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에 문화를 입히다
농업에 문화를 입히다
  • 고아라 | 양계탁 사진기자
  • 승인 2022.06.1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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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언 '버라이어티 팜' 대표

첩첩산중 인제 곳곳에 따스한 햇볕이 스며든 어느 초여름, 싱그러운 연둣빛으로 물든 버라이어티 팜의 밭을 찾았다. 청정 자연에서 자라 티 없이 맑은 농작물만큼이나 앳된 얼굴의 농부, 오창언 대표를 만나 ‘요즘 농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28세 농부 오창언입니다. 고향인 인제에서 고추, 콩, 블랙커런트 등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고 있어요.

농사는 언제부터 시작했나요?
제 농업을 운영하기 시작한 건 23세부터입니다. 농업고등학교와 농업대학교를 졸업했으며 농사를 지으시던 부모님의 도움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어요. 다른 농업인에 비해 나이가 어리다 보니 부모님의 반대가 없었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저희 부모님은 ‘하고 싶으면 해 보라’는 반응이었어요. 농사를 지어보신 분들이라 수입이나 휴가 기간 등 농사의 좋은 점들을 알고 계셨거든요. 부모님은 다른 지역에서 농사를 하셨기에 기술과 노하우를 물려주셨고, 대출을 받아 땅을 구입해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다만 부모님의 세대에서 주먹구구식 농사를 지었다면 저는 사업적인 측면에서 다가서려 했어요. 방향은 다르지만 농사가 유망하다는 생각은 같았죠.

실전은 또 다를 것 같아요. 시행착오는 없었나요?
그런 에피소드를 떠올릴 때마다 첫 농사가 가장 먼저 생각나요. 당시 강원도에서는 거의 처음으로 초당 옥수수를 심었어요. 2017년이었으니 초당옥수수가 유행하기 전입니다. 일반 찰옥수수와 크게 다를 것 없다고 생각해 똑같은 방식으로 재배했다가 절반 정도 폐기했던 아픈 기억이에요. 게다가 초당옥수수는 수확하자마자 곧바로 소비자에게 팔아야 하기 때문에 예약을 받아 판매하는 것이 일반적이에요. 시간이 지날수록 단맛이 떨어지거든요. 그 사실을 몰랐기에 쓰린 맛을 봤죠. 그 이후에도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어요. 농업 초반에는 신기하고 특별한 작물들을 심었는데, 소비자 역시 신기해할 뿐 소비로 이어지진 않았어요. 결국 소비가 많은 작물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그런 시행착오에도 계속 도전했던 이유가 있나요?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수입입니다. 농업이 안정되니 또래 친구들 보다 수입이 큰 편이에요. 업무 스타일도 저에게 잘 맞아요. 한동안 열심히 일하고 나면 겨울인 4~5개월 동안 푹 쉴 수 있거든요. 여유가 되는 농민들은 이때 해외나 제주도로 여행을 가기도 해요. 저는 소유하고 있는 토지가 적은 편이라 동네 임차 농지를 구하러 다니기도 합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하루 종일 일하는 게 힘들긴 하지만 그만큼 긴 휴식 기간이 주어지는 거죠. 또한 ‘제’ 농사인 만큼 작물이 잘 자라지 않거나 실수가 있어도 스스로 반성하고 개선하면 되니 마음이 편해요.

운영하고 있는 <버라이어티 팜>의 이름이 독특해요.
여러 가지 의미와 목표가 담긴 이름이에요. 다양한 농작물을 재배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청년층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서이기도 해요. 또한 기업화된 농장과 해외 수출을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에 버라이어티 팜이라는 이름을 지었어요.

