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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도 잠시 쉬어가는 곳
구름도 잠시 쉬어가는 곳
  • 글 사진 김동규(경희대 산악부 OB)
  • 승인 2016.08.30 15: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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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남알프스 단독 종주 ⑤와루자와다케~아카이시다케~우사기다케~가미코치다케

정상에 오르면 다시 내려가야 한다. 와루자와다케에서 내려가는 길은 야생 사슴으로부터 고산 식물을 보호하기 위해 울타리가 쳐 있었다. 길은 울타리 문을 열고 지난 후 다시 반대편 문을 열고 통과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 때마다 다시 잠금장치를 해서 문이 안 열리도록 조치를 해야 했다.

▲ 남알프스의 아름다운 풍경.

아카이시로 향하는 길에 만난 돌들은 붉은빛이 감돌았고, 그 위에 핀 꽃들도 유난히 빨간 빛을 띠었다. 가이드북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면 이렇다. ‘적색의 돌은 남알프스 대부분을 점하는 향사 지층(syncline)이 침하할 때 지하의 마그마 화산 활동에 의해 분출한 화산재 등이 해수로 냉각되어 생긴 회록응회암 또는 미생물의 시체가 퇴적하여 생긴 적색의 흑규석이다.’ 너무 전문적인 지식이라 어렵지만 화산 활동으로 생겼다는 것만 기억하기로 했다. 그런데 돌들의 색깔이 정확히는 빨강이 아니라 연분홍이다. 그래서 한 때 산 이름의 유래가 아카시(明石)의 모래처럼 바위가 하얗게 반짝인다는 뜻으로 풀이되기도 했었으나, 요즘은 산 남측에 적갈색의 암석이 붕괴하여 흐르고 있는 아카이시자와(赤石?) 계곡 때문으로 이해되고 있다.

긴 여정에 더뎌지는 발걸음
아카이시다케(赤石岳, 3,120m)는 시즈오카~하타나기(畑?) 댐을 거쳐 사오라지마에서 7시간이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고도차가 1,997m로 일본 백명산 중 격차가 가장 크다. 아카이시다케에 오르니 비로소 히지리다케(聖岳, 3,013m)가 보였다. 그러나 그 너머의 데카리다케(光岳, 2,591m)는 어떤 봉우리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다시 급한 경사를 내려가 모처럼 평온한 길이 펼쳐졌다. 지도를 보니 햐켄다이라(百間平)라고 쓰여 있었다. 전망 좋은 평원에는 빨간빛이 어여쁜 시오가마 꽃이 짙은 초록의 눈잣나무 사이에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한없이 걷고 싶은 길은 금방 끝나고 햐켄보라노이에(百間洞ノ家) 산장에 도착했다. 이제 작은 토끼봉 고우사기다케(小兎岳, 2,799m)와 토끼봉 우사기다케(兎岳, 2,818m), 즉 토끼 두 마리만 잡으면 오늘의 긴 여정은 끝이 난다. 그런데 이게 웬일. 토끼 이전에도 봉우리가 두 개나 있어서 금세 지쳐 버렸다. 게다가 작은 토끼도 만만치 않았다.

▲ 햐칸타이라 평원.

고우사기다케에서 내려가는 길, 나홀로 종주자인 나이 지긋한 여성 트레커와 마주쳤다. 그녀는 자기 몸보다 큰 배낭을 메고 있었는데 내가 인사를 하지 않았으면 번잡한 도심에서처럼 가볍게 지나칠 기세였다. 묻는 말에 대답도 간단했다. 당당한 걸음걸이이지만 다소 늦은 시간 탓에 야영지 도착 시간을 걱정하고 있을지 몰랐다. 그러자 그녀의 간단한 대답 속에서 지긋한 나이에, 여성 혼자서 한적한 산을 종주하는 부담감과 완주에 대한 각오 그리고 완주한 후의 성취감 등의 감정이 충분히 유추됐다.

갈 길을 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힘이 넘쳤는데 내 발걸음은 힘이 없었다. 우사기다케를 오를 때는 등 높이까지 내려온 태양이 오를 길을 똑바로 비췄다. 등은 따스하고 길은 눈부셨다. 정상에 도착하자 해는 사라졌지만 그 빛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내리막길을 걸을 땐 다행히도 어스름한 빛이 길을 안내했다. 대피소에 도착해 문을 두드리자 드디어 햇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아침 5시 40분에 나카다케 대피소에서 출발하여 와루자와다케를 왕복하고 이곳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6시, 잘못했으면 랜턴을 켜고 야간산행을 할 뻔 했다.

▲ 히지리다케에서 본 후지산.

