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땅을 수놓은 3000km의 물줄기
절망의 땅을 수놓은 3000km의 물줄기
  • 글 사진·박하선 기자
  • 승인 2011.12.30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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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투르판’

▲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는 화염산 전경.

실크로드를 따라 서쪽으로 발길을 재촉하다 보면 중국의 서쪽 변방인 신지앙 위구르 자치구에 접어들게 된다. 이곳은 황량한 사막지대에 위구르족이라는 소수민족의 세계가 펼쳐지는 곳이다. 이들은 생김새가 중국의 한족과는 판이하게 다를뿐만 아니라 언어와 문화조차 달라 도저히 중국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곳이다.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중동 어디쯤에 와 있는 듯한 인상을 씻을 수가 없었다.

위구르족들의 세계 중 첫발을 내딛게 된 곳은 역사의 고장 투르판(吐魯蕃)이다. 실크로드 천산북로와 남로의 갈림길에 위치한 투르판은 기원전부터 상인들이 물과 휴식을 얻기 위해 발길을 멈추던 곳이다. 또 구도의 길에 나선 수많은 입축승(入竺僧)들도 이곳을 거쳐 갔다.

▲ 고대시대에 만들어진 지하수로 카레스. 투르판인들의 생명과도 같다.
이처럼 예로부터 중요한 거점으로 인식되어 온 투르판은 흐르는 세월 속에서 다양한 민족들의 치열한 쟁탈전이 불가피했던 곳으로 오늘날 도처에 흩어져 있는 유적들이 당시의 영화를 짐작케 한다. 대표적인 것이 교하고성(交河古城)과 고창고성(高昌古城)이다.

시내에서 서쪽으로 약 13km 떨어져 있는 교하고성은 이름 그대로 두 물줄기 사이 30m 높이의 우뚝 솟은 절벽 위에 터전을 잡은 고대 도시다. 이곳은 실크로드를 오가는데 있어서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으로, 기원 전 2세기 전한시대(前漢時代)에 이란계의 차사전국(車師前國)이 자리 잡기 시작하여 14세기 말 번영의 빛이 소멸되기까지 흉노(匈奴), 한(漢), 당(唐) 등의 지배를 거쳐 온 역사의 현장이다.

오늘날 교하고성은 고요하기만 하다. 성문에 들어서니 벽돌길이 남북으로 뚫려있는 가운데 수많은 폐허들이 양옆으로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그 길이 끝나는 북쪽에는 주로 사원이나 광장, 저택 등 제법 규모가 있는 것들이 자리하고 있고, 남쪽에는 서민들의 주거 흔적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당시 땅속 깊이 파놓은 우물들이 지금도 몇 개 남아 있는데 어찌나 깊은지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또 다른 고대 도시 고창고성은 시내에서 좀 더 멀리 떨어져 있다. 당나라 때 전성기를 누렸던 이곳은 기기괴괴한 모습의 화염산을 배경으로 길이가 5km나 되는 웅대한 성벽을 지니고 있는데, 499년 한나라 사람 국문태(麴文泰)가 이곳에 고창국 세웠을 때 도성으로 쌓은 것이다. 교하고성이 흙 자체를 조각한 조각건축인 반면 고창고성은 흙벽돌을 쌓아 조성했기 때문에 파손이 심해 궁전이나 사원 같은 큰 건물의 잔해만 남아있을 뿐 거의 공터다.

고창고성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남긴 당나라의 고승 현장(玄裝)과도 인연이 깊다. 천축국으로 향하던 현장은 당시 막하연적(莫賀延蹟)이라 불리던 고비사막을 건너는 과정에서 온갖 고충을 겪다가 고창국에 도달하게 됐는데, 이때 열렬한 불교 신자였던 고창왕 국문태의 간청에 못 이겨 이곳에서 한달 동안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을 설법하게 되었다.

▲ 높은 절벽 위에 자리 잡은 교하고성의 흔적.

