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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보내고 봄을 만나다…군산 근대거리
시간을 보내고 봄을 만나다…군산 근대거리
  • 이지혜 기자 | 양계탁 기자
  • 승인 2016.03.20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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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MMUT PERFORMANCE ①TREKKING

유난히 춥지 않았다는 이번 겨울도 나에겐 여느 때보다 추웠다. 평소보다 더 혹독한 겨울을 보냈다. 드디어 3월 호를 위해 떠나야 할 때다. 봄이 필요했다. 봄을 느끼고 싶었다. 남쪽으로 가야겠다. 언젠가는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군산으로 떠났다. 남아있는 겨울을 배낭에 집어넣고.

오라 할 땐 안 오더니몸이 돌덩어리가 된 것처럼 찌뿌드드하니, 고양이마냥 늘어져 종일 햇살을 받고 싶은 마음이다. 남쪽은 조금이나마 따뜻하겠지. 이번 기회에 한국 근대화를 몸소 느낄 수 있다던 군산으로 떠나기로 했다. 일주일 가까이 영상 10도를 웃돌던 기온이, 떠나려니 다시 영하로 떨어진다. 전날 밤 이불 속에서 확인한 그곳의 날씨는 ‘대설주의보’였다. 참나. 오라는 봄은 안 오고, 가는 곳엔 눈이 온다니. 내게 봄이 오려면 아직 멀었나 보다.

그래도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어차피 전국의 반을 뒤덮은 눈구름. 가고 싶던 근대화 거리에서 보고 싶던 건물들을 봐야겠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눈이 휘날리는 서해안고속도로를 뚫고 충청도를 지나니, 눈구름은 나를 스쳐 서울로 올랐는지, 그곳엔 이미 눈이 덮여있었다.

선배, 근데 왜 군산이에요?

오랜만에 뭉친 온라인팀 막내 이슬기 기자가 해맑게 물어온다. 글쎄. 내가 배우던 교과서엔 근대화 시절이 열 페이지 남짓이었다. 못 배운 한일까. 아니면 이제 곧 교과서를 통해 다르게 알려질 근대화의 흔적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였을까. 단순히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도시의 동경이었을까. 어찌 됐든 떠나봐야 안다.

추억이 곳곳에 있다
경암동 철길마을이 첫 코스다. 학교 앞 문방구가 그대로 옮겨져 있는 노란 집을 지나 철길이 늘어진 마을 가운데를 걸었다. 그 시절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젊은이들이 옛날 교복을 곱게 입고 또 다른 추억을 만들고 있었다. 한때 바퀴가 굴려갔던 철길엔 저마다의 글귀가 채워졌다. 누가 누굴 사랑하고 누가 누구와 함께했던 이야기들이 늘어져 있다. 막내는 자기와 이름이 같은 여자를 사랑한 누군가의 흔적을 발견했다.

선배, 여기 제 이름이 있어요! 이슬기 사랑해.

바다였던 곳이 일제강점기에 매립된 경암동은 방직공장이 세워진 후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들며 마을이 됐다. 1944년 놓인 이 철길엔 기차가 마을 가운데를 10km 속도로 통과했단다. 가난했던 서민들의 삶이 이어졌던 곳. 언제부턴가 기차는 다니지 않았고 반대편엔 아파트가 세워졌다. 판잣집이 카페와 교복을 대여하는 상점들로 변했지만, 뿌뿌 경적이 울리면 다급히 말린 고추와 집 나간 바둑이를 거둬들이던 그들의 삶이 눈앞에 겹쳤다.

철길 가운데 문방구엔 갓 성인이 된 아이들로 시끄러웠다. 까치발을 들고 들여다보니 뽑기에 한창이다. 문득 잊고 살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난 어릴 적부터 뽑기 운이 없었다. 뽑기에 바친 용돈이면 떡볶이로 끼니를 때웠을 거다. 가장 잘 뽑은 거라 해봤자 손바닥만 한 잉어 엿이 전부였던 어느 날, 그 누구도 뽑은 적 없고 상품 리스트에도 없던 커다란 핑크색 야구방망이를 뽑았다.

잉어 엿이 아닌 것에 흥분한 나는 그 길로 텅텅 빈 플라스틱 야구방망이를 짊어지고 의기양양하게 귀가했다. 흑역사의 시작이었다. 이후 10여 년 그리고 동생의 어린 시절까지, 자매 인생 도합 20여 년 간 내가 뽑은 야구방망이는 사랑의 매가 됐다. 이사 가던 날 우리 자매는 야구방망이를 몰래 갖다 버리기까지 했지만, 엄마가 귀신같이 찾아왔다.

시간 여행길시간 여행은 이제 시작이다.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에서 본격적인 근대화 길이 시작된다. 전국 공립 5대 박물관 중 하나인 이곳은 1층 해양물류역사관과 어린이체험관, 2층 특별전시관과 근대규장각실, 3층 근대생활관과 기획전시실 등 알차게 채워져 있다. 군산근대역사벨트 스탬프 투어의 시작지점이기도 하다.