인제는 산지가 많아 농사가 쉽진 않을 것 같아요.
인제는 전국에서 산림면적이 가장 큰 도시에요. 인제의 산은 주민들의 삶과 긴밀히 연결돼 있습니다. 산나물을 비롯한 다양한 먹거리를 내어주고 이를 팔아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죠. 제가 짓는 농사도 산골에서 이루어져요.
비록 경사가 심해 불편하고 척박한 환경이지만 그에 따르는 이점도 있어요. 전국 물량의 50%를 차지하는 인제의 대표 특산물 ‘여름 노지 풋고추’가 그 예에요. 인제는 산의 골이 커 골을 따라 흐르는 골바람 덕에 한여름에도 선선한 기온이 유지되거든요. 풋고추의 경우 기온이 높으면 작물이 다 자라기도 전에 딱딱해져서 상품가치가 떨어져요. 인제는 한여름에도 선선하니 풋고추가 자라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죠. 또 다른 특산물인 콩과 제가 지금 재배 중인 블랙커런트도 마찬가지고요.

블랙커런트는 낯선 이름이에요.
블랙커런트는 전국에 재배하는 곳이 몇 없는 농작물이니 이름이 낯선 것도 당연해요. 처음 농사를 시작했을 때 신기한 작물이나 신품종에 관심이 많았는데, 낯선 작물에 대한 소비자의 호기심이 구매로 이어지진 않았어요. 농업도 사업이다 보니 수입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리스크가 컸죠. 다행히 베리 종류 중 하나인 블랙커런트는 맛이 좋아 인기가 꽤 있었어요. 선선한 인제 기후에도 잘 자랐고요. 인제는 보통 한겨울에 영하 20~30도까지 떨어지는데 일반 열매들은 이 계절을 나기 힘들거든요. 쉽게 죽어버리거나 이를 막기 위해 일일이 감싸는 조치가 필요하죠. 반면 블랙커런트는 아무리 추워도 잘 자라요.

‘농업이 위기’라는 말에 대해선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요?
농사 인력이 줄었다든지, 농산물 소비량이 줄었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들려온 지는 이미 오래됐어요. 그 때문인지 농촌이나 농사에 대해 안쓰럽게 보는 시선이 많은데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제 생각엔 대농이 많아져야 농촌과 농업 환경이 개선되고 인식도 더 나아질 거라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소농 정책 때문에 300평만 있어도 농업인으로 인정받아 다양한 혜택을 받을 수 있어요. 그러다 보니 큰 땅이 작게 나뉘는 거죠. 300평이라고 하면 크게 느껴지지만 사실 수입이 나기 힘든 텃밭 수준의 크기거든요. 큰 식품 기업들이 우리나라 농산물 대신 외국 농장의 농산물을 사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소농이기 때문에 한 농장의 수확량이 현저히 적고 여러 농장에서 구입하면 같은 작물이라도 농장마다 상태가 제각각입니다. 게다가 가격도 비싸지고요. 외국의 대농장에서 한 번에 구입하는 것이 훨씬 이득인 겁니다. 대농이 많아지면 식품 기업과 파트너십을 맺을 수 있고, 소비자도 안정적인 가격으로 농산물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국내 1호 농튜버’로도 이름을 알렸어요. 농업 크리에이터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농사를 짓는 것에 대한 안쓰러운 시선이나 부정적인 인식이 못마땅하게 느껴졌어요. 흔히 농부는 가난하고, 농사는 고된 일이라는 편견이 있잖아요. 농업은 식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가장 중요한 산업 중 하나이고, 제가 일하고 있는 분야인 만큼 자부심도 컸거든요. 그러다 농업에 문화를 입혀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고민하던 차에 당시 뜨고 있던 1인 미디어에 눈길이 갔습니다. 당시에는 농사와 관련된 콘텐츠가 없었어요. 혼자 유튜브 강의 영상을 공부하며 콘텐츠를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농산물을 구입하는 소비자들에게 더 많은 정보를 드리고 싶다는 생각도 컸어요. 우리나라 농산물은 판매 형태가 단순한 편이에요. 감자로 예를 들어보자면, 구이용, 조림용, 뇨끼용 등 다양한 감자가 존재해요. 종자도 모두 다르고요. 요리에 맞는 감자를 구입해야 하는데 마트에는 딱 한 종류의 감자만 판매하니 어떤 요리든 그 감자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거죠. 농부들은 수요가 있어야 생산을 하는데, 소비자들에게 이러한 정보가 없으니 수요 자체가 없습니다. 제 유튜브 채널을 통해 이런 정보를 전달하고 식문화가 개선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어요.

