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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간섭이 사라진 자리, 고창 운곡람사르습지
인간의 간섭이 사라진 자리, 고창 운곡람사르습지
  • 고아라 | 양계탁 사진기자
  • 승인 2022.04.2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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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운곡람사르습지 트레킹

사람의 발길이 끊긴지 30년. ‘버려진 땅’이라 불렸던 운곡 일대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메마른 대지에 물이 스며들고 생명의 숨결이 도란도란 피어나 거대 자연 습지를 이룬 것. 스스로 치유를 끝낸 자연의 얼굴에 비친 강인한 생명력이 인간의 감탄을 자아낸다.


30년의 기적
람사르습지는 람사르협회가 물새 서식지로서 중요한 습지보호에 관한 협약인 ‘람사르협약’에 따라 전 세계를 대상으로 중요성을 지닌 습지를 지정해 보호하는 곳을 말한다. 람사르협약 제1조에 따르면 습지는 연안습지, 내륙습지, 인공습지로 나뉘며 썰물 때 수심이 6m를 넘지 않는 바다지역과 논 습지도 등록이 가능하다. 세계에서 가장 큰 습지는 브라질의 ‘판타날 습지’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지정돼 있다. 2021년까지 람사르협회에 등록된 우리나라의 습지로는 대암산 용늪, 창녕 우포늪, 신안 장도 산지습지, 순천만·보성갯벌, 제주 한라산 1100고지 습지, 그리고 전북 고창운곡습지 등 총 24곳이 있다.
국내에서는 16번째로 등록된 고창의 운곡람사르습지는 보전 가치가 매우 높은 서식지로 꼽힌다. 오베이골에 형성된 이곳은 원래 주민들이 습지를 개간해서 사용한 계단식 논이 있던 자리인데, 1980년대 운곡저수지의 물이 원자력발전소의 냉각수로 공급되면서 30년 넘게 버려져 있었다.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마을 사람들도 모두 떠났다. 인간이 손길이 닿지 않으니 마냥 방치되어 있을 줄 알았던 운곡습지는 30년 후 모두를 놀라게 했다. 자연 스스로 치유 과정을 거치며 원시 습지 상태로 복원된 것. 인공적인 시스템이나 오염원이 없으니 자연스레 환경과 물이 깨끗해졌고,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거나 멸종위기를 맞은 야생동식물이 서식하기 시작했다. 현재 수달, 삵, 말똥가리, 붉은배새매, 황조롱이, 낙지다리 등이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걸어서 청정 자연 속으로
고창 운곡람사르습지는 총 4개의 생태탐방코스로 구성돼 있다. 1코스는 고인돌유적지에서 출발해 오베이 골을 따라 운곡람사르습지에 이르는 3.6㎞의 길로, 50분 정도 소요된다. 2코스는 운곡저수지 주변을 따라 한 바퀴 돌면서 안덕제, 운곡서원, 운곡습지 생태공원, 소망의 종, 조류관찰대, 생태동병, 용계마을, 수병경관 쉼터 등을 두루 거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총 9.5㎞ 길이로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3코스는 4가지 코스 중 가장 긴 10.2㎞로 총 3시간 30분 이상 소요된다. 1코스와 마찬가지로 고인돌 유적지에서 출발해 화암봉, 행정치, 옥녀봉, 호암재, 호암봉, 전망대, 백운재, 무재등, 화시봉 등 주요 산봉 우리와 능선을 지나 운곡습지 생태공원에 이르는 코스다. 4코스는 운곡람사르습지 입구의 탐방안내소에서 시작해 용계리 청자요지, 굴치농원, 전망대, 안덕사 옛 터, 물맞이 폭포, 백운재, 동양최대고인돌을 거쳐 운곡습지 생태공원에 닿는 길이며 10.1㎞로 2시간 50분 정도 소요된다.
저수지와 습지, 고인돌 유적지까지 모두 돌아보고 싶어 하나의 코스를 고르기 어려웠지만 모두 둘러보기엔 시간과 체력이 부족했다. 고민 끝에 공원에서 운영하는 탐방열차를 타고 운곡 저수지를 지나 2코스의 절반인 운곡습지 생태공원에 내린 후 1코스를 통해 습지를 지나 고인돌 유적지에 이르는 코스를 계획했다. 주요 스폿은 모두 둘러보면서 시간도 절약할 수 있는 새로운 코스를 개척하고 나니 시작부터 발걸음이 가볍다.


