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해 지는 땅 변산반도에도 어김없이 태양은 떠올랐다. 전날 도착해 상록해수욕장 근처에서 일박을 한 터라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지만, 겨울로 접어든 요즘은 낮이 많이 짧아져 일몰을 보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했다.
▲ 기품이 느껴지는 내소사 대웅전. |
반도의 남쪽으로 이동하기 전에 잠시 궁항으로 향했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촬영한 ‘전라좌수영’ 세트장이 있기 때문. 30번 국도를 타고 격포항 방면으로 이동하다가 격상 삼거리에서 좌회전해 해안 쪽으로 내려가면 세트장이 보인다.
탁 트인 서해를 바라보며 지어진 세트장에는 내아·동헌·주막 등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전라좌수영 세트장은 조망이 좋아 해안가 전투신 중 주요장면이 촬영된 장소다. 이른 아침, 뿌연 안개가 낀 바다를 바라보니 이 땅을 침략한 왜군의 무리를 쳐부수던 이순신 장군의 공격명령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수수한 멋이 가득한 내소사 전경
변산반도는 해안선을 따라 30번 국도가 순환하고 있어 명소를 찾아 가는 길이 편리하다. 내소사로 가기 위해 궁항에서 나와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30분쯤 이동하니 어느새 천년 고찰이 눈앞에 나타났다.
▲ 아직 바닷물이 마르지 않은 곰소의 염전. |
일주문을 지나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의 하나인 내소사 전나무 길이 펼쳐졌다. 나무의 키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목을 뒤로 한참이나 젖혀야지만 그 끝이 보일 정도로 키 큰 나무들이 빼곡한 숲 길. 그 사이를 아침 햇살이 조심스레 비춰들고 있었다.
향긋한 전나무 향을 맡으며 설렘을 가득 안고 길을 걸어본다. 600여m나 계속 이어지는 아름다운 그 길 끝에는 성큼 다가온 겨울이 무색하게 여전히 붉은 색 옷을 입은 단풍나무가 사찰의 고즈넉함을 더해주며 서있었다.
내소사는 기품이 있다. 여느 사찰 건물들처럼 알록달록 화려한 무늬보다는 오랜 세월을 견뎌낸 검푸른 목조건물의 품위가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특히 보물 제291호의 대웅전에서 아름다움은 극에 달하는데, 화려한 무늬의 꽃창살이 전각을 두르고 있고 내부 천장에는 승천하는 용들이 부처를 호위하고 있어 당시 대웅전이 얼마나 웅장하고 화려했는지를 보여준다.
▲ 쓸쓸한 반계 유형원 선생 유적지. 선생도 같은 자리에 앉아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연구를 했을 것이다. |
새우젓·밴댕이젓·낙지젓·오징어젓 등 각종 젓갈이 가득한 곰소항에는 가을이면 김장 김치에 들어갈 젓갈을 사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온다. 곰소항을 지나면 길 왼편으로 염전이 이어진다.
중국산 소금에 밀려 염전의 규모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명성을 이어오고 있는 염전에는 거울처럼 투명한 바닷물이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후손의 손길을 그리워하는 반계선생유적지
▲ 호벌치 전적지. 정유재란에서 왜군과 맞서 싸운 회맹단을 기리기 위한 전적지가 있다. |
곰소항에서 30번 국도를 타고 5분쯤 이동하면 좌측으로 현대오일뱅크가 보인다.
주유소를 끼고 좌회전 해 1.5km 들어가면 반계유형원선생유적지 이정표가 보이는데, 이곳에 주차하고 산길을 따라 300여m를 올라가면 유적지다. 유적지로 가는 길은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지 잡초와 풀이 무성했다.
당시에는 마을에서 꽤 떨어졌을 법한 외진 곳에 위치한 유적지에서는 아랫마을의 농경지와 바다가 한 눈에 조망돼 가슴이 확 트였다.
아마 유형원 선생은 이곳에 앉아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할 현실의 문제들을 고민했을 것이다. 유적지에는 선생이 기거했던 집 한 채가 전부였다. 그러나 이 한 채의 유적지마저 소홀하게 관리가 되고 있는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유적지를 나와 북쪽으로 향했다. 보안면 영정사거리에서 좌회전해 23번 국도로 갈아타고 유정재를 오르면 왼쪽으로 정유재란 호벌치전적지가 보인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일본군과 맞서 싸운 125명의 회맹단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전적비다. 고갯 마루 위에서 쓸쓸하게 서있는 전적비를 뒤로 하고 개암사로 향했다.
일주문을 지나 사찰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대웅전이 보인다. 커다란 바위가 솟구친 울금바위 밑으로 위엄있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대웅전은 보물 제292호로 지정됐는데, 우아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대웅전 내부에는 용이 꿈틀대는 모습과 극락조들이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다니는 모습이 조각돼 있다. 비록 세월이 흘러 색은 바랬지만 화려함을 잃지 않은 모습이다.
▲ 고즈넉한 개암사 모습. 대웅전 위로 울금바위가 도드라져 보인다. |
개암사에서 나와 23번 국도를 타고 부안 읍내로 향했다. 부안 읍내에는 마을 신앙의 상징인 당산이 흩어져 있다. 오래 전 부안 읍성에는 동문·서문·남문 세 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백성들은 성문 앞에 마을을 지키기 위한 당산을 세워 악한 기운을 막고자 했다.
세 곳의 당산 중 부안읍 서외리에 있는 서문안 당산을 찾았다. 두 개의 솟대와 할아버지 장승, 할머니 장승이 나란히 서있는데, 특히 할머니 당산은 솟대모양으로 머리끝에 오리를 올려놓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부안읍 동중리에는 남문안 당산도 남아있다.
