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 투혼 발휘한 17일간의 자아 찾기 레이스
부상 투혼 발휘한 17일간의 자아 찾기 레이스
  • 글 사진·안병식 기자
  • 승인 2011.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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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마라톤대회 참가기 l Deutschland Lauf 1200km

▲ 독일의 시골 마을을 지나다보면 아름다운 풍경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독일 종단하는 1200km 코스…참가자 절반만 험난한 코스 완주

독일의 시골 마을을 지나다보면 아름다운 풍경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계속된 레이스로 지친 필자. 몸은 고달팠지만 자아를 찾을 수 있었던 대회였다.

프랑스에서 열린 ‘2010 Transe Gaule 1150km’ 대회를 마치자마자 독일로 달려간 안병식 씨. 늘 극한의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가 프랑스 대회를 완주하고 곧바로 독일을 종단하는 ‘Deutschland Lauf 1200km’에 참가했다. 전 세계에서 참가한 선수들과 17일 간 독일의 구석구석을 달리며 진정한 자아를 발견했다는 안병식 씨. 그 뜨거웠던 대회의 현장 속으로 초대한다.


▲ 그림 같은 독일 남부 지방의 풍경.

프랑스 대회가 끝나자마자 기차를 타고 독일로 향했다. 하지만 발걸음은 무거웠다.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몸이 얼마나 빨리 회복될 수 있을지, 다쳤던 무릎은 얼마나 더 좋아질 수 있을지, 머리 속은 온통 다친 무릎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그래서일까. 늘 아름답게만 보이던 기차 밖 풍경이 더 낯설게 느껴졌다.
무릎은 생각보다 많이 안 좋았다. 독일에서 머무르는 동안 수영과 얼음찜질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응급처방이라도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아 간단히 약 처방을 받고 대회가 열리는 카프 아르코나(Kap Arkona)로 향했다. 새로운 도전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했던 전과 달리 대회 장소로 향하면서 이렇게 마음이 무거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충분히 휴식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대회장에 도착하자 여러 대회에서 만난 낯익은 참가자들이 인사를 건네 왔다. 프랑스 대회를 마치자마자 독일 대회에 참가했다는 말을 했을 때는 모두 믿을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심지어 “Are you crazy?”라고 되묻는 참가자도 있었다. 이제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다. 이번 대회를 위해 많은 트레이닝을 하지도 못했고 결국 부주의로 인해 무릎 부상을 얻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견뎌낼 수 있을까’ 불확실한 미래가 마음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 계속된 레이스로 지친 필자. 몸은 고달팠지만 자야를 찾을 수 있었던 대회였다.

무릎 통증 이겨내고 대회 참가
이번 레이스는 독일의 서북쪽 끝 카프 아르코나에서 출발해 독일 남쪽 끝인 뢰라히(Lorrach)까지 17일 동안 하루 평균 70km를 달리는 대회다. 여기에 85~93km를 달리는 롱데이 코스와 독일 남쪽의 알프스 산악지대를 지나야 하기 때문에 코스가 매우 힘든 대회이기도 했다. 

이른 아침 동이 트기 전 버스를 타고 출발 장소인 카프 아르코나로 향했다. 파란 바닷가에 햇살이 눈부시게 비추는 이른 아침, 모두들 새로운 도전에 대한 기대로 가득한 표정이다. 하지만 프랑스 대회 후 일주일 동안 한 번도 달리지 않아 대회 완주에 대한 걱정이 앞선 나는 그저 무사히 대회를 마치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 그림 같은 독일의 전원 풍경.

첫째날 코스 66km. 첫날의 레이스 치고는 그리 짧지도 길지도 않은 거리다. 첫날만 무사히 완주한다면 이번 레이스를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디어 대회가 시작됐다. 출발하자마자 모두들 빠르게 앞으로 나갔지만 난 맨 뒤에서 거리를 두고 레이스를 시작했다. 다행히 무릎 통증이 심하지 않아 8시간을 넘게 달려 마지막 주자로 피니시 라인을 통과했다. 물론 50km를 넘으면서 다쳤던 무릎이 조금 아프기는 했지만 걱정했던 것과 달리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다. 

