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캠핑의 명품 업체
11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캠핑의 명품 업체
  • 자료제공 캠핑투게더
  • 승인 2011.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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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ping Company__콜맨

아웃도어 업체로서의 입지강화와 제품 개발에 주력


국내 콜맨이란 브랜드가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등산용 버너인 피크원이 그 시작이 아닐까 싶다. 당시 이 버너는 취사야영금지가 시작되기 전까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산꾼이라면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이처럼 콜맨은 휘발유 버너와 랜턴으로 유명한 회사로 미국의 캠핑용품을 대표하는 업체다. 이에 신년을 맞아 올해로 11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아웃도어 업체인 콜맨의 역사와 제품을 살펴보았다. 

콜맨이라는 회사의 시작은 백 여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훌쩍 뛰어넘어 우리가 한창 쇄국정책에 매달리던 시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콜맨의 시작은 1899년 창립자인 W. C. 콜맨이 처음으로 램프를 마주하게 되면서 부터다. 당신 창업자인 W. C. 콜맨은 알라바마주의 작은 잡화점에 켜 있던 강렬한 가솔린 램프를 보고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가 이 램프에 주목한 것은 이전과 달리 등유가 아닌 가솔린을 연료로 사용했다는 것과 심지 대신 맨틀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램프가 가진 가능성을 바로 꿰뚫어 본 콜맨은 ‘에피션트 램프’의 제조사인 테네시주 멤피스의 어비 길리랜드사로부터 램프를 구입, 판매를 시작했다.

하지만 판매는 제대로 성사되지 않았으며 이듬해 콜맨사의 전신인 ‘하이드로 카본 라이트 컴퍼니’를 설립했다. 그는 판매가 아닌 램프 대여업을 시작했으며 ‘켜지지 않으면 돈을 받지 않는다’라는 아이디어를 통해 고객들에게 신뢰감을 심어 주었다. 이어 그는 1901년 캔자스주 위치타로 회사를 옮기고 본격적으로 램프사업을 시작했다.

그가 추구한 회사의 이념은 ‘끊임없이 변하지 않는 빛’이었다. 1903년에는 기존의 에피션트 램프를 개량해 처음으로 아크램프를 개발했다. 콜맨의 첫 번째 램프인 이 제품은 미식축구경기의 야간 조명기구로 사용되면서 콜맨의 이름을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는 램프 대여업의 한계를 느끼곤 대여에서 판매로 사업을 전환했으며 1909년에는 들고 다닐 수 있는 가솔린 탱크식 테이블 램프를 개발한다. 이 포터블 램프는 램프를 가지고 이동할 수 있었으며 이는 고객의 요구와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이에 이 랜턴은 농촌가정집의 필수품이 되었다.

이어 1913년 콜맨은 회사명을 ‘더 콜맨 램프 컴퍼니’로 변경했다. 이어 1914년에는 당시 ‘한밤의 태양’으로 불리건 ‘아크랜턴’을 개발했다. 이 랜턴은 최초의 전천후 실외용 랜턴으로 사방 100야드까지 빛이 도달했으며 농촌에서 밤새 마구간이나 축사일을 하는 게 상담한 도움을 주었다. 또한 약 2l의 연료만 가지고도 25시간 이상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었으며 건초가 많은 축사에서 랜턴이 넘어지더라도 가솔린이 새지 않아 농가에서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었다. 아크랜턴은 농민과 목장 근로자의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켰으며 미국 농촌지역의 생활을 혁신적으로 변화시켰다

1차 대전이 일어나자 미국정부는 이처럼 발전하던 콜맨의 아크랜턴을 가장 중요한 물자로 지정했으며, 약 7만개의 랜턴을 생산했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더 콜맨 램프 컴퍼니’는 사업을 미국 내에 국한시키지 않고 국제화를 위해 캐나다에 국제부문본부를 설치했으며, 토론토에 최초의 해외공장을 설립했다. 또한 1923년에는 석탄과 장작을 사용하던 기존의 조리용 스토브에서 이를 개량한 캠프용 스토브와 가정용 스토브를 발매하기 시작했다. 

