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하늘 아래 시간은 다르게 흐르네
같은 하늘 아래 시간은 다르게 흐르네
  • 글 사진·김선미 기자
  • 승인 2011.09.27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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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선 <인연 언젠가 만날>

결국 돌아오기 위해 길을 떠난다. 등산과 하산이 하나인 것처럼, 여행도 돌아와야만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그곳이 집이든, 연인이든, 자기 자신이든 우리는 돌아갈 대상을 향해 일부러 먼 길을 에돌아간다. 그래서 모든 여행자는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어린 애인 같다. 돌아오지 않는 여행은 인생뿐일까. 하지만 윤회의 긴 여정을 생각하면 인생 역시 끝없이 되돌아가려는 몸부림 같다.

이해선은 그의 첫 책이었던 라다크 여행의 기록 <10루피로 산 행복>에서 자신이 전생으로 돌아간 듯했다고 썼다. 1997년 6월, 티베트의 성산 카일라스 앞에서 “나는 전생, 그 이전의 생에 이곳에서 살았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티벳에 머무르는 동안, 한때 내가 티벳의 주민이었던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티벳은 나의 고향이었던 것입니다”라고.

그가 10년 만에 그곳을 다시 찾았다. “이 이야기는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시작됩니다”라고 시작하는 <인연, 언젠가 만날>이란 책은 이해선의 두 번째 라다크 여행의 기록이다. 지난겨울 끝자락에 처음 만난 책인데, 무서운 빗줄기에 빨래 마를 날이 없던 지독한 여름을 견디는 동안 다시 읽었다. 먹장구름 사이로 잠깐씩 고개를 내미는 하늘과 서늘한 바람이 불현듯 그 책을 펼쳐들게 한 것 같다. 이해선의 사진 속에서 룽다와 타르초가 펄럭이는 희박한 공기 속의 하늘 그리고 강 건너 스픽투곰파가 있는 들판의 포플러나무 이파리를 흔드는 청신한 바람이….

나는 오래 전 이해선의 슬라이드 필름들을 루페로 찬찬히 들여다 본 일이 있다. 잡지에 실을 그의 여행기에 사진을 고르는 작업 때문이었다. 한쪽 눈을 감고 뷰박스 위에 펼쳐놓은 필름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있으면 요지경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지금처럼 컴퓨터 화면으로 디지털 파일을 열어보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컴퓨터 작업들로 왜곡되지 않은, 그 때 그 자리에 있던 그 순간의 빛이 고스란히 맺혀 있는 필름들. 그 속에는 히말라야의 높고 황량한 산과 계곡 그리고 오방색의 현란한 만다라, 구릿빛 얼굴에 가득한 해맑은 미소들이 손에 잡힐 듯 펼쳐졌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꼭 맞는 루페를 손에 쥐고서 한쪽 눈을 감은 채 들여다보고 있으면, 망원경으로 먼 곳을 바라보는 것도 같고 사진가의 카메라 렌즈로 직접 현장을 보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잡지사로 슬라이드 필름을 보내는 작가는 없다. 필름이 사라진 자리를 빠르게 대체한 디지털 이미지들은 산골에 가서야 겨우 한 움큼 따 먹을 수 있던 오디나 산딸기 같은 것을 대형할인마트에서 플라스틱 팩으로 만나는 기분이다. 몇몇 오지여행가들의 전유물처럼 소개되던 풍경들도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시큰둥해졌다. 더 이상 새롭고 낯선 곳을 다녀왔다는 사실만으로는 감동을 주기 힘들어진 것이다. 시장에 쏟아져 나온 수많은 여행서적만큼 독자들의 여행도 훨씬 더 풍요로워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는 단지 ‘어디’를 다녀왔느냐 보다 ‘어떻게’ 다녀왔느냐가 중요하다. 등산의 세계에서도 누가 먼저 새로운 정상에 깃발을 꽂을 것인가로 경쟁하던 피크헌팅(peak hunting)의 시대가 가고, 보다 어려운 길(variation route)을 정당한 방법으로(by fair means) 오르려는 시도들이 각광받는 것처럼 말이다. 공정여행, 착한여행이란 말들이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하지만 이해선은 이런 말들이 유행하기 오래 전부터 이미 그렇게 여행했다. 그는 여행자라기보다는 본향을 찾아가는 순례자였다.

