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와 전설 따라 걷는 길
신화와 전설 따라 걷는 길
  • 진우석 기자
  • 승인 2011.04.06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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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 길 | ⑭ 고창 고인돌 질마재 100리길 :고인돌 선운사 갯벌 등 아우르는 4개 코스 43.7km

전북 고창은 풍요로운 들판과 바다를 품은 고장이다. 천혜의 자연환경 속에서 판소리의 신재효와 진채선, 시인 미당 서정주 등 출중한 예인들이 화려한 문화를 일구었다. 이처럼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고창에 100리가 넘는 걷기 코스인 ‘고인돌 질마재 100리길’이 생겼다. 총 4개의 코스는 우열을 가리기 어렵지만, 그래도 가장 관심이 가는 곳이 4코스 보은길이다. 4코스는 선운사를 중심으로 하는데, 그 길이 심원 바닷가 쪽으로 연결된 것이 특이하다. 이 길은 선운사로 가는 옛길이고, 선운사 탄생 설화를 간직한 곳이다.

▲ 천마봉에서 바라본 내원궁과 도솔암 일대. 선운산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풍광이다
선운사 탄생 설화를 간직한 보은길
보은길 덕분에 묵은 숙제를 풀었다. 예전 선운사 일대의 지형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인천강을 따라 바닷물이 선운사 앞까지 흘러와 선운사 앞쪽은 길이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선운산 일대는 삼면이 물로 둘러싸인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였다. 그렇다면 예전에 선운사로 드나들던 길은 어디였을까? 그곳이 참당암 뒤편 참당고개를 통해 바닷가 마을인 심원과 연결된 길이다. 이 길이 보은길이고, 여기에 선운사 창건 설화가 서려 있다.

선운사 창건 설화는 도솔암 마애불에서 이야기를 푸는 것이 순서다. 15m 높이의 마애불은 1500년쯤 전에 살았던 검단선사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전한다. 검단선사는 선운사를 창건한 스님이다. 그가 선운사를 창건할 당시 선운산은 도적떼의 소굴이었다. 검단선사는 도적들에게 소금 굽는 법을 가르쳐 생계수단으로 삼도록 했다. 양민이 된 그들은 고마운 마음을 담아 해마다 봄 가을 두 차례 검단선사에게 보은염(報恩鹽)을 보냈는데 그때 소금을 운반했던 길이 바로 보은길이다.

보은길은 예전 소금밭에서 시작한다. 그곳이 심원 사등마을로 바닷가에 검단소금전시장이 있다. 마을 이름인 사등(沙登)은 ‘바닷모래가 쌓여 등성이를 이룬다’는 뜻이다. 이곳은 자염(煮鹽)으로 유명하다. 자염이란 남해안이나 서해안의 갯벌 흙에서 바닷물을 걸러 가마솥에 넣고 졸여 만든 우리나라 전통 소금을 가리킨다. 예전에 소금을 만들던 모습이 바닷가 시멘트 둑에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전시관 건물 옆에는 소금 굽는 벌막을 복원해 놓았다. 여름철이면 화염 만드는 법을 재현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유리로 만든 전시관 전망대에 오르면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심원 갯벌 너머로 부안 변산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다.

소금전시장을 출발해 논길을 따르면 ‘진채선 생가터’ 안내판이 보인다. 그곳을 따라가면 휑한 집터에 나무의자 몇 개만 놓여 있다. 진채선(1842~?)은 우리나라 최초의 판소리 여류 명창이다. 판소리 이론을 정립한 신재효 선생에게 판소리를 배우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됐고, 고종 때 경회루 낙성연(落成宴)에 출중한 기예를 발휘해 대원군의 눈에 든다. 채선의 빼어난 솜씨에 깜짝 놀란 대원군은 채선을 애첩으로 삼고 총애했다.

낙성연을 마치고 채선은 고창으로 돌아가려 했겠지만, 대원군은 놓아주지 않았다. 이제나저제나 채선이 돌아오기만 기다리던 신재효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리고 4년 뒤 대원군이 실각하자, 채선은 고향으로 돌아와 신재효를 찾아간다. 다시 만난 채선과 신재효는 다시 사랑을 나누었다고도 하고, 이미 채선이 왕가와 연분을 맺은 터라 손 한 번 잡지 못하고 헤어졌다고도 전한다. 1884년 신재효가 세상을 뜬 뒤 채선은 꼬박 3년상을 치른 뒤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고 했다.

▲ 소리재를 넘어 만나는 천마봉(오른쪽)의 그윽한 풍경
연천마을서 참당고개 넘어 선운사로
진채선이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바닷가에서 소리 연습을 하는 모습을 떠올려 본다. 동편제의 우렁찬 소리가 마을은 물론 갯벌을 쩌렁쩌렁 울렸을 듯하다. 다시 길을 나서면 22번 지방도를 건너 화산마을 방향으로 들어선다. 지금부터는 병풍처럼 둘러쳐진 선운산 줄기를 바라보며 걷는다. 그곳 어느 지점에서 고개를 넘어 선운사로 들어갈지 궁금하다.