순조롭게 사업을 확장하던 ‘더 콜맨 램프 컴퍼니’였지만 불안 요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1929년 미국에 불어 닥친 세계대공황은 ‘더 콜맨 램프 컴퍼니’에게도 큰 타격이었다. 특이 불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시행한 공공시설 투자확대는 ‘더 콜맨 램프 컴퍼니’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공공시설 투자확대로 진행된 테네시주 계곡의 발전용 댐은 미국 내의 전기 공급을 가속시켰으며 지방과 농촌에 전기를 공급하게 되었다. 이는 사람들이 간편하게 전기기구를 사용하게 됨에 따라 가솔린 랜턴은 수요는 감소하기 시작했으며 시장의 규모도 그만큼 줄어들고 말았다.

이에 W.C 콜맨은 이 역경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개발하던 랜턴과 스토브 이외의 새로운 분야로 진출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를 위해  W.C 콜맨이 시작한 것이 바로 석유를 연료로 사용하는 실내 난방기구와 마루 등 바닥을 따뜻하게 하는 난방시스템의 개발이었다. 이 결과 ‘더 콜맨 램프 컴퍼니’는 이 분야 최대의 메이커로 자리 잡았으며 역경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후 ‘더 콜맨 램프 컴퍼니’는 미시시피 서부지역에서 가장 많은 시설을 갖춘 기업이 되었으며 2차 대전 때에는 미군에게 필요한 GI포켓 스토브를 개발했다.

전시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해달라는 미군의 요청에 따라 진행된 GI포켓 스토브는 ‘가볍고, 1쿼트(약 1리터)의 우유병보다 작으며 어떤 연료든 사용가능할 것’이라는 주문 상황에 맞춘 명품이다. 또한 섭씨 -52도~+51도의 범위 내에서 어떤 조건하에서도 사용할 수 있어야 했다.

더 콜맨 램프 컴퍼니’가 내놓은 이 제품에 만족한 군은 빠른 납품을 원했고 이에 24시간 체재로 공장을 풀가동한 결과, 2개월 후인 1942년 11월에 5천개의 콜맨 GI포켓 스토브를 북아프리카로 진격하는 미군에게 납품할 수 있었다. 당시 이 GI포켓 스토브는 군이 요구한 조건을 모두 충족시켰으며, 무게는 1.5kg밖에 되지 않았다. 화력의 세밀한 조절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연소 시 소음이 약간 크다는 결점은 있었지만, 화력은 매우 뛰어난 것이었다.

GI포켓 스토브는 한 컵 정도의 연료로 2시간가량 연소가 가능했으며 유럽과 태평양 전선에서도 사용되었다. 특히 겨울에는 텐트 안에서도 사용할 수 있었고, 포탄이 떨어지는 참호 속에서도 서용할 수 있었다. 당시의 유명한 종군기자였던 어니 파일의 기사는 GI포켓 스토브를 선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 자신도 전선에서 GI포켓 스토브를 애용했으며, 이 스토브에 대한 기사를 15편이나 썼을 정도다. 그는 이 GI포켓 스토브 ‘지프와 GI포켓 스토브야말로 제2차 세계대전이 낳은 가장 뛰어난 발명품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러한 기사에 힘입어 콜맨사의 이름은 점차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45년 전쟁이 끝날 무렵 W.C 콜맨은  ‘더 콜맨 램프 & 스토브 컴퍼니’에서 ‘더 콜맨 컴퍼니’로 회사명을 변경하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인 랜턴, 스토브, 난방기구, 오일히터 등의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1960년 들어 미군과의 계약이 사라지고 빠르게 변해가는 시대의 흐름은 콜맨사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석유식 난방기구와 바닥  방시스템의 수요는 줄어들었고 매상도 85%나 감소했다. 이런 위기애 변화를 가져온 것은 쉘던 콜맨 시니어의 취임이었다.

그는 랜턴과 스토브를 캠핑용구 전반으로 확대했으며 금속으로 만들어 왔던 쿨러에 플라스틱제 라이너를 응용하는 기술을 개발했고 캠핑용 쿨러와 저그를 상품화했다. 또한 랜턴과 버너만이 아닌 아웃도어 전부를 아우르는 상품을 전개하기 위해, 텐트와 슬리핑백도 추가했다. 이러한 방향 전환이 곧바로 상품 판매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이후 콜맨의 방향을 결정지었다고는 할 수 있다.