독일의 가을 날씨는 흐리고 비가 오는 날이 여러 날이다. 오늘은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며 83km를 달려야했다. 추운 날씨는 그런대로 견딜 만 했지만 하루 종일 젖어있는 신발과 발이 더 문제였다. 비는 레이스가 끝날 즈음 오후 늦게야 그쳤다. 비가 그친 후 하늘에는 무지개가 떠있었다. 

86km, 93km, 83km…. 다행이 하루하루 지날수록 몸은 더 좋아졌다. 대회가 시작한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나고 있었다. 매일 다친 사람들은 늘어만 가고 하루에 1~2명의 탈락자들이 속출했다. 이제는 아프거나 부상을 입더라도 달리면서 치료를 해야 한다. 쉬는 날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단 레이스는 다른 레이스와는 달리 더 어려운 것 같다. 이것은 순위와의 경쟁이 아닌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 몸은 비록 힘들지만 평화로운 독일 마을의 풍경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가족과 친구들의 응원으로 기운 되찾아
주말에 독일에 살고 있는 동생이 찾아왔다. 매일 힘겹게 레이스를 하는 동안 서포터가 있다는 건 너무나 큰 힘이 된다. 그래서 가족 단위로 참가하는 선수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선수가 달리는 동안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함께 격려도 하고 음료와 음식도 나눠준다. 하지만 무엇보다 다치거나 아팠을 때 서포터의 존재가 절실하다. 여건만 된다면 장기 레이스에서는 서포터와 함께 하는 게 레이스를 조금 더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다. 

레이스를 하는 동안 프랑스 대회에 같이 참가했던 친구들로부터 격려의 이메일을 받았다. 

“안녕 안. 넌 정말 대단해. 프랑스 대회가 끝나고 회복 기간도 짧은데 독일 대회를 나가다니!” -Jibi로 부터
“너는 한 해에 프랑스와 독일 대회를 완주하는 유일한 사람이 될 거야. 행운을 빌어.” -Fabrice Viaud로부터 친구들은 인터넷을 통해 내가 레이스 하는 걸 매일 체크하고 있었다. 아마 프랑스 대회가 끝나고 바로 다시 독일 레이스에 참가하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친구의 이메일을 받고 프랑스와 독일 레이스를 같은 해에 완주하는 것이 최초라는 사실도 알았다. 이렇게 대회에 참가하는 동안 만나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인연은 나에게 너무 소중한 선물이 된다.

▲ 숙소 안 풍경. 상처 부위에 얼음을 얹고 있는 선수, 피곤한 몸을 누이고 쉬고 있는 선수…. 하나 같이 피곤에 지친 모습들이다.
▲ 10~15km마다 만나는 체크 포인트에는 선수들을 위한 간단한 간식들이 준비돼 있었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이 빨리 지나가고 있었다. 대회 11일째, 이번 대회에서 가장 힘든 코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거리는 89km지만 큰 언덕과 산을 오르는 코스가 포함되어 다치고 지쳐있는 참가자들 모두에게 너무 힘든 구간이다. 오늘은 3명의 참가자가 레이스를 포기했다. 34명의 참가자 중 이제 16명만이 남아있었다. 

이제 나도 많이 지쳐가고 있었다. 잠시만이라도 달리기를 멈추고 쉬고 싶었다. 그리고 잠시 쉬면서 나에게 물음을 던지고 싶었다. 나의 달리기에 대해. 나의 인생에 대해. 내가 달리고 있는 이곳은 어디인가, 난 지금 어디까지 달려왔는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가, 이제 더 얼마나 많은 길을 가야하는가. 그렇게 달리기를 멈추고 한동안 쉬고만 싶었다. 

이제 5일 후면 17일 간의 레이스는 끝이 난다. 며칠 남지 않은 일정에 참가자들에게서 웃음과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12일째 레이스를 마치고 중국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매일 빵과 음료로 배를 채우다 얼마 만에 먹어보는 밥인지 모르겠다. 한국을 떠나 온 지도 한 달 하고도 보름이 지났다. 그동안 힘든 레이스 때문에 무엇을 먹고 싶었는지도 잠시 잊고 있었지만 오늘 만큼은 마음껏 먹고 싶었다. ‘다친 무릎이 악화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맥주 한 잔 마음 놓고 마실 수 없었던 시간들. 오늘 만큼은 시원한 맥주 한잔의 여유를 가져봤다.