문을 열어 준 사람은 이외로 미야다 씨였다. 그의 실력으로는 더 갈 수 있었겠지만 한 푼이라도 절약하기 위해 무인 대피소인 이곳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벽 쪽으로 또 한 사람이 잠결에 인사를 하고 다시 잠을 청했다. 그 사이에 자리를 잡고 취사도구를 꺼내자 마에다 씨도 버너에 불을 붙여 차를 데웠다. 그는 차를 마시며 벽에 걸린 이동식 화장실 이용법을 알려주더니 어느새 잠이 들어버렸다. 밤새 문틈으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으나 그런대로 숙면한 밤이었다.

성급히 다가오는 후지산
후지산이 어느덧 커져 있었다. 그래서 히지리다케(聖岳, 3,013m) 정상에서 바라 본 후지산은 더욱 늠름했다. 나처럼 후지산을 바라보고 있던 노자카(野坂, 61세) 씨를 만났다. 처음부터 이름을 알게 된 건 아니었다. 나는 대뜸 그에게 데카리다케를 물었다. 지도상으로 추측하면 방향은 짐작하겠는데 뾰족 솟은 산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가리킨 방향에는 정상부가 펑퍼짐한 덩치 큰 산이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산 이름을 ‘히카리’를 뜻하는 광(光)이라고 쓰고 크다는 어감이 들어간 ‘데카리’로 읽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원이 불분명한 ‘데카리(てかり)’를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어쨌든 나는 도착했다. 최종 목적지 데카리다케를 눈으로 본 것이다. 보이지 않을 때는 자신이 없지만 눈에 보이면 생각이 달라진다.

▲ 히지리다케에서 바라본 데카리다케.

“쯔이타! 쯔이타!”
‘쯔이타(ついた)’는 ‘달라붙다’라는 표현으로, ‘도착했다’라는 표현이 함축하지 못하는 그 무엇이 있다. 환호하는 나의 모습에 노자카 씨도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노자카 씨는 도쿄에서 예약 버스를 타고 오이강(大井川)을 거슬러 히지리 등산로를 따라 히지리 산장에서 1박하고 히지리다케를 피스톤하는 중이었다. ‘피스톤’이란 말은 한 산행 기점에서 정상을 왕복한다는 뜻이다. 바다에서 바다까지 종주하는 미야다 씨가 자주 표현하는 말이어서 나도 따라 하게 되었다.

정상을 내려와 히지리 산장에서 노자카 씨는 커피를 한 잔하고 나는 점심을 먹었다. 저녁 7시면 잠을 청해야 하니 남알프스에서의 시간은 한국보다 3시간 이상의 시차가 생겨 버렸다. 그런데 왜 이름이 성스럽다는 뜻의 ‘히지리’일까? 그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깊은 산속에 높이 솟은 산이라 함부로 접근하기 어려우니 그렇게 불린 것은 아닐까요? 접근이 어려울수록 신비감이 있으니까요.”

일리 있는 이야기라고 수긍하며 나는 후카다규야(深田)의 ‘일본백명산’ 책을 펼쳐 주었다. 산 이름은 실재적인 지형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멋있는 문학적 이름은 드물다. 히지리다케도 예외가 아니다. 와루이자와의 산허리를 트래버스(일본어로 헤즈루 へずる )해야 해서 헤즈리 계곡으로 불린다. 이것이 히지리로 변하여 그 어원이 되었다는 설과, 계곡 물이 ‘히지리’ 소리를 내며 흘러가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히지리다케의 이런 어원은 잊어버리자. 그래서 처음부터 히지리다케(聖岳)라는 아름다운 기품 있는 이름이었던 것으로 알자. 결국 노자카 씨의 답변은 후카다 선생의 의견과 일치하게 되었다.

▲ 가이드 산행중인 일본 등산객들. 한 걸음 한걸음 앞선 가이드에 맞춰 발걸음을 내딛었다.
나의 발걸음보다 빠른 노자카 씨가 먼저 가미코치다케(上河內岳, 2,803m)에 올라 나에게 올라오라고 손짓했다. 길은 가미코치다케 봉우리를 비켜 트래버스 하는 고개여서 배낭을 벗어 놓고 가미고치다케에 올랐다.

북알프스의 등산 거점 가미고치(上高地)를 생각했다. 가미코치다케(上河內岳)는 북알프스의 가미고치(上高地)와 똑같이 신(가미, 神)이 내려온다는 뜻이다. 다만 표기를 위해 차용한 한자음이 다를 뿐이다. 신이 내려오기 위해서는 봉우리가 펑퍼짐해야 한다. 아주 높지 않으면서도 무엇보다 주변의 봉우리를 사방으로 조망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북알프스의 가미고치도 산 밑에 있는 마을이지만 주변 봉우리들이 모두 올려다 보인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과연 가미고치다케의 정상은 사방 봉우리들이 다 보여서 이들 방향을 표시해 주는 원형 동판이 있었다. 이런 훌륭한 산이 백명산에 포함되지 못한 것이 억울하게 느껴졌다. 아마 백명산의 저자 후카다 선생도 상당히 고민했을 것이다. 노자카 씨와 나는 신이 강림한 봉우리에서 통성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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