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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여행] 한국 미감의 뿌리
[나주여행] 한국 미감의 뿌리
  • 박신영 기자 | 양계탁 사진기자
  • 승인 2020.10.20 14: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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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문화재 제115호 염색장 정관채 인터뷰

황금빛 벼가 익어가는 나주평야 위로 푸른색 천이 보인다. 하늘을 닮은 옥색과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감청색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상쾌하다. 이리저리 휘날리는 천 사이로 푸른 물이 든 손톱이 모습을 드러냈다. 1959년 태어날 때부터 나주를 지켜온 국가무형문화재 제115호 염색장 정관채 선생이 전수교육관에서 쪽빛을 재현하는 중이다.

“나주시 다시면은 비단처럼 고운 무명천을 임금에게 진상하던 고장입니다. 문익점 선생이 경남 산청군에서 목화를 시배했지만 생산은 영산강 하구에서 시작했어요. 영산강 하구가 굽이져 홍수가 심했지만 그만큼 부엽토가 많이 떨어져 땅이 기름져요. 목화를 재배하기 좋은 환경이죠. 쪽도 많이 심었죠. 쪽은 홍수에도 살아남았거든요. 좋은 목화와 쪽 덕분에 다시면에서 염색 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어요.”

무명 제작과 쪽 염색을 생업으로 하던 마을은 일제시대와 6.25 전쟁을 겪으며 합성섬유와 화학염료 시대를 맞는다. 쉬운 제작, 저렴한 가격, 대량생산이 가능한 현대 기술 때문에 쪽 염색은 자취를 감췄다.

“우리 집안은 나주 다시면에서 4대째 살고 있어요. 선조들도 전부 쪽 염색을 했고요. 하지만 기술의 발달과 제작의 어려움으로 쪽 염색이 사라졌죠. 그러다 제가 미대를 다니면서 가장 한국적인 색이 뭘까 고민을 하게 됐어요. 아무래도 나고 자란 곳이 염색 마을이다 보니 자연스레 쪽 염색을 시작했죠. 집안사람들이 전부 말렸지만 나는 뚝심 있게 밀어붙였어요. ‘누가 뭐라고 해도 쪽 염색은 내가 할 일이다. 내가 하지 않으면 조선의 색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을 판이다’라고 소명감을 가졌습니다.”

푸른 천을 만들기까지 꼬박 1년이다. 이른 봄, 쪽씨를 파종한 후 5월에 쪽밭으로 옮겨심는다. 중간중간 잡초를 제거하고 소독을 하면 어느새 삼복더위가 찾아온다. 초복과 말복 사이, 쪽 잎을 담근 장독대의 물이 옥빛으로 물들면 조개껍데기를 넣고 30분간 힘차게 젓는다. 30도를 웃도는 날씨에 등허리는 땀으로 범벅이지만 쉬지 않고 쪽물을 섞으면 드디어 물감의 원료가 탄생한다.

“물감을 만들면 무명을 장독대에 담갔다가 햇볕에 말리는 작업을 반복합니다. 반복과 기다림의 시간이지요. 땡볕에서 아무리 힘들게 휘저어도 추출되는 원료는 고작 2%뿐이고 품이 어마어마하게 드는데 누가 염색을 생업으로 하겠어요? 들어가는 재룟값이며 노동력이며 상당하니까 자연스레 가격은 올라가는데, 누가 비싼 돈을 주고 사겠습니까. 화학염료로 만든 옷감이 쪽 염색 천보다 수백 배 싼걸요. 돈벌이도 안 되고 할 필요성도 못 느끼는 것이죠.”

그러나 그에게 쪽은 천년의 빛깔이었다. 전공을 살려 중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생업을 이어 나가면서 방학에는 쪽 염색에 매진했다. 경제적인 걱정이 사라지자 여유로운 마음으로 염색에 집중할 수 있었다. 염색장의 즐겁고 행복한 마음은 훌륭한 작품을 만드는 법. 그가 43년 동안 쪽 염색을 할 수 있던 건 식구들을 먹여 살릴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미술 교사로 활동하면서 기본적인 생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어요. 주변에서 도움도 많이 줬고요. 2001년 42세 때 정부에서 나를 최연소로 국가무형문화재 제115호로 지정해줬죠. 당시 대서특필되면서 기업 CF 모델이며 인터뷰가 줄지었어요. 덕분에 전국에 쪽 염색을 알릴 수 있었죠. 매해 전수관에서 75명의 후계자도 배출하게 됐고요. 덕분에 조선의 색이 지금껏 유지될 수 있었던 겁니다.”

오직 자연 물질에만 물이 드는 쪽. 봉선화 물과 김칫국물 처럼 바로 물이 들지 않고 복잡한 과정을 겪어야 물이 드는 쪽. 조선의 기와 민족성이 담긴 쪽. 정 선생은 한국 쪽 염색의 세계화를 꿈꾼다.

“리바이스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만든 청바지가 1억5천만원에 낙찰됐어요. 이 바지의 원료가 뭔지 알아요? 바로 쪽이에요. 화학염료가 대중화되기 전엔 청바지를 전부 쪽으로 만들었답니다. 청바지는 가장 보편적인 바지죠. 그중에서도 으뜸인 천연 쪽으로 만든 청바지를 만들어 세계화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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