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넘어 ‘백제의 미소’와 만나다
가야산 넘어 ‘백제의 미소’와 만나다
  • 글 사진·진우석 출판팀장
  • 승인 2011.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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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 길 | ⑧ 서산 아라메길

▲ 푸른 하늘 아래 활짝 핀 해바라기가 해미읍성에 늦여름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마애삼존불, 일락사, 해미읍성 둘러보는 20.1㎞

▲ 위 해미읍성의 아픈 역사를 대변하는 300살 넘은 회화나무. 나무는 이곳에서 일어난 천주교인 대학살을 지켜봤다.
서산은 산과 바다, 기름진 들판이 어우러진 땅이다. 수려한 가야산과 가로림만을 품고 있어 내포 지방에서도 풍광이 빼어나다. 천혜의 자연과 마애삼존불로 대표되는 다양한 문화유산을 가진 서산시가 올 6월 아라메길을 내놓으면서 걷기 열풍에 뛰어들었다.


가야산 둘레 10개 지방, 즉 지금의 예산·서산·홍성·당진· 태안·아산 일대를 가리키는 내포 지방 중에서도 이상하게 서산이 좋았다. 토박이들이 ‘스으산’ 하는 어감은 친근했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유홍준 교수가 극찬한 불교유산, 리아스식 해안이 펼쳐진 가로림만, 웅장한 가야산의 품까지 어느 하나 절경 아닌 것이 없었다. 최근에 서산에 아라메길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내심 쾌재를 불렀다. 아라메길은 바다의 고유어인 ‘아라’와 산의 우리말인 ‘메’를 합친 말로 바다와 산이 만나는 서산의 특색을 담고 있다.

운산과 해미를 연결하는 1구간
서산 아라메길 1구간은 유기방 가옥~용현계곡 마애삼존불과 보원사지~일락사~해미읍성으로 이어진다. 지도를 펴놓고 길을 검토하다가, 가야산 석문봉을 넣으면 금상첨화란 생각이 들었다. 일락산 아래 사잇고개에서 1시간쯤 투자하면 석문봉을 다녀올 수 있다. 그래서 가야산을 먼저 오를 심산으로 거꾸로 코스를 잡았다. 해미읍성에서 출발해 가야산을 넘어 지친 몸으로 ‘백제의 미소’ 마애삼존불을 보는 것도 그럴듯해 보였다.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출발한 버스는 2시간도 안 돼 해미정류장에 내려놓는다. 터미널이 아니라 정류장이란 말처럼 가게 하나가 매표소를 겸한다. 정류장에서 시내 방향으로 들어서면 고기비늘처럼 잘 쌓은 해미읍성이 반긴다.

▲ 수려한 계곡이 이어지는 용현계곡.
해미읍성은 세종 때 왜구를 막기 위해 쌓기 시작하여 1491년(성종 22)에 완성됐다. 읍성은 지방 행정관청이 있는 마을에 들어서며, 행정적인 기능과 군사적인 기능을 함께 갖는 형태를 말한다. 현재 남아 있는 읍성 중에서 원형이 비교적 잘 남은 곳이 해미읍성이다.

해미읍성의 정문 격인 진남문으로 들어서니 드넓은 잔디가 시원하고 옛 건물과 나무들이 어울려 평화롭다. 하지만 해미읍성은 조선후기 천주교인들이 집단으로 처형 당한 순교성지다. 1790년대부터 희생된 순교자가 무려 1000명이 넘고, 자리개질, 생매장, 수장 등 온갖 잔인한 처형 방법이 총동원됐다. 동헌으로 가는 길에 300년 넘은 거대한 호야나무(회화나무의 충청도 방언)가 우뚝하다. 당시 이 나무에 철삿줄을 매달아 천주교 신자를 고문했다고 한다. 호야나무는 아무 말이 없고 무심하게 꽃을 피웠다.

동헌 뒤의 야산은 가야산 줄기가 마을까지 내려온 지점이다. 해미읍성은 전부 돌로 쌓은 것이 아니라 이 부분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했다. 야산의 구불구불한 소나무의 곡선미와 분위기가 가히 일품이다. 여기서부터 성벽을 따라 진남문까지 반 바퀴 도는 것이 좋다. 성 안에 심은 해바라기가 피어 가을을 재촉하다.

