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요리사 음식 잡설 ㅣ 감자탕
태양의 요리사 음식 잡설 ㅣ 감자탕
  • 글 박찬일 | 사진 미상유 기자
  • 승인 2012.08.23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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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땀처럼 짜고 진한 국물

▲ 우리는 또 얼마나 감자탕집에서 살점도 없는 뼈를 물어뜯으며 고단한 시절을 보냈던가.

40여 년 전, 내가 살던 서울 변두리는 문자 그대로 변두리였다. 작은 슬라브집들이 홍합껍질처럼 붙어 있는 언덕 아래로 2차선 아스팔트 신작로가 겨우 뚫려 있었다. 그 옆으로 서울을 동서로 지루하게 횡단하는 시영버스 종점이 있는 동네였다. 시영버스는 요금이 단돈 10원으로 일반버스에 비해 절반이었다. 크릉거리며 언덕을 오르던 낡은 엔진, 내부 구조는 마치 전철처럼 좌우로 길게 장의자가 놓여 있었다.

이런 동네는 서울시내나 인근에서 일터를 가진 노동자들이 많이 살았다. 그런 까닭에 그들이 술추렴을 하는 실비집들도 많았다. 문자 그대로 실비(實費)집이라고 간판에 붉은색이나 푸른색 페인트로 적어 놓은 그런 집들이었다. 그때 감히 쇠고기야 그런 실비집에서 다룰 수 없었고, 그저 돼지고기면 족했다. 그나마 그런 고기도 쉽게 먹을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자투리 고기나 순대, 돼지머리 등속이 대부분이었다.

▲ 감자탕은 지방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는 몰라도 서울의 변두리, 민중의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감자탕 원조는 서울 응암동 일대
생선이나 해물은 없었을까 싶은데 천만의 말씀이다. 서울 변두리에서 싱싱한 어물은 거의 언감생심이었다. 조개나 홍합, 고등어나 오징어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런 안주 사정에 간혹 감잣국을 파는 곳이 있었다. 내게 그런 간판은 좀 의외여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엄마가 해주던, 감자를 기름에 볶은 후 파 넣고 끓인 그런 ‘국’을 굳이 사먹을 일이 무어 있을까 싶었다.

나중에 그 오해가 풀렸다. 그 시절에는 감자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점잖고 소박하게 감잣국이었던 것이다. 음식 이름도 유행이 있다. 90년대에 외식산업이 팽창하면서 음식은 그 내용뿐만 아니라 이름에서도 자극적이고 더 강렬한 기운을 얻게 된다. 그래서 국 대신 탕이라는 이름이 흔해졌다. 갈비국은 갈비탕, 생태찌개도 생태탕, 오뎅국도 오뎅탕으로 이름이 바뀐 것도 그런 내력이 있었다. 감잣국보다는 탕이라고 해야 더 진하고, 얼큰하고 뜨거운 느낌을 전달해주었기 때문이다.

흔히 서울에서 감잣국, 아니 감자탕의 원조를 응암동 일대로 본다. ‘대림감자국’인가 하는 간판을 아마 처음 보았던 것 같다. 실비집에서 노동자의 술안주로 끓이던 감잣국이 어느 날 그럴 듯한 감자탕으로 옷을 갈아입었던 것이다. 80년대 들어 돈이 돌고, 사람들은 외식이라는 걸 하기 시작했다. 박한 주머니 사정에 여럿이 둘러앉아 푸짐하게 먹기에는 감자탕만한 게 없었다. 어른 주먹처럼 큰 감자를 두어 개 넣고 ‘공룡뼈’라고 불렀던 거대한 돼지등뼈를 넣어 푹 끓인 그 탕을 먹으며 사람들은 진땀을 흘렸다.