화산마을 입구에는 느티나무를 비롯한 고목들이 즐비하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져버린 마을 숲이 잘 보존되어 있다. 여기서 작은 고개를 넘으면 연천마을이다. 인적 없는 아담한 옛집 뒤에 산길 입구가 나 있다. 그 앞에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서 있다. 잠시 나무 아래 주저앉았다. ‘호랑이 장가가는 날’처럼 해가 나면서 눈발이 날린다. 잠시 바람이 잠잠하니 눈앞에 눈송이 분분하며 성기는 기는 것이 봄눈 같기도, 벚꽃 같기도, 옛사랑 같기도 하다.

다시 몰아친 바람에 쫓기듯 엉덩이를 털고 본격적인 산길로 접어든다. 뽀득! 사람들의 발자국은 어제 내린 눈이 말끔하게 덮었다. 500m쯤 올라오자 ‘개이빨산’이란 팻말이 보인다. 그곳으로 접어들자 산길은 비탈을 타고 돌면서 구렁이 담 넘듯 은근슬쩍 참당고개에 올라선다. 험악해 보이는 선운산 줄기에 이렇듯 쉬운 길이 있을 줄 몰랐다.

기분 좋게 고갯마루를 내려오면 차밭이 보이기 시작한다. 참당암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대웅전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는데, 갑자기 파인더에 시커먼 물체가 잡힌다. 깜짝 놀라서 바라보니 검은 개다. 참당암에서 키우는 은적이다. 반갑다는 듯 종아리를 툭 치고 지나간다. 산사에 인적이 뜸했던 모양이다. “은적아 잘 있어~ 꼭 성불하길 바란다!” 참당암 앞 소리재 갈림길에서 인사를 건네자, 은적이는 후다닥 달려와 길을 앞서 간다. 그렇게 은적이와 동행이 되었다.

▲ 서해 일몰이 좋은 낙조대는 드라마 대장금에서 최상궁이 뛰어내린 장소로 유명하다
소리재 산길은 아주 부드러웠다. 소리재를 지나 다시 작은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드디어 조망이 열린다. 두루뭉술한 암봉들이 즐비한 천마봉 일대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앞서 가는 은적이를 따라 부지런히 발품을 팔자 바위봉들이 우뚝한 낙조대다. 이곳은 TV 드라마 <대장금>에서 최상궁이 자살한 바위로 유명하다. 낙조대란 이름처럼 멀리 서해가 아스라하다.

낙조대에서 천마봉은 지척이다. 천마봉에서 내려다본 마애불과 도솔암, 그리고 도솔계곡의 설경은 선운산의 제1일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대한 마애불이 장난감처럼 작고 귀엽게 보이고, 그 머리 위에는 내원궁이란 작은 암자가 자리 잡고 있다. 내원궁은 도솔천의 천상세계를 상징하고 마애불은 미륵하생의 지상낙원을 의미한다.

▲ 검단선사의 모습이라고 전하는 도솔암 마애불
하산은 도솔암으로 직접 내려서는 길을 따른다. 나무 계단을 내려서는 길에서 은적이는 낑낑거리고 뒷걸음을 친다. “고마워~ 잘 가.” 아쉽지만 은적이와 작별을 청한다. 미끄러운 계단을 엉금엉금 내려오니 도솔암 마애불 앞이다.

마애불을 유심히 보면 유독 배꼽이 크다. 그곳에는 검단선사가 봉해놓은 신비스러운 비결이 하나 숨겨졌는데, 그것이 세상에 출현하는 날에는 한양이 망한다는 흥미로운 전설이 내려온다.

또한 그 비결과 함께 벼락살을 동봉해 놓았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비결을 꺼내려고 손을 대면 벼락을 맞아 죽는다고 했다. 실제로 전라감사 이서구가 그것을 꺼내다가 벼락이 쳐 도로 봉해 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 후 세상 사람들은 마애불의 전설을 철석같이 믿게 되었다. 하지만 비결은 1893년 가을 동학접주 손화중에 의해 꺼내지고, 다음 해에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이 전라도를 휩쓸게 된다. 비결의 개봉이 세상을 개벽하려는 농민들의 의식을 깨우는데 일조했던 것이다.

내원궁과 도솔암을 구경하고 내려오면 진흥왕이 말년에 왕위를 버리고 수행했다는 진흥굴과 600년쯤 묵은 소나무 장사송(長沙松. 천연기념물 제354호)을 만난다. 이제부터는 평지처럼 완만한 숲길이다.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걷기 좋은 길은 선운사까지 이어진다. 눈이 소복이 덮인 선운사 경내는 고요하고, 대웅전 뒤편 동백나무는 깊이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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