▲ 팔자 좋은 일락사의 개들. 불교 공부에 피곤한 모양이다. 앞에가 삼순이, 뒤가 뽀순이다.
해미읍성을 나와 일락사로 가는 길은 신작로 수준이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좁은 시멘트길과 황락저수지를 끼고 돌면 일락사가 나온다. 절 마당으로 들어서자 개 한 마리가 컹컹 짖으며 달려오고 “남순아, 짖지 마!.” 소리치며 아주머니 한 분이 따라 나온다.

“개 이름이 남순인가 봐요.”

“네, 영리한 개에유. 모자를 쓴 사람만 보면 짖네유.”

모자를 벗자 남순이는 조용해진다. 건물 서너 채 들어선 아담한 일락사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절 마당 가득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그곳 돌 의자에 앉아 일꾼들이 막걸리를 마시며 쉬고 있다. 나무 그늘에서 한 잔 얻어먹으며 바라보는 절이 아담하고 운치 있다.

“예전에는 수덕사보다 큰 절이었는데, 지금은 수덕사 밑으로 들어가는 절이 됐어유.” 일꾼 아저씨의 말처럼 일락사는 663년(신라 문무왕 3)에 세워졌으니 그 세월이 천 년을 훌쩍 넘었다. 절 마당 앞에서 막걸리를 한잔 하는 풍경이 왠지 정겹다. 대적광전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길을 나선다.

▲ 석문봉에서 펼쳐지는 호쾌한 조망. 멀리 천수만과 안면도가 펼쳐지고, 맨 오른쪽 산이 도비산이다.

일락산과 석문봉의 호쾌한 조망
마당 왼쪽에 아라메길을 알리는 리본이 펄럭거린다. 그 길을 따르면 그윽한 솔숲을 따르면 능선을 만나고, 완만한 길을 20분쯤 밟으니 일락산에 올라붙는다. 정상 비석이 없는 일락산은 정자가 이정표 노릇을 하고 있다. 정자 아래로 좀 내려오면 소나무 사이로 시원하게 조망이 열린다. 일락사가 짙은 숲에 묻혀 있고, 가야산이 끝나면서 펼쳐진 푸른 들녘에 해미읍이 자리 잡았다.

▲ 사이고개에 세워진 아라메길의 상징인 솟대.

일락산에서 내려오면 사잇고개. 여기서 아라메길은 임도를 따라 용현계곡으로 내려서지만, 가야산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석문봉을 놓칠 수 없다. 석문봉은 아래에서 보면 V자 푹 꺼져 보여 이곳 사람들은 ‘이빨빠진봉’이라도 부른다. 가야산 최고봉인 가사봉에 통신탑이 들어서 출입금지된 상태라 정상 역할을 해온 수려한 봉우리다. 묵묵히 완만한 능선을 30분쯤 오르니 석문봉 정상에 올라선다. 석문봉의 조망은 가히 호연지기가 불쑥 솟아날 정도로 호쾌하다. 가사봉과 원효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장쾌하고 천수만과 안면도, 서산시와 가로림만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사잇고개에서 내려서면 용현계곡을 만난다. 임도가 깔린 길이지만 인적이 뜸하고 숲이 좋다. 계곡이 좋은 곳으로 내려가 잠시 탁족을 하며 쉰다. 무주공산에 들어선 느낌이다. 용현자연휴양림으로 들어서자 사람들로 북적인다. 용현계곡은 가야산에서 가장 크고 긴 계곡으로 서산 시민들의 전용 피서지였으나 자연휴양림이 생기면서 전국적 명소로 자리 잡았다.

▲ 사잇고개에서 오르다 본 석문봉 정상. 오른쪽으로 철탑이 솟은 가사봉과 가운데 뾰족한 원효봉이 장쾌하게 펼쳐진다.

