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드락 걷는 길 위에서의 만남…제천 자드락길 6코스
자드락 걷는 길 위에서의 만남…제천 자드락길 6코스
  • 이지혜 기자 | 사진 양계탁 기자
  • 승인 2015.06.09 16: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Travel with MAMMUT ②TREKKING

이번 호, 갈 곳은 제천이라고 했다. “청풍호가 있는 거기요?” 촌스러운 내 질문에 그렇다고 했다. 호수를 품은 도시의 길은 ‘자드락’이었다. 자드락 이라니 이 얼마나 예쁜 이름인가! 출발하기도 전에 가슴이 뛰었다.

자드락길 6코스의 명칭은 ‘괴곡성벽길’이다. 괴곡성벽길은 옥순봉 쉼터에서 시작해 괴곡리와 다불리를 지나 지곡리 고수골에 이르는 길이다. 과거 성벽을 이루었던 곳이라 ‘괴곡성벽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왕복 10Km에 달하는 짧지 않은 코스. 능선을 오르내리는 탓에 청풍호 자드락길 가운데에서도 난이도 ‘상’에 속한다고 한다. 하지만 멋진 조망과 다양한 식물이 하모니를 이루고 있어 코스의 재미 역시 ‘상’이라는 얘기가 있다. 따뜻한 햇볕이 좋은 5월의 어느 날, 등산화 끈을 메는 손끝이 설렌다.

옥순대교서 바라본 청풍호의 예고편
괴곡성벽길로 출발하기 위해서는 옥순대교를 건너기 전 휴게소에 주차하고 다리를 걸어서 건너는 방법과 옥순대교를 자동차로 건넌 뒤 괴곡성벽길 입구 비포장 주차장에 주차하는 방법이 있다. 옥순대교를 가로지르고 싶었던 기자는 옥순대교를 건너 휴게소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트레킹을 시작했다.

선택은 탁월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옥순대교는 마치 우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길을 내어주었다. 고요한 옥순대교를 건너며 장쾌한 청풍호를 바라보았다. 청풍호에 띄운 유람선에서는 유쾌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같은 시공간에서 다른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옥순대교를 빠져나와 이어진 도로를 따라 5분쯤 걸으면 서쪽으로 언덕길이 보인다. 이곳을 따라 본격적인 성벽길이 시작된다. 성벽길의 중간지점인 다불암까지는 화장실이나 샘이 따로 없어서 옥순봉 쉼터에서 충분히 준비하고 출발하는 것이 좋다.

▲ 옥순대교를 건너며 자드락길 6코스 ‘괴곡성벽길’이 시작된다.

성벽길의 초입에 접어들자 곧 하늘이 뵈지 않는 무성한 수림과 만난다. 좁다란 숲길 옆으로 부처손이 심심찮게 보이고, 그 옆으로 벌개미취, 꿩의다리 등이 앙증맞은 얼굴을 내밀고 있다. ‘성벽길에서 산삼을 캔 심마니가 적지 않다’는 소문이 있을 만큼 자연훼손이 거의 없는 산길이다. 서서히 장단이 빨라지던 오르막이 다시 느긋한 오솔길로 바뀌더니 동쪽으로 청풍호가 언뜻언뜻 비친다.

좁은 길을 일렬로 오르다 한 중년 부부를 만났다. 지도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던 부부는 기자를 보자 “유람선을 타고 원점회귀 할 수 있느냐” 묻는다. 사전 조사 때 유람선이 운항 중단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기자로서는 아는 정보를 성심성의껏 부부에게 전달했다. 부부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일행의 뒤로 멀어졌다.

▲ 완만한 능선과 함께 다양한 식물군이 입구서부터 반겨준다.

나지막한 산기슭에 이어진 비탈진 길

자드락길은 ‘나지막한 산기슭에 이어진 비탈진 길’을 뜻한다. 편편한 길을 따라 20분쯤 걸으니 너른 공터가 나타났다. 쉼터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오르막을 오른다. 이따금 보이는 옻나무를 피해 조심히 걸었다. 멧돼지가 진흙목욕을 했는지 드문드문 움푹 파여 엉망이 된 자국이 보인다. 그 길을 비켜 올라갔다.

짙은 노을빛의 나라꽃이 반기는 두 번째 공터, 전망대다. 조망장소이자 쉼터로써 활용되는 공간으로 역시 깨끗이 다듬어진 모습이다. 사방이 트인 전망대에는 솟대가 아기자기하게 올라와 있다. 발밑으로 펼쳐진 능선은 삼국 항쟁기에 청풍강을 사이에 두고 신라와 고구려, 백제의 치열한 격전의 현장이라 한다. 괴곡 능선 자체가 그 시절에는 천혜의 요새였던 셈이다.