이후 현장이 떠나는 것을 아쉬워한 국왕이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러 3년간 공양을 받아 줄 것을 간절히 요청하자 받아들였다고 한다. 천축국을 두루 둘러보는 동안 십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고창왕과의 약속을 중히 여긴 현장은 빠르고 안락한 바닷길을 버리고 힘든 육로를 다시 거슬러 올라온다. 하지만 고창국은 이미 당에게 멸망되고 국왕 국문태도 죽고 말았다는 소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월은 항상 모든 것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하지만 황량한 모래벌판과 고창국의 폐허를 굽어보고 있는 화염산만은 옛모습 그대로다. 소설 <서유기>에 ‘불꽃이 날기를 천장의 높이’라고 표현한 화염산. 마귀가 금방 나타날 것만 같은 기괴한 분위기가 가득한 산을 끼고 돌면 또 하나의 전설이 살아 숨 쉬는 천불동을 만난다. 수난의 역사를 간직한 베제크리크 천불동은 오늘날 초라한 모습으로 지난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 흙벽돌의 문양이 아름다운 쑤꽁타 사원의 첨탑.
위구르어로 ‘아름답게 장식된 집’이라는 뜻을 지닌 베제크리크는 수나라 시대인 6세기 말부터 14세기 사이에 조성된 불교사원인데 지금은 57개의 모든 굴이 텅 비어있는 상태다. 그도 그럴 것이 두 번의 큰 수난을 겪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14세기에 이슬람교를 신봉하게 된 위구르족들에 의해 또 다른 한번은 금세기 초 독일, 일본, 러시아, 영국 등의 탐험대에 의한 벽화 반출 경쟁에 의해서였다. 그래서 오늘날 베제크리크에 남아있는 것이라곤 39굴의 ‘각국사절도’뿐이다.

가는 곳마다 고고학적 가치가 높은 유물이나 유적들이 많은 투르판 일대를 ‘역사의 보고’라고 한다. 이곳에 많은 유적들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게 된 이유는 일년 평균 강우량이 16mm밖에 안 되는 건조한 날씨 덕분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메마른 땅에서 어떻게 이런 찬란한 문화가 꽃을 피울 수 있었으며, 이곳 투르판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것일까? 그것은 투르판의 비밀이자 사막의 생명수라고 할 수 있는 ‘카레스’ 때문이다.

뭐니뭐니 해도 사막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물이다. 그래서 물이 있는 곳에 오아시스가 생겨나고, 물이 말라 멸망한 왕국도 있고, 물을 잘 지배해 강성한 제국을 만든 나라도 있었다. 이곳 투르판 역시 천산산맥의 눈 녹은 물이 있었기에 오늘날까지 사막의 보석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천산의 물이 이들에게 생명을 주진 않았었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천산이기에 지상으로 흘러오는 물이 아무리 많은 양이라고 해도 대부분이 증발해 버려 온통 사막인 이곳을 적시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이곳 위구르족 선인들은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며 400~500년 간 지하 수로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용되고 있는 카레스다.

▲ 카레스 덕분에 투르판에서는 청포도가 특산물이다.

천산 기슭에서 시작해 수많은 우물을 지하로 연결하고 오아시스까지 끌어들인 카레스의 물줄기. 총 길이가 장장 3000km나 된다. 이 엄청난 길이를 모두 손으로 파서 만들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사막 한 쪽에서는 새로운 카레스가 만들어지고 보수되는 중이다. 투르판인들은 아침에 일어나 천산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하고 카레스에서 물을 긷는 것으로 하루를 보낸다.

카레스 덕분에 투르판에는 온갖 과일이 풍성하다. 그래서 ‘과일의 도시’라고도 부른다. 그 중에서 특히 포도는 투르판의 특산물로 여름철에는 이 일대가 온통 포도 넝쿨로 뒤덮인다. 수확기가 되면 집집마다 건조장에 포도 말리는 것이 일이다. 한집을 살펴보니 온 가족이 사다리를 오르내리면서 포도송이들을 막대 기둥에 걸고 있었다. 가족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건조장에 걸어 놓은 포도들은 20일 정도면 건포도가 된다”면서 포도 한 바구니를 선뜻 여행자에게 건넨다. 달콤한 청포도 맛에 취하고 후한 인심에 또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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