과거 무역항으로 해상물류유통의 중심지였던 옛 군산의 모습과 다양한 근대문화자원을 볼 수 있는데 그 중 백미는 3층 근대생활관이다. 근대 학교와 집은 물론 술집과 쌀집, 고무신 가게, 인력거 가게 등 다양한 상점이 늘어진 거리를 직접 걸으며 체험할 수 있다. 어린 시절 아침드라마에서나 보던 옛날 거리에 떨어진 것 같다.

박물관을 나와 오른쪽에 홀로 있는 군산세관. 구 군산세관 본관은 1908년 대한제국의 자금으로 건립됐다. 서양식 단층 건물로 준공 당시 많은 부속 건물이 있었지만, 현재는 모두 헐리고 본관 건물만 남았다. 서울역사, 한국은행 건물과 함께 국내에 현존하는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 하나다.

고딕양식으로 꾸며진 지붕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접목된 창문, 영국의 건축 양식으로 표현한 현관의 처마까지. 전체적으로 유럽의 건축양식을 융합한 근세 일본 건축의 특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다시 박물관을 지나 걷다 보면 곧 미즈상사와 장미갤러리가 나타난다. 일제강점기 시절 무역회사로 사용되던 건물로 당시 일본인이 운영한 미즈상사는 식료품과 잡화를 수입해 판매하던 회사였다. 해방 이후 검역소로 사용하다 이전과 보수복원을 거듭하며 북카페로 활용되고 있다. 장미갤러리는 일제강점기 시절의 용도나 기능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현재 체험학습과 예술전시공간으로 활용 중이다.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미즈상사와 장미갤러리 옆엔 근대미술관이 있다. 구 일본 18은행 군산지점으로 이용됐다. 18은행은 일본 나가사키에 본사를 두고 있던 은행으로 18은 은행 설립인가 순서를 의미한다. 현재는 미술관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뒤편 금고 통에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사용했던 금고가 있다. 금고의 옆 벽면에는 ‘이 금고가 채워지기까지 우리 민족은 헐벗고 굶주려야만 했다’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수탈의 아픈 역사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미술관의 별관 건물인 안중근기념관도 잊지 말고 들러야 할 곳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거라.
아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어머니가 있었다니.

한동안 어머니의 편지 앞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먹먹한 감정을 느끼고 가겠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단채 신채호 선생의 글귀와 함께 체포된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전시해놓았다. 해방 후, 유언대로 춤추며 만세를 부르셨겠죠. 그런데, 지금도 괜찮으신가요? 부끄러워지는 마음을 뒤로하고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잊지 않겠다고.

아름다운 정원과 건물근대미술관에서 길을 건너 500여m 내려가면 또 다른 명소가 있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 초원사진관이다. 표지판이 잘 되어 있어 찾기 쉽다. 배우 심은하가 타던 주차 단속 차량이 그대로 있다. 사진관 안에서 기념촬영도 가능하다. 곳곳에 영화 스냅 컷과 대사들이 걸려있으니, 명화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 시절로 함께 빠져보자.

초원사진관을 나와 다시 300여m 내려가다 보면 신흥동 일본식 가옥을 만난다. 구 히로스가옥으로 유명한 이곳은 일제강점기 시절 포목점과 농장을 운영하며 부협의회 회원을 지낸 일본인 지주의 생활상을 생생히 볼 수 있는 곳이다. 2층짜리 이 건물엔 다다미방, 금고, 온돌방, 응접실, 관리실 등 부유한 생활이 그대로 담겨있다. 영화 <장군의 아들>과 <타짜>의 촬영지가 되기도 했던 곳인 만큼 아름다운 정원과 건물이 잘 보존돼있다.

이곳 너무 예쁘네요.
그러게. 그런데 이 집 문을 나가면 줄지어 있던 우리 민족의 집은 어땠을까?
이곳 같지 않았겠죠? 참 아름다우면서도 슬프니, 기분이 이상하네요.

아픈 과거 하나가 이곳에서 사라지지도 않고 자리하고 있다.

여기 있네, 봄
그들에게 세월은 격정적이었을 거고 느렸을 거다. 결국, 그 시간은 갔고 지금이다. 과거 속으로 마음껏 뛰어들었던 시간. 대설주의보를 내렸던 구름은 흔적 없이 사라졌고 푸른 하늘에 밀려났다. 문득 봄 냄새를 맡고 싶었다. 동백꽃이 피었다는 바닷가로 향했다. 서천 마량리에 자리한 동백나무숲엔 어느새 동백꽃이 피었다 지고 있었다. 누군가에겐 느렸고, 누군가에겐 이미 지나간 봄. 시간 참 야속하다.

동백나무 군락지엔 거센 풍파에 굵고 낮은 줄기의 어른 나무들이 성실히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엔 겨울을 이겨낸 기특한 아기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철길 앞의 강아지를 불러들이던 서민, 히로스가옥 옆집의 고된 소작농, 아들을 감옥에 보내며 수의를 짓던 어머니, 그리고 지금 우리가 있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도 없다. 펜이 바꿀 것이 역사라면, 바꾸지 못할 것은 과거다. 과거에 풍덩 빠지고 온 곳에서 봄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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