▲ 매일 긴 거리를 홀로 달리는 것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스스로를 다잡고 달려야만 했다.

참가자 절반이 탈락, 자신과의 싸움이 중요
어느새 레이스는 1000km를 넘어 종반으로 접어들었다. 독일 남부지방은 알프스산맥이 있어 산을 오르고 내리는 코스가 많았다. 특히 대회 마지막 날은 더욱 험난한 구간. 하지만 일반 도로보다 트레일 구간을 더 좋아하는 나에게는 유리한 코스였다. 매일 아스팔트 도로 위를 달리다 보면 발과 무릎에 충격도 많이 가고 지루하기까지 한데 흙을 밟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힘이 나는 기분이다.

프랑스와 독일 레이스를 하는 동안 각양각색의 수많은 길을 지났다. 자동차가 달리는 고속도로 옆을 지나기도 했고, 한적한 시골마을도 지났고, 자전거길, 옥수수밭·포도밭 사이의 작은 길들도 지났다. 때론 포장되지 않은 트레일 코스를 따라 산을 오르기도 했다. 갈림길 마다 선택의 순간도 있었다. 순간의 잘못된 선택은 길을 잃고 헤매게도 만들었다. 길 위에서 걷고 달리고 서있고, 모든 것은 길 위에서 시작하고 길 위에서 끝이 났다. 

▲ 결승점을 향해 달리는 도중 만난 아름다운 석양. 외롭고 힘든 레이스에 기운을 더해주는 풍경이다.

▲ 독일 남부로 접어들자 아름다운 알프스의 산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 체크 포인트를 지나면서 내가 달려온 거리들을 생각해봤다. 2343, 2344, 2345km…. 이제 몇 분 후면 한 달을 넘게 달린 나의 달리기는 끝이 난다. 내 몸은 더 가벼워져 가고 있었고 발놀림은 더욱 빨라졌다. 

한 달 넘게 달리며 계절의 변화, 자연의 변화도 느낄 수 있었고 때론 비, 안개, 뜨거운 태양이 함께 하기도 했다. 고요한 침묵을 깨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동이 트기 전 깜깜한 어둠속을 달리기고 했고, 붉게 물든 석양과 무지개를 보며 달리기도 했으며, 2시간을 넘게 하루살이와 모기 때와 싸우며 달린 적도 있었다. 달리면서 행복했던 순간들, 외로움과 슬픔의 기억들, 고통의 순간들, 모든 것에 감사하고픈 순간들이 스치듯 지나갔다.

달리면서 느낀 매일 매일의 감정들은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되기도 했다. 몸이 아프고 난 후에야 내가 얼마나 달리고 싶었는지, 달리기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행복을 가져오는지 느끼게 되었다. 길 위에 서 있고 걸을 수 있고 달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했던 순간들, 이제 35일 동안의 나의 달리기는 끝이 났지만 지금 이 순간 난 다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안병식
(노스페이스) | http://blog.naver.com/tolerance 2006년 중국 고비사막 마라톤 250km 우승, 칠레 아타카마 사막마라톤 250km 4위, 이집트 사하라 사막 마라톤 250km 3위 / 2007년 중국 고비사막 대회 완주, 칠레 아타카마 사막 대회 완주, 이집트 사하라 사막 미디어 팀 카메라맨, 남극(Last Desert) 마라톤 130km 3위(사막마라톤 그랜드 슬램 달성) / 2008년 베트남 정글마라톤 235km 완주, 북극점 마라톤 우승, 고어텍스 트랜스 알파인 런 300km(14,000m) 완주,  이집트 사하라 사막 마라톤 250km 완주 / 2009년 제주 국제 울트라 마라톤 한라산 148km 트레일 런 우승, 스페인 까미노 산티아고 800km 완주, 노스페이스 몽블랑 울트라 트레일 런 166km 완주, 고어텍스 트랜스 알파인 런 240km 완주, 남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 익스트림 마라톤 240km 완주, 히말라야 100마일(166km) 런 3위 / 2010년 한라산 트레일 런 148km 우승, 호주 익스트림 레이스 250km 완주, 프랑스 횡단 1150km 완주, 독일 횡단 1200km 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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