바다가 땅이 된 계화도 간척지
▲ 석상리 지석묘. ‘거대한 상석을 어떻게 옮겼을까’ 궁금하다. |
간척지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에 올라 보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만경강과 동진강이 만나는 계화간척지 자리는 한때 수많은 갯벌의 생명들이 숨쉬고 살았을 것이다. 널따란 농경지가 잠시 삭막한 무덤처럼 느껴졌다.
계화리에서 빠져나와 다시 30번 국도를 탔다. 청호리에서 하서면 방면으로 좌회전해 736번 지방도를 타고 도화 사거리에서 우회전 하면 석상리 지석묘.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바다와 평지, 산이 두루두루 분포한 변산반도는 그 옛날 청동시시대에도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이었음은 분명하다.
막바지 물막이 공사가 한창인 새만금방조제
지석묘를 나와 바람모퉁이를 돌아서면 다시 바다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모호할 만큼 희뿌연 안개가 뒤덮인 바다에 저 멀리 고군산군도가 마치 신기루처럼 흐릿하게 떠있었다.
바다의 짠내음을 맡으며 달리는 해안길에는 부안의 대표 먹을거리 바지락죽집이 군데군데 있어 배고픈 여행객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출출한 배도 달랠 겸 바지락죽집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했다. 부안의 바지락죽집은 변산온천 근처에 몰려있다. 온통 ‘원조’임을 강조하는 음식점 중 ‘변산온천산장(063-584-4874)’이 바지락죽으로 특허를 냈을 만큼 믿을만한 원조집이다.
▲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적벽강 절벽. |
전시관 2층의 전망대에서 곧게 뻗은 방조제를 망원경으로 자세히 볼 수 있다. 새만금간척지에는 아직 바닷물이 자유롭게 드나들어 어선들이 어업을 하고 있었는데, 몇 년 후 공사가 끝나면 이곳도 계화간척지처럼 바다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다. 이곳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어부들의 미래가 걱정스럽다.
방조제를 뒤로하고 해안을 따라 계속 서쪽으로 이동했다. 5분쯤 달리면 변산해수욕장. 1930년대에 개장한 유서깊은 변산해수욕장은 2km에 다다르는 긴 모래사장과 낮은 수심 때문에 여름철 피서지로 인기가 좋았다.
변산해수욕장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고사포해수욕장도 울창한 송림덕분에 찾는 이들이 많다. 무료로 개방하는 해수욕장이라 관리가 썩 잘 돼 있지는 않지만 모래사장을 벗어나면 바로 소나무 숲이 이어져 해수욕과 산림욕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철 지난 해수욕장은 쓸쓸한 기운만이 조개껍질처럼 뒹굴고 있었다.
해식단애 물들이는 채석강 붉은 노을
변산반도 해안 드라이브의 백미인 채석강과 적벽강의 해식단애를 보기 위해 반도의 서쪽 끝으로 이동했다. 고사포해수욕장을 지나 해안도로를 타고 이동하는 길. 한 달에 두 번 바닷길이 열리는 하섬전망대가 있다.
원불교 성지로 알려진 하섬은 매월 음력 1일과 15일에 길이 열리는데, 백합·꼬막·죽합 등 풍부한 해산물을 딸 수 있다. 아쉽게도 바닷길이 열리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전망 좋은 해안가에서 푸른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을 바라보는 기분이 꽤 낭만적이었다.
어느새 해는 기울어 점점 서쪽 바다 위로 저물어 가고, 해안은 붉은 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적벽강에 도착하니 붉은 해안이 더 붉게 타오르는 듯하다.
▲ 수성할미에게 제를 올리는 수성당. 이곳에서 탁 트인 바다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
적벽강에서 1.5km 들어가면 수성당이다. 수성당은 서해바다를 다스리는 여신 수성할미와 할미의 여덟 딸들에게 제를 올리는 곳으로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수성할미는 키가 어찌나 큰지 나막신을 신고 바다를 걸어도 버선목까지 밖에 물이 차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수성할미가 바다를 걸어 다니며 수심이 깊은 곳은 메우고 위험한 곳은 표시해 두어 어부들이 안전하게 어업을 할 수 있다고 한다.
5시가 넘으니 채석강은 온통 실루엣으로 가득하다. 떨어지는 붉은 해와 대조적인 사람들의 검은 실루엣은 사진기를 대는 곳마다 예쁜 엽서가 튀어 나올 정도로 아름답다. 넋을 잃고 있는 사이 어느덧 해는 수평선 위에 걸렸다. 인생과 꼭 닮은 태양은 그렇게 한 해의 추억을 간직한 채 넘어가고 있었다.
●●● 변산반도 일주 드라이브 코스 정보
▲ 널찍한 계화간척지. 한때 갯벌이었던 곳이 지금은 농경지가 됐다. |
변산반도 드라이브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외변산을 따라 해안을 돌아보는 코스다. 북쪽의 계화리부터 변산해수욕장, 고사포해수욕장, 적벽강, 채석강, 격포항, 모항, 곰소항 등 특색 있는 해안의 명소들이 30번 국도를 따라 이어져 있어 이동하며 돌아보기가 편리하다.
이 외에도 내소사를 비롯해 반계유형원선생유적지, 호벌치전적지, 개암사, 지석묘 등 역사의 한 획을 기록한 장소들이 곳곳에 산재해있다.
드라이브 코스를 잡을 때는 일몰을 어디서 볼 것인가를 먼저 정하는 것이 좋다. 일반적으로 채석강 일몰이 가장 유명하지만 전북학생수련원에서 솔섬을 배경으로 바라보는 낙조도 아름답다. 두 곳을 마지막 코스로 할 경우 남서쪽 해안에서 시작해 시계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이 좋다.
내소사 문화재관람료 성인 1,600원, 청소년 및 군인 700원, 어린이 400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