.

▲ 북쪽의 주문진해변부터 남쪽 옥계해변까지 64.5㎞에 달하는 강릉 해안에는 20개에 달하는 아름다운 해변이 펼쳐져 있다.


강릉의 자부심은 ‘제일’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시청사 입구에 ‘第一江陵(제일강릉)’이라고 새긴 표석을 세워둔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빼어난 자연풍광을 자랑하기 위해서는 아닐 듯. 강릉의 이 같은 ‘제일’주의 정신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격조 높은 강릉의 문(文)과 예(藝)의 풍속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조선시대 학자와 시문(詩文)으로 명성이 높았던 신사임당ㆍ이이ㆍ허균ㆍ허난설헌 등 이들 모자와 남매는 문향(文鄕) 강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신사임당과 이이는 우리나라의 화폐 인물로 들어가 있어 모자가 나란히 한 나라의 화폐에 등장하는 일도 드물 것이다. 또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쓴 허균과 여류 시인 허난설헌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꼽힌다.

▲ 해돋이 명소 정동진역. 해마다 정월 초하룻날은 새해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특히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섬세한 필치와 감성으로 노래한 허난설헌의 시들은 지금도 격찬을 받고 있다. 스물일곱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했던 허난설헌이 남긴 마지막 시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어 읽을 때마다 마음이 저려온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강릉 향교는 이 지역 예속(禮俗)의 중심이다. 강릉 향교에는 우리나라와 중국 유학자 위패가 대성전에 21위를 비롯해 동무ㆍ서무에 각각 58위ㆍ57위 총 136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곳을 방문한 유교의 본고장 중국인들도 놀란다고 한다. 지금도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 춘추석존대제(春秋釋尊大祭)를 지내며 예향 강릉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강릉 향교의 정신은 오늘날 이 지역을 이름난 교육 도시로 이끌어온 원동력인 셈이다.

▲ 사랑은 흔적을 남기는 법. 해변 벤치에 빼곡한 낙서에는 애틋한 사연이나 가슴 뜨거운 사랑을 담고 있다.
강릉에는 향교 외에도 사(祠)ㆍ당(堂)ㆍ재(齋)ㆍ각(閣)ㆍ비(碑)ㆍ문(門) 등이 많다. 35개의 효열각과 비, 12개의 사, 3개의 당, 55개의 재가 한 고을에 있다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매년 음력 5월 5일 열리는 강릉 단오제는 이 지역 축제 중 가장 으뜸을 차지한다. 대관령 국사성황당에서 서낭신을 모셔오는 것으로 시작하는 단오제 기간은 강릉 전체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다. 당연히 단오제는 강릉 지역민들이 공동으로 치르는 축제로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   

강릉단오제는 음악, 춤, 민속극, 구비서사시 등 우리 전통 예술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지는 축제로 전통 샤머니즘 공연의 정수를 간직하고 있다. 이런 점들이 높이 평가되어 지난 2005년 11월 25일 유네스코 세계인류 구전 및 무형문화유산걸작에 등록되었다. 

이렇게 제사와 예절을 중시하는 고장답게 강릉은 우리나라 최초의 경로잔치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동국여지승람>에 ‘강릉 풍속에 노인을 공경하는 것이 있는데 좋은 날을 가려 명승지에 노인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며 위로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 해돋이 명소 정동진역. 해마다 정월 초하룻날은 새해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이렇듯 강릉이 내건 캐치프레이즈 ‘제일’에는 수려한 자연과 완고한 문화가 빚어낸 뼈대 깊은 자긍심이 담겨 있는 것이다. 경포대에 걸린 ‘제일강산(第一江山)’ 현액이나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한 조선 초기 학자 서거정이 “전국 팔도 중 관동의 경치가 첫째이고, 관동에서도 강릉이 제일이다”는 말을 상기해 볼 때 오늘날 청사 입구에 세워진 ‘제일강릉’은 요란한 수사의 한 대목으로 넘길 일은 아닐 것이다. 

온기란 온기는 죄다 빼앗아 가는 대관령 큰바람. 대관령 옛길을 오르는 동안 뼛속을 파고드는 한기는 지난 추억이 뿜어내는 또 다른 열정임을 느낀다. 강릉 출신의 젊은 시인 김선우가 노래한 ‘대관령 옛길’을 떠올리며 광포한 바람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 ‘제일강산’이라고 적힌 경포대 현액. 수려한 자연과 완고한 문화가 빚어낸 강릉의 자긍심이 함축되어 있다.

폭설주의보 내린 정초에
대관령 옛길을 오른다
기억의 단층들이 피워올리는
각양각색의 얼음꽃

소나무 가지에서 꽃숭어리 뭉텅 베어
입 속에 털어넣는다, 火酒-

싸아하게 김이 오르고
허파꽈리 익어가는지 숨 멎는다 천천히
뜨거워지는 목구멍 위장 쓸개
십이지장에 고여 있던 눈물이 울컹 올라온다
지독히 뜨거워진다는 건
빙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
붉게 언 산수유 열매 하나
발등에 툭, 떨어진다

때로 환장할 무언가 그리워져
정말 사랑했는지 의심스러워질 적이면
빙화의 대관령 옛길, 아무도
오르려 하지 않는 나의 길을 걷는다

겨울 자작나무 뜨거운 줄기에
맨 처음인 것처럼 가만 입술을 대고
속삭인다, 너도 갈 거니?
-김선우 시 ‘대관령 옛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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