운곡람사르습지 입구에 들어서자 탐방안내소가 등장하고, 그 옆으로 탐방열차 티켓을 살 수 있는 무인발매기가 놓여있다. 편도와 왕복 중 선택할 수 있지만 우리는 중간에 내려 트레킹을 하기로 했으니 편도 티켓을 구입했다. ‘수달열차’라고도 불리는 탐방열차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한 시간 간격으로 운행하니 시간을 잘 맞춰오는 편이 좋다. 잠시 뒤 운곡저수지를 달리는 기다란 열차가 등장했다. 열차 전면에 귀여운 수달 얼굴이 환한 웃음으로 방문객을 맞이한다. 열차는 달콤한 봄바람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속도로 운곡 저수지 주변을 빙 두르듯 달렸다. 마지막 열차에 탑승한터라 어느덧 해가 저수지 건너편으로 기울고 있었다. 너무 늦은 시간에 온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붉게 물든 저수지의 잔잔한 풍경을 보고 있자니 이시간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한적하고 아늑하면서도 황홀한 저수지의 자태에 푹 빠져있는 사이 열차는 어느덧 운곡습지 생태공원에 닿았다. 1, 3, 4코스가 마무리되는 지점에서 우리는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한다.


가이드가 일러준 대로 숲이 우거진 곳을 향해 걸어 들어가니 나무 데크로 된 운곡습지 탐방로가 나타났다. 자연 그대로의 습지 위를 걸어야 할까봐 걱정스러웠는데, 말끔히 정돈된 길이 있어 편하게 트레킹을 즐길 수 있었다. 더욱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운곡습지의 맨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방엔 제각각으로 자란 나무와 풀들이 무성하게 엮여 마치 방금 자다 일어난 얼굴 같기도 하다. 도시에서 일렬로 늘어선 나무와 말끔하게 정돈된 가지들만 보다가 원시림을 보고 있으니 마치 금단의 땅이라도 밟은 듯 기분이 묘하다. 서로가 서로를 붙든 가지 사이로 비스듬히 쏟아지는 한줄기의 햇빛은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20분쯤 걸었을까. 갑자기 데크의 양 손잡이가 사라지고 탁 트인 습지가 나타난다. 난생 처음 보는 야생화가 지천에 흐드러지고 이미 땅 아래로 기운 해가 간신히 붉은빛을 뿜어내고 있다. 문득 누군가 운곡람사르습지를 ‘강인한 생명력이 움트는 곳’이라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곳에 우두커니 서 있으니 너무나 고귀해 아무 곳에서나 뿌리를 내릴 수 없던, 혹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더욱 간절했던 생명력이 절실히 전해진다. 묘한 분위기에 취해 한참이나 머물러 있다가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에 걸음을 재촉한다.


습지가 끝나는 곳엔 한눈에 가늠할 수 없는 넓은 평야가 나타났다. 하늘의 별처럼 평야 위엔 곳곳에 돌이 떠 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거대한 바위였다. 이 바위로 가득한 평야가 바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유산이자 우리나라 최대 고인돌군이다. 청동기 시대의 무덤이자 거석 기념물인 고인돌은 전 세계에 분포해 있는데 유독 암석 지형이 협소한 고창 지역에 총 1500여 기가 분포하고 있다는 점이 의문스럽다. 고인돌이 밀집해 있다는 것은 청동기 시대에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이었다는 것, 즉 사람들이 살기 매우 좋은 환경이었던 것이다. 고창 지역은 비옥한 토양을 품고 있어 농사를 짓고 살기에 최적지였다. 그 덕에 지금까지도 고품질의 수박과 땅콩, 복분자 등이 생산되고 있으며 고창 지역의 특산물로서 명성을 얻고 있다.
인간이 묻힌 바위 위로 책에서도 본 적 없는 꽃이 피고, 정면에서 사라지는 줄 알았던 해의 자취는 땅 아래로부터 감지된다. 청동기 시대엔 현대인들이 보기에 낯선 것보다 더 독특하고 재밌는 얼굴을 한 동식물들이 인간과 한데 어우러져 살지 않았을까. 이곳에 있으니 자꾸만 상상이 수 천 년을 거스르게 된다. 운곡습지가 원시의 습지로 복원되는 데에는 인간의 간섭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말에 은은한 아픔을 느끼며 트레킹의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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