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에 로마가 있다면 동쪽엔 서안이 있다
서쪽에 로마가 있다면 동쪽엔 서안이 있다
  • 글ㆍ사진 박하선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 승인 2011.06.24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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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시성 서안

서안(西安)을 찾는다는 것은 곧 ‘역사와의 만남’이다.

시내는 물론이요, 근교의 도처에 우리를 놀라게 하고도 남을 만한 역사의 산물들이 지난날을 그리워하는 듯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그것들을 통해서 옛날에 살았던 인간들의 행위에 경이를 표시하기도 하고 비판을 가하기도 하면서 오늘의 현실에 안목을 가져본다는 데에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수많은 사적들은 주로 교외에 산재되어 있지만 시내에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몇 군데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성곽 밖 남쪽에 있는 대자은사(大慈恩寺)다.

이곳은 온통 당나라의 고승 현장의 발자취가 물씬 풍기는 곳으로 여기저기 현장의 인도 여행과 관련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7층 높이로 우뚝 솟아 있는 대안탑(大雁塔)이 가장 관심을 끈다.

이 탑은 천축국을 두루 여행하고 16년 만에 돌아온 승려 현장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그가 가져온 경전의 번역 작업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서역 기행기로서 당시 중앙아시아, 파키스탄, 인도 등지의 민족·지리·역사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과 인도 불교의 문화 교류 등을 축소해 기록한 그 유명한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도 이때 쓴 것이다.

서안의 상징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이 탑은 몇 차례의 전란을 겪으면서 다소 파손되기도 하고 여기저기 이끼들도 자라는 등 고색이 창연하지만 내부의 나선형 계단을 통해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다.

▲ 서안의 상징인 대안탑 일몰 풍경. 천축국을 두루 여행하고 16년 만에 돌아온 승려 현장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대자은사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또 하나의 우뚝 솟아 있는 탑이 있다. 현장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당나라의 고승 의정(義淨)을 위해 세운 소안탑(小雁塔)이 바로 그것이다. 의정 역시 뱃길로 천축을 여행했으며, 그 여행 기간이 무려 20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귀국시 그는 4백여 부의 경전을 가져와 이곳에서 번역 작업을 하였고,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이라는 명저를 남겼다.

이 소안탑은 서기 707년에 건조된 벽돌탑으로 원래는 15층이었으나 지진으로 상부 2층이 무너져 현재는 13층인데 역시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가 있다. 대안탑이 남성적이라고 한다면 이 소안탑은 여성적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처럼 서안 시내 곳곳에서 지난날을 살펴 볼 수가 있지만, 진정 엄청난 규모와 놀라움을 주는 것들은 대부분 교외에 흩어져 있다.

그 사적지들은 크게 동과 서로 나뉘어져 있는데, 동쪽에는 선사시대의 주거 흔적들을 비롯하여 화청지, 진시왕릉, 병마용갱 등이, 서쪽에는 건릉, 양귀비 묘, 영태공주의 묘 등이 대자연 속에 묻혀 있다. 어느 것 하나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운 곳이다.

▲ 진시황릉에 딸린 병마용갱. 세계 8대 경이 중 하나로 꼽히는 병마용들은 하나하나가 훌륭한 예술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역사의 경이로움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서쪽의 사적지들로 이어진다. 동쪽과는 달리 서안 시내에서 80km나 되는 제법 먼 거리에 떨어져 있어서 교통이 불편하다.
 
하지만 시끌벅적한 관광객들이 많지 않아서 오히려 차분하게 둘러보기에는 더 좋다. 이곳도 역시 온통 무덤이 구경거리다.

이 무덤들은 내부에 화려한 벽화들이 장식되어 있어서 서방국들이 암흑시대에 묻혀 있는 동안 중국의 문화예술이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 도달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흥미로운 곳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흥미를 끄는 곳이 17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뜬 영태 공주의 묘다.

입구에서부터 가파른 경사면을 이루고 있는 이곳은 꽤 긴 통로를 이루고 있는데 그 무덤 형태도 볼만하지만, 시녀들이 공주에게 시중을 들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 벽화들이 돋보인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왕릉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단연 건릉이다. 비행장 활주로같이 잘 닦여진 ‘왕족의 길’을 따라가면 양쪽에 거대한 석상들이 늘어서 있고 그 끝에 높다란 산이 버티고 있다.

이 산은 ‘양산’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당나라의 세 번째 황제였던 고종과 그의 야심에 찬 미망인 측천무후가 합장되어 있는 건릉이다.

▲ 예전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서안의 전통거리.

건릉은 산 중턱을 파고 들어가 그 속에 유체를 안장시킨 것으로 높이 1048m의 산 전체가 그대로 분묘가 된 셈이다. 그래서 이 건릉을 세계 최대라고 자랑한다.

그렇지만 이것 역시 아직껏 발굴하지 않고 있다고 해서 잔뜩 기대가 된다. 어느 고고학자가 한 얘기가 생각난다.

‘과거의 사실을 알아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의 기록이다. 하지만 그 역사의 기록에서도 알아낼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것이 바로 무덤이다.’

그만큼 무덤 발굴의 고고학적 중요성을 역설한 것인데, 하물며 이곳의 무덤들은 평범한 것도 아닌 왕족들의 무덤이니까 굳이 그 가치는 따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무튼 오랜 역사와의 만남이 한없이 이어지면서 그 경이로움은 더해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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