처음 라다크를 찾아 갔을 때 스픽투곰파의 라마승이 그에게 ‘군장돌마’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했다. 그는 이름을 얻는 순간 자신이 떠돌이 여행자가 아니라 그들의 가족이고 친척이 되었다고 느꼈다. 그래서 10년 만에 다시 라다크를 찾은 것도 여행이 아니라 귀향이었다. 그가 라다크의 여인 ‘스칼장 아몽’에게 우편으로 보내준 사진 한 장이 그를 고향으로 불렀다고 했다. 그 사이 여인의 아들 도르제는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해 있었다.

“스칼장 아몽은 나와 동갑이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같은 또래인 나에 비해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홉 자녀를 두었고, 어머니가 태어난 집에서 어머니와 여러 가족들이 어울려 살고 있었습니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 점이 참 부러웠습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처없이 떠돌던 내 삶이 히말라야 오지에 붙박혀 살아온 한 여자의 삶 앞에서 갑자기 초라해졌습니다.” -이해선의 책 <인연 언젠가 만날> 중에서

라다크 산맥과 카라코람 산맥 사이 깊은 골짜기로 해가 지고 거무스름한 산 그림자 위로 이내가 깔릴 무렵, 앞마당에서 야크의 젖을 짜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여인이 스칼장 아몽이다. 그리고 그녀의 집 이층 창가에 서서 스칼장 아몽을 바라보고 있는 또 다른 여인은 군장돌마, 이해선이다. 그 애절한 눈빛을 통해 들여다 본 라다크의 풍경들을 보면서, 그가 참 많이 외로웠구나 싶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아릿하게 외로운데, 그는 ‘꽃도 사람도 외로운’ 곳이라고까지 덧붙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창밖의 서울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 책 속 라다크의 하늘을 본다. 그래, 같은 하늘인데… 멀리 라다크가 아니어도 이 좁은 땅 안에서도 그리워하면서 평생 만나지 못하는, 아니 만날 수 없는 얼굴이 있지. <인연 언젠가 만날>은 그가 돌아가고 싶어 몸부림치는 곳이 무엇인지 비로소 고백하는 책이다. 오래도록 부치지 못한 연서다.

여행지에서 우리는 항상 떠날 사람이다. 그래서 풍경 속에 붙박고 있는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갈 이의 약속을 그다지 믿지 않는다. 우리가 그걸 이용해 길 위에 흘려버린 약속들이 얼마나 많을까. ‘꼭 다시 올게요’라는 것은 당장 지키기 어렵다고 해도, ‘사진 보내줄게요’하는 사소한 약속마저 너무 쉽게 잊지 않았는지.
환갑이 멀지 않을 나이의 스칼장 아몽은 10년 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지만, 어린 라마승 텐진초파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해선이 사진 한 장을 전해주기 위해 찾은 또 한 사람의 시계는 오래된 사진 속에서 멈춰 버린 것이다. 똑같은 시간이 누군가에겐 길지만 어떤 이에겐 너무 짧다. 그것이 인생인가보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늦었나 봅니다. 조금씩 어긋나는 인연은 안타깝고 서럽습니다. 내가 잊지 않고 약속을 지켰다는 걸 말해주고 싶은데, 그는 어디로 간 걸까요.  소년을 찾아 이곳까지 온 내가 안쓰러웠는지 노승은 나를 데리고 곰파를 향해 올랐습니다. 랑둠곰파는 너른 하천 삼각주 바위산 위에 성채처럼 세워져 있었습니다. 온 사방이 하천이고 물입니다. 말라버린 하천 사이사이로 여러 갈래의 강물들이 흘러갑니다. 물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고, 여럿이 아닌 하나입니다.”
위와 같은 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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