유튜브 채널이 큰 인기를 얻었어요. 비결이 있다면?
처음에는 농사와 관련된 콘텐츠를 주로 올렸는데, 서울에 있는 한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저의 평범한 일상이 또래의 도시인들에게는 신선하게 느껴진다고요. 그 후 카테고리를 확장해 농부로서의 일상과 농사 꿀팁, 농기계 리뷰 등 다양한 콘텐츠를 제작했고 감사하게도 반응이 좋았어요. 이후 많은 농튜버가 등장하고 관련 콘텐츠도 다양해졌어요. 운영하는 농업 규모가 커지면서 시간이 부족해져 요즘은 활동을 못하고 있어요. 제 몫을 다했다는 생각도 조금 들고요.(웃음)

크리에이터로서의 활동이 개인적으로 도움이 된 부분도 있나요?
물론입니다. ‘국내 1호 농튜버’로서 이름이 알려진 덕분에 방송 출연 기회가 많았어요. 올해도 <아침마당>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했습니다. 시청자와 제가 마주치는 분들의 나이대가 중장년층이다 보니 많이 알아봐 주시고 한 마디라도 더 걸어주세요. 어르신들의 따뜻한 응원의 말씀이 큰 힘이 됩니다.

대표님을 보고 농업에 도전하는 젊은 사람들도 많을 것 같아요.
농사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일반 사업보다 훨씬 많은 자본이 필요합니다. 작물에 따라 보관이 필요한 경우에는 갖춰야 되는 기반도 넓어지고요. 하지만 무엇보다 제대로 된 사업계획서가 있어야 해요. 생산을 잘하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이거든요. 일의 양도 엄청나고요. 작물마다 자랄 수 있는 밭이 다르고 재배 방법도 달라요. 수확, 판매 기간도 천차만별이니 완벽한 준비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시작하려 한다면 꼭 다른 농장에서 일해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농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머리’입니다. 일머리가 없으면 일의 양이 늘어나고 몸이 다치기도 해요. 원하는 작물을 재배하는 농장 여러 곳에서 일하다 보면 일머리가 생겨요. 요즘에는 일하고 싶은 지역의 농업기술센터에 문의하면 농장과 연결해 주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어요. 어떤 할아버지는 이런 말을 했어요. ‘나는 50년간 농사를 지었지만 아직 50번밖에 농사를 지어보지 못했다.’ 농사라는 게 1년 주기이기 때문에 정말 신중해야 합니다.

앞으로 어떤 농부, 어떤 삶을 꿈꾸나요?
우리나라의 가장 큰 산업이 농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오르는 국내 농업 브랜드가 있는지 물으면 아무도 대답하지 못해요. 대표적인 농업 브랜드가 없는 거죠. 뉴질랜드의 제스프리처럼 가공이 아닌 생산으로 우뚝 설 수 있는 한국의 농업 브랜드를 만들고 싶습니다.
당장 올해에는 고춧가루 브랜드를 시작하려고 해요. 인제는 풋고추 주산지이지만 전량이 도매로 가기 때문에 가격이 불안정한 편이에요. 저렴하면 10kg에 1만 원대부터 비싸면 10만 원대까지 형성돼요. 또한 전문 인력이 필요할 만큼 수확하는 방법이 까다로워요. 길이, 경도, 색깔에 따라 매일 수확이 달라집니다. 반면 홍고추는 누구나 딸 수 있어요. 우리나라는 김장 문화가 살아있어 1년에 한 번 좋은 고춧가루를 사는데, 한 번 산 고춧가루가 1년의 음식 맛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에 조금 비싸더라도 품질과 맛이 좋은 것을 골라요. 그런데도 대표할 만한 고춧가루 브랜드가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어요. 브랜딩에 힘쓰기 보다는 좋은 품질로 오프라인 시장부터 도전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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