이는 쉘던 콜맨 시니어그가 대학시절부터 아웃도어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으로 아웃도어용픔 전반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은 당연한 흐름이었다. 그는 우수한 경영자이면서도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기에 1985년에는 레이건 정부로부터 아메리칸 아웃도어위원회 이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자연과 아웃도어에 대한 그의 정신은 이후 콜맨의 기업정신으로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쉘던 콜맨의 타계 후 콜맨은 아웃도어시장을 가장 중요했던 쉘던의 뜻을 따라 아웃도어 전반에 걸친 신제품 개발과 다양한 상품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이에 랜턴의 생산은 1995년에 5천만 개를 넘어 섰으며 램프와 랜턴, GI포켓 스토브와 스틸 벨트 쿨러 등 시대의 변화와 함께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콜맨은 이제 전 세계로 알려진 ‘종합 아웃도어 메이커’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다.

콜맨이 국내에 본격적인 첫 진출을 시작한 것은 콜맨 창업 100주년의 해인 2000년으로 신 브랜드인 엑스포넌트 도입과 더불어 한국에 지사를 설립하면서부터다.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콜맨으로부터 제품을 공급받아 진행해온 콜맨은 캠퍼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서구식 사이즈와 디자인은 국내 캠퍼들의 구매욕을 당기기에는 부족했다. 튼튼하고 잔고장이 없다는 것은 콜맨이 지닌 장점이었지만 일본식 제품에 길들여진 국내 구매들에게는 다소 부족한 점이 있었다.

이에 콜맨 일본지사 창립 30주년을 맞아 콜맨 한국지사의 재 런칭이 이루어졌으며 압구정동에 직영매장을 오픈했다. 한국인의 사양에 맞는 제품을 들여오기 시작하면서 콜맨은 더욱더 빠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2009년에는 콜맨의 공식 취급점이 50개 매장으로 확대됐으며 지난해에는 콜맨 A/S서비스 센터와 본사를 송파구 가락동으로 이전했다.

앞으로 한국 콜맨은 캠핑 장비를 판매하는 업체에서 벗어난 아웃도어 전반에 걸친 문화를 보급하고 제품를 공급하는 업체라는 이미지를 확립하는 데 주력할 예정이다. 또한 아웃도어 마니아들이 진정 사랑하는 명품을 공급하는데 주력할 계획이다.

2011년 들어 110년째를 맞이한 콜맨은 ‘품질’과 ‘신뢰’를 중시하며 오늘도 달리고 있다. 무뚝뚝해 보이는 장인 기질과 더불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훌륭히 제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라는 이야기는 콜맨 제품을 대변하는 이야기라 하겠다. 이는 콜맨의 제품에 붙이는 로고에서도 알 수있다. 이는 시대별 콜맨의 방향성을 나타내는 일종의 지표이기도 하다. 다양한 변천을 거친 콜맨의 로고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역시 ‘태양+Coleman’마크다. ‘Coleman’에서 떠오르는 태양은 ‘한 밤의 태양’을 이미지화한 것. 아직 전기가 일반적으로 보급되지 않았던 20세기 초 미국에서 ‘The Sunshine of the Night’로 불렸던 콜맨의 랜턴을 상징하는 로고이다. 

이에 W.C 콜맨은 이 역경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개발하던 랜턴과 스토브 이외의 새로운 분야로 진출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를 위해  W.C 콜맨이 시작한 것이 바로 석유를 연료로 사용하는
실내 난방기구와 마루 등 바닥을 따뜻하게 하는 난방시스템의 개발이었다.

그는 랜턴과 스토브를 캠핑용구 전반으로 확대했으며 금속으로 만들어 왔던 쿨러에 플라스틱제 라이너를 응용하는 기술을 개발했고 캠핑용 쿨러와 저그를 상품화했다. 또한 랜턴과 버너만이 아닌 아웃도어 전부를 아우르는 상품을 전개하기 위해, 텐트와 슬리핑백도 추가했다.

앞으로 한국 콜맨은 캠핑 장비를 판매하는 업체에서 벗어난 아웃도어 전반에 걸친 문화를 보급하고 제품를 공급하는 업체라는 이미지를 확립하는 데 주력할 예정이다. 또한 아웃도어 마니아들이 진정 사랑하는 명품을 공급하는데 주력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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