▲ 조금만 걷기 시작하면 금세 하늘을 덮는 울창한 숲이 시작된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청풍호는 잔잔한 물길로 유람선을 보내고 있다.

이곳에서 10분쯤 더 걷다가 북쪽으로 꺾어 올랐다. ‘사진찍기 좋은 명소’로 가기 위해서다. 동그란 데크길을 몇 바퀴 휘어 올라 도착하자 홀쭉해진 몸통을 길게 늘어뜨린 청풍호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진 찍기 좋은 명소는 이름대로 아름다운 풍경을 품고 있었다.

청풍호(淸風湖)는 충주댐을 만들면서 생긴 충주호를 이른다. 이 길의 이름이 지어진 유래엔, 청풍면이 차지하는 바가 크다. 지금의 청풍면은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제천과 독립된 하나의 고을이었다. 이곳의 청풍김씨 가문에서는 조선 시대 왕비가 둘, 정승이 여덟, 대제학이 셋이나 나왔다고 한다.

▲ 괴곡성벽길은 과거 성벽을 이루었던 코스라 해 이름 붙여졌다.

그래서 제천 사람들에게 사랑을 독차지하는 이곳 호수에 그 이름을 따온 것. 청풍호 주변에서는 패러글라이딩은 물론 번지점프, 인공암벽 등 다양한 아웃도어 활동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청풍호를 즐기는 최고의 방법은 유람선이다. 옥순봉과 구담봉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물길은 청풍호의 매력을 배가시킨다.

과거 청풍호에는 등교하는 학생과 직장인을 가득 태운 나룻배가 운항 했다고 한다. 청풍에서 제천을 오가는 사람들을 건네주는 북진나루는 아침저녁 출퇴근뿐만 아니라 왕래하는 사람이 많아 항상 붐볐다고 한다.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눈에 들어오는 황석나루에는 교통량이 많아 버스를 건네주는 2.5t의 큰 배가 있었고 사람만 태우는 1t급 도선이 따로 있었을 만큼 인산인해였다고 한다.

▲ 풀 향기 그득한 산길을 걸으며 초여름의 자드락길 가운데로 들어선다.
▲ ‘사진 찍기 좋은 명소’에서는 능선을 품은 청풍호가 한눈에 들어온다.

두 번째 만남, 소중한 길 위의 인연

다시 왔던 길을 돌아 나와 서쪽 내리막길로 향한다. 싱싱한 푸른빛이 도는 황정(둥글레) 밭이 길을 따라 펼쳐진다. 다불암으로 향하는 이 고갯길(다불재길)은 다불리(多佛里)와 연결된다. 다불재에선 조용하고 수수한 산 속 마을의 정서를 느낄 수 있다. 작은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소박한 마을, 이곳 사람들은 다불리를 ‘하늘 아래 첫 동네’ 라고 부른다.

그런데 다불리에 도착하기 전, 조용한 주막과 마주쳤다. 오른편에 탁 트인 능선을 끼고 앉은 주막은 지나가던 시간도 쉬고 갈 것 같은 곳이었다. 주막에 잠시 짐을 풀고 앉았다. 주인장은 물도 전기도 없는 이곳에서 지나가는 여행자들에게 쉴 곳을 제공하고 있었다. 부침개와 동동주를 시켜놓으니 뜻밖의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좀 전에 만난 중년 부부였다.

▲ 솟대가 치솟은 전망대에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아이고, 또 만나네요. 우리가 인연인가 봅니다.”
대구에서 여행을 왔다는 중년의 부부는 다정하게 말을 걸어왔다. 아이를 다 키워놓고, 이제 지방에 여행을 다니며 못다 즐긴 인생을 보내고 있다는 부부는 우리 일행에게 여정의 안부를 물어왔다. 좋은 인생이 등 뒤로 지나갈 때쯤, 평생을 함께할 사람과의 여유 있는 여행, 어찌 좋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선한 주막에 앉아 동동주 한 모금과 바람이 실어 온 약초 냄새를 맡아봤다. 더 이상 앞으로 나가고 싶지 않을 만큼의 평온함이 밀려왔다. 안 된다. 하늘 아래 첫 동네, 다불리를 봐야한다. 신발 끈을 다시 묶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 전망대에 설치된 솟대 뒤로 길의 시작인 옥순대교가 보인다.
옥순대교로의 원점 vs 시무산 자락길
다불재 정점에 자리한 다불암(多佛庵). 다불암은 신라 효공왕 때에 담공선사가 칠불암에 방을 만들었는데 모양이 '亞(아)자와 같아서 아자방(亞字房)이라고 했다. 이곳 구들은 방의 아래와 위를 고르고 따뜻하게 하고, 불을 한 번 지피면 45일간 온기가 계속되게 했다. 국보적 건축물인 ‘아자방 선당’은 동국 선원의 근간이 돼 한국불교의 발상지로서 그동안 수많은 성자를 배출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천연사지는 6.25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 이에 다불암 억석 스님이 가락왕손총람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칠불동상을 다시 복원해 현재 다불암 칠성각에 봉안하게 됐다.

