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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고즈넉한 옛 정취따라4대궁 및 종묘 걷기 PART I
  • 이슬기 기자 | 사진 양계탁 기자
  • 승인 2016.01.24 09:58
  • 호수 128
  • 댓글 0

유난스레 바쁘고도 빠르게 돌아가는 도시, 서울. 수많은 이의 종종걸음이 쉴 새 없이 교차하는 이 회색 도시의 한가운데, 이곳의 것이 아닌 듯 또 다른 세계가 자리한다. 빼곡한 빌딩숲 사이 촘촘한 소음을 뒤로하고 들어선 고궁 안. 대문 안으로 느릿느릿 들어서자 어느새 귓가를 어지럽히던 모든 소리들이 가라앉는다. 또 한 걸음. 담장 너머 보이는 높은 건물이 외려 낯선 풍경이 되는 순간,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그 시절 옛 조선에 와있었다.

   
▲ 정동전망대에 오르면 덕수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서울의 중심에서 도시 탈출을 외치다

연말연시 분위기에 흠뻑 젖은 한 달이었다. 크리스마스 파티부터 주말마다 이어진 송년회, 새해 첫 해맞이와 10만 인파가 몰려들었다는 보신각 타종 행사까지 빠질 수 없었다. 덕분에 1월이 채 가기도 전에 벌써부터 2016년의 배터리가 방전된 기분. 어느 곳을 찾아도 북적이는 이 도시를 벗어나 여유를 느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멀지는 않으면서 고요하고 한적한 곳을 궁리하다 서울의 중심, 4대궁과 종묘를 찾았다.
사실 눈 내리는 고궁의 풍경이 그렇게 기가 막히다 해서 며칠 동안 눈 오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어째 이번 겨울, 눈 소식이 박하다. 지독한 엘니뇨 때문이라는데, 푹한 날씨가 계속 되는 건 좋지만 눈이 없는 겨울은 조금 아쉽다. 별수 없이 눈송이가 흩날리는 고궁을 거니는 것은 포기. 대신에 고궁 투어를 더욱 즐겁게 해 줄 동반자, 본사 뉴스팀 선배 이주희 기자와 함께하기로 했다. 좋은 사람과 함께라면 어디라도 훌륭한 여행지가 될지니.

   
▲ 커다란 나무가 드리운 고궁.

연일 포근한 날씨가 이어지다 우리가 간택한 나들이 날이 되자 기온이 영하 10도 가까이 뚝 떨어진단다. 가는 날이 장날이다. “그래도 그만큼 사람들이 더 적어서 좋을지도 몰라.” 긍정으로 똘똘 뭉친 선배와 함께 길을 나섰다. 먼저 교통이 편리해 접근성이 좋은 덕수궁을 시작으로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그리고 종묘의 순서로 돌아보기로 했다. 5대궁으로 꼽히는 경희궁은 동선에서 동떨어져 있어 과감히 생략했다.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1·2호선 시청역 12번 출구에서 나와 덕수궁 입구 왼편 샛길로 들어서면 서울특별시청 서소문청사로 갈 수 있는데, 이곳 13층에 자리한 것이 바로 정동전망대다. 커다란 창 너머로 덕수궁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이곳은 2013년 만들어져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덕수궁을 벌써 몇 번째 찾았다는 선배 기자도 정동전망대는 처음이라고 했다. 위에서 내려다본 궁궐의 경관은 역시 멋스러웠지만 조금은 썰렁해 다시 한 번 눈이 아쉬워졌다. 이곳에서는 커피와 함께 느긋함을 즐길 수 있는 카페도 마련돼 있다. 우리는 갈 길이 멀기에 간단히 오늘 돌아볼 코스만 짚고 일어서기로 했다. 그때 덕수궁 너머 주황색 지붕의 독특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우와 저긴 어디야?” “성공회 성당이래요. 예쁘죠?” “덕수궁 둘러보고 나서 저기도 들러보자.”

   
▲ 궁 입구를 지키고 있는 문지기들은 마네킹처럼 꿈쩍도 않고 서 있다.

서소문청사에서 나오자 양옆으로 덕수궁 돌담길이 길게 이어진다. 고궁을 둘러싼 담벼락에서 옛 정취와 낭만이 물씬 풍겨온다.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덕수궁 돌담길!” “근데 여기가 왜 유명해?” “덕수궁 돌담길을 연인이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이 있어요.” “아 정말? 그럼 난 결혼한 다음에 올게.”
덕수궁 매표소에서 통합관람권을 구매해 입구인 대한문 안으로 들어섰다. 통합관람권은 창덕궁 후원을 포함한 4대궁 및 종묘를 모두 돌아볼 수 있는 관람권으로 개별 구매하는 것보다 약 4000원 정도 저렴하다. 4대궁, 종묘의 매표소 중 어느 곳에서나 살 수 있고, 3개월 내 각 1회에 한해 방문할 수 있게 돼 있어 당일에 모두 돌아봐야 한다는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어 좋다.
중화문을 지나니 덕수궁의 중심인 중화전이 나온다. 4대 궁궐 중에서 실제로 가장 작은 규모인 덕수궁은 사실 본디 왕이 살던 궁전이 아니다. 임진왜란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지자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저택을 선조의 임시 거처로 사용한 것이 오늘날에 이르게 됐다. 중화전 뒤로 보이는 석어당 앞에 살구나무가 드리워졌다.