휴양림을 벗어나도 수려한 계곡이 이어지고, 식당 거리를 지나 보원사터에 닿는다. 예전에는 이 계곡 일대가 전부 보원사의 영역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절터에 주민들이 젓가락 바위라 부르는 당간지주, 오층석탑, 법인국사보승탑과 비가 덩그러니 남아 있다. 특히 오층석탑은 백제 양식을 계승한 고려전기의 탑으로 2층 기단 위에 5층 탑신을 올린 형태로 조형미가 돋보이는 역작이다. 기단에는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인 팔부중상(八部衆像)의 모습이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 골짜기 안에 99개의 사찰과 암자가 있었는데, 100개를 채우지 말라는 계시를 어기고 100번째로 백암사를 짓는 바람에 모두 망해버렸다고 한다. 욕심을 버려야 하는 것은 스님들에게도 예외는 아닌가 보다.

▲ 보원사터로 피서 온 서산 주민들. 계곡은 외지인에게 넘기고 보원사터 앞 나무 앞에 자리를 잡았다.
보원사터를 지나면 마애삼존불 입구에 닿는다. 마애불은 여기서 다리를 건너 5분쯤 올라가야 한다. 마애불 가는 길이 가파르지만 고요하다. 마애불이 발견된 것이 1959년이다. 이런 험한 산길 위에 숨겨진 덕분이다.

“저기에 뭐가 있대유?”

아이를 업고 계단을 오르는 아낙이 묻는다.

“마애불이 있어요.”

서산 토박이 같은데, 마애불을 모르는 것이 좀 이상하기도 하지만 생업에 바쁜 사람들에게 문화유산은 먼 이야기다. 층암절벽이 나타나고 다시 가파른 계단을 오르자 마애불이 환한 웃음을 짓고 있다. 가운데 본존 여래입상,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은 반가사유상이다. 아이를 업은 아낙도 어느새 다가와 마애불과 눈을 맞추고 있다. 이런! 아까 아낙의 웃는 얼굴이 누군가와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바로 마애불이었다. 아낙은 자신의 미소가 부처님과 닮았다는 걸 알고 있을까?

옛집과 미륵이 지키는 여미리

▲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마애삼존불.
마애불에서 내려오면 유상옥 가옥까지 약 7㎞ 도로를 따르는 고행길이 기다리고 있다. 용현계곡을 나와 고풍저수지를 따르면 고풍터널을 만난다. 103m 길이의 터널을 지나면 쉰질바위 앞이다. 이어 학천을 따르면 운산교를 만나면서 운산 시내로 들어선다. 다시 학천을 따라 20분쯤 더 가면 여미리 마을로 들어서고, 곧 유상묵 가옥을 만난다. 객지에서 고생하다 고향 집에 들어온 기분이다.

“이 집은 1925년 지었다고 알려졌는데, 알고 보니 1896년이에요. 조선 사대부 집은 아니고, 당시 신문물을 접하면서 새롭게 만들었죠. 창이 유리문인 것이 특이하죠. 처음 대원군의 집이 이런 유리문을 썼다고 합니다.”

▲ 유상묵 가옥의 유려한 돌담. 용이 집을 보호하는 형국이다.
자상하게 집 설명을 해주신 유기형 씨는 집 밖에서 돌담을 보여줬다. 그의 말대로 둥그렇게 쌓은 돌담은 마치 용이 집을 호위하는 듯한 멋진 모습이었다. 유상묵 가옥을 나오면 우거진 솔숲에서 여미리미륵이 기품 있게 서 있다. 인사를 올리고 선정묘를 지나면 300살이 넘은 20m 높이의 비자나무를 만난다. 이 나무는 여미리 전주이씨 가문의 이택(1651~1719)이 1675년에 제주도에서 가져와 심었다고 전해진다. 제주와 남부 지방이 아닌 중부 지방에서 이렇게 큰 비자나무가 자라는 것이 참으로 특이하다. 아마도 여미리의 땅 기운이 좋은 듯하다. 비자나무에서 내려와 유기방 가옥을 앞두고 날이 어둑어둑해진다. 솟을대문이 이채로운 고풍스러운 전통가옥에 하룻밤 묵어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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