감자탕에 왜 감자가 안 들어가느냐고, 그래서 기어이 감자란 그 감자가 아니라 돼지뼈를 일컫는 말이라는 엉뚱한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감자탕에는 감자가 들어가야 한다. 비싸다고 안 넣으면 감자탕이 아닌 것이다. 그저 돼지뼈탕이라고 해야겠다. 그래도 가게 이름은 여전히 감잣국이어서, 오래 전 그 민중의 땀처럼 짜고 진한 국물의 내력을 오랫동안 전하고 있는 셈이다.

감자탕은 쓸쓸하고 이리저리 치이고 쏠린 민중의 음식이다. 70년대 공전의 히트작이었던 <어둠의 자식들>에 보면 사창가에서 기생하는 인물들이 감자탕, 아니 감잣국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70년대가 배경인데 이를 봐도 감자탕이 아니라 감잣국으로 불렸다는 걸 알 수 있다).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감자국 백반이 들어온다. 뚝배기 위로 비죽하게 돼지 뼈다귀가 나와 있고 굵직한 감자알 위에 기름과 고춧가루가 벌겋게 엉켜 있다….’

가난한 자들의 속을 채워준 음식
감자탕은 지방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는 몰라도 서울의 변두리, 민중의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어둠의 자식들>에서처럼 가난한 서울 변두리나 시내의 사창가, 시장, 노동자 군집지역에서 팔았다. 고기를 변변히 먹을 수 없었던 그 시절 민중이 그나마 배불리 뼈다귀나마 뜯으면서 고기 맛을 잊지 않도록 하는데 기여했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지금도 감자탕은 가난하고 쓸쓸한 지역에서 유행하고 원조집들이 있다.

서울의 무연고자들 무덤이 있던 고택골 근처 응암동, 사창가와 호남선의 시발점 용산역-호남선이 한동안 눈물과 빈곤의 노선이었던 건 재론할 필요도 없다-이나 대학가 근처 돈 없는 청춘들의 골목이 그것이다. 우리는 또 얼마나 감자탕집에서 살점도 없는 뼈를 물어뜯으며 고단한 시절을 보냈던가. 어쩌면 감자탕 뼈처럼 삶의 골수를 쪽쪽 빨리면서 시대와 인생을 관통해왔는지도 모르겠다.

소도 그렇지만 돼지도 한국에서는 여지없이 숙명처럼 모든 것을 주고 간다. 뼈까지 다 내어주고 최후를 마친다. 돼지뼈는 굳이 감자탕이 아니더라도 온전히 우리들의 밥상에 오른다. 순댓국이 바로 그것이다. 돼지머리와 뼈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그 음식은 오랫동안 가난한 이들의 속을 덥히고 배를 채웠다. 순댓국 한 그릇에 얽힌 사람의 사연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감자탕은 순댓국이란 요리에 빚지고 있다. 순댓국 요리법에 감자와 고춧가루 그리고 이때에 시판 열풍이 불었던 쇠고기 다시다를 추가하면서 지금의 맛으로 이어졌다. 순댓국과 감자탕은 형제이자 슬픈 민중의 음식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셈이다.

서울이 고향인 음식 중에 요즘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건 사실 몇 개가 안 되는데 ‘술국’이라고 불렸던 해장국이 바로 서울음식이다. 그런데 이 해장국은 소뼈를 기본으로 한다. 서울은 웬일인지 소를 재료로 한 음식이 많다. 설렁탕도 역시 서울음식이다. 돼지뼈는 뭐랄까, 음식으로서도 서울에 들어가지 못하는 변방의 음식이라는 기운을 풍긴다.

돼지뼈는 이웃 일본에서는 라멘 요리의 재료가 된다. 라멘은 돼지고기는 거의 넣지 않고 거의 돼지뼈로 국물을 낸다. 그래서 진하긴 하지만 두꺼운 국물이 아니라 가볍게 퍼지는 맛이다.

가끔 그 시절의 감자탕집에 가고 싶어진다. 나무격자로 나뉜 유리문에 붉은 페인트로 감자탕이라고 적혀 있고, 가스 불판 위에 올려놓은 감자탕 국물이 졸아드는 냄새, 자욱한 담배연기, 그리고 친구들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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