다불암은 괴곡성벽길의 중간지점이다. 옥순대교로 되돌아갈 수 있는 회귀로가 있는데, 차량 이용이 가능한 편안한 길이다. 체력에 따라 더 걷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될 때는 이 길을 이용해 돌아가는 것이 좋다. 반대로 다불암 남쪽의 사무산(478m) 자락을 한 바퀴 도는 길이 있는데, 성벽길의 옵션 격으로 멋진 조망과 다양한 볼거리가 포인트다. 두무산 화필봉에는 장우성 화백의 참선방과 호랑이가 살았다는 전설이 서린 호랑이굴, 하얀 촛농이 흘러내린 듯 독특한 모양새의 촛대바위 등을 차례로 지난다. 이 코스는 무엇보다 일출을 볼 수 있는 전망대의 풍경이 압권이다. 월악산과 소백산이 아름답게 산너울을 펼친 모습이 장관이다. 500m가 채 되지 않는 산에서 바라볼 수 있는 조망이라고 하기엔 믿어지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 주막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부부.

▲ 제천시에서 설치한 ‘사진 찍기 좋은 명소’.

선택해야 할 순간이다. 다불암에서 지곡리 고수골에 이르는 길은 숲 그늘과 탁 트인 능선길이 반복되며 다양한 식물군을 만날 수 있다. 이렇게 한 시간 남짓 걸으면 403봉에 닿고 다시 15분, 임도가 나온다. 50여 분을 더 걸어 고수골에 닿으면 얼마 전까지 원점회귀로 가능한 유람선이 운항되었지만, 현재 중단된 상태다.

옥순대교로의 원점회귀 문제로 다불암에서 동쪽 회귀로를 택했다. 본격적으로 마을을 지나는 구간이다. 여름의 문턱, 살갗을 할퀴는 예민한 수풀과 싸워야 하는 구간도 있지만, 회귀로는 또 다른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아기자기한 마을은 아직도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다. 크고 작은 밭이 길 좌우로 자리를 차지하고서 싱그러운 봄 내음을 풍긴다. 다불리를 두고 ‘하늘 아래 첫 동네’ 라고 부르는 까닭을 알 수 있을 법한 풍광이다.

▲ 다불리 마을은 아직도 소를 사용해 농사를 짓는다.
우연한 만남 그리고 청춘에게 고맙다
다불리 마을 중턱에 들어서자 할머니 한 분이 느리게 걸어온다. 자연스레 인사를 건네자 일행을 가로막고 웃으며 말씀하신다.
“젊은 것 내놓고 지나가소.”

어린 아이 같은 눈망울로 장난을 치는 할머니는 우리에게 ‘젊은 어떤 것을 주면 길을 내어준다’고 말하고 있었다. 시간은 모두에게도 공평하게 지나갔고, 이 여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글자글한 주름살이 뒤덮은 백옥 같던 피부는 세월을 빗겨가지 못했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다.

청춘, 젊은 지금을 꼭 붙잡으라는 말씀. 살아갈 세월이 살아온 세월보다 한없이 적게 남은 누군가에게도, 젊음은 놓치고 싶지 않은 보물이다. 우연히 만난 할머니의 한 마디는 다시금 지금의 삶을 되돌아보게 했다. 길 위에서 만나는 만남은 하나도 빼놓을 것 없는 가르침이 되어 되돌아온다.

산수의 감화력에 온종일 이끌린 시간, 진정한 소통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괴곡성벽길. 방방곡곡이 트레킹 붐으로 들끓는 요즈음, 쏟아지는 수많은 길 가운데 ‘괴곡성벽길’ 위에서는 분명 뜻밖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옥순대교를 보며 다시 한 번 청춘에게 고맙다고 속삭인다.

▲ 다불리 마을의 입구에 500년 된 거대한 느티나무가 세월을 품고 있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