   
▲ 덕수궁 내부를 둘러보았다.

고종이 연회를 즐겼다는 정관헌에서는 아직도 판소리, 북춤 등 공연이 펼쳐진다고 했다. “청산~이 벽계수야~” 옛사람들의 풍류에 질세라 부족한 노래 솜씨나마 뽐내고 있는데 어디선가 기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온다. 운 좋게도 마침 수문장 교대시간이라 교대식을 구경할 수 있었다. 덕수궁 내 근대식 석조 건물인 석조전에서는 대한제국 역사관 무료 관람도 가능하다.

서울의 중심, 조선 건국의 상징 속으로
덕수궁에서 나와 성공회 서울성당으로 향했다. 이곳은 한국 전통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조화시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35호로도 지정됐다. “유럽에 와 있는 것 같아, 이국적이야.” 대예배실로 들어가자 유리알을 하나하나 박아 만든 모자이크 그림이 눈부시다. 들릴 듯 말 듯 나지막한 성가가 들려오고 커다란 파이프오르간이 압도하는 성당의 대예배실은 신자가 아닌 사람도 경건하고 차분한 마음을 갖게 한다. 잠시 앉아 숨과 마음을 고르고 다시 발길을 옮겼다.

   
▲ 경건한 마음이 일게 하는 성공회 성당 대예배실.

우려와는 다르게 하늘은 쾌청하고 상쾌하다. 걷기에 더할 나위 없는 날씨에 기분이 좋아졌다. 성당에서 나와 광화문까지는 약 15분. 청계광장 교차로와 이순신 동상 옆을 지났다. 광화문 광장에는 노란 리본이 가득히 나부끼고, 주한미국대사관 앞에는 경찰이 빼곡히 늘어서 있다. 세종대왕 동상 뒤편으로 광화문이 보인다. 바로 직전에 들른 덕수궁을 떠올리니 더욱 크고 위엄 있게 다가오는 풍채다.
입구로 들어서자 왼편에 국립고궁박물관이 보인다. 궁궐 담장을 지나 직진하면 근정전 일원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곳이 바로 조선 왕실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라 할 수 있겠다. 근정전의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에 경외감이 들기까지 했다. 정전 앞에 품계가 적힌 표지석들이 늘어서 있다. 정1품부터 종9품까지. 1m 앞, 몇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그들은 평생을 바쳤겠지. 어쩐지 비장함이 느껴졌다.

   
▲ 광화문은 많은 방문객으로 사시사철 북적인다.

   
▲ 왕이 일상생활을 하는 침전이었던 경복궁 강녕전 앞에서.

“이, 얼, 싼!” 중국인 관광객들의 사진 찍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소풍이라도 온 것 마냥 노란 깃발을 따라 줄지어 걷는 무리로 북적이는 경복궁은 한갓지던 덕수궁과는 새삼 다른 분위기다. 그뿐 아니라 수수하고 소박한 모습의 중화전에 비해 근정전의 단청은 형형색색 호화로운 장식을 자랑한다. 멀리 북쪽으로는 북악산이, 왼편으로 인왕산이 거대한 병풍처럼 펼쳐진 모습이 또한 장관이다.
경복궁은 일제강점기 상당 부분 훼손돼 본디 규모의 4분의 1밖에 남지 않았지만 지금도 그 규모와 아름다움에 금세 반하게 된다. 화려한 기와와 단청, 가지를 늘어뜨린 낙락장송이 어우러져 눈이 즐겁다. 일상 업무를 보던 사정전과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는 강녕전, 교태전을 지나 경회루에 다다랐다. 경회루는 하루에 세 차례 특별 개방을 시행하고 있으니 사전 예약으로 옛 시절 임금이 된 듯한 기분을 느껴보는 것도 즐겁겠다.

   
▲ 국립민속박물관 근처에는 십이지신상과 장승이 자리하고 있다.

향원정을 돌아 나오다 국립민속박물관 앞에서 십이간지 상을 만났다. 선배가 원숭이상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올해 잘 부탁해.” 기자도 한마디 거들었다. “아홉수, 삼재 끝났으니 이제 좋은 일만 있게 해줄 거지?” 원숭이상에게 직접 인사도 건넸겠다, 두고 보자, 병신년.

이슬기 기자 | 사진 양계탁 기자  seulki@outdoo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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