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년 세월을 품은 간장
370년 세월을 품은 간장
  • 고아라 | 정영찬
  • 승인 2022.03.11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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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순도 전통장 명인

사람은 옛 맛을 기억한다. 좋은 물과 좋은 콩, 정성으로 담근 기순도 명인의 장은 370년을 이어온 전통 방식으로 완성된다. 흔한 식재료인 만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간장이건만, 국내외 수많은 미식가들이 ‘기순도 간장’을 찾는 이유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방한 당시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렸던 국빈 만찬에 한우갈비구이가 올랐는데, 소스로 사용된 360년 씨간장이 큰 화제를 모았다. 외신에서 ‘미국보다 오래된 간장’이라 앞다퉈 소개한 씨간장의 정체는 무엇일까. 씨간장의 주인, 기순도 명인이 있는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의 작은 시골 마을로 달려갔다. 소나무와 대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싼 ‘기순도’에 들어서자 고즈넉한 한옥 여러 채와 1200여 개의 항아리가 한 폭의 수묵화처럼 펼쳐진다. 곧이어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명인이 직접 만든 따뜻한 식혜를 내어준다. 한입 들이켜자 꽃샘추위에 움츠러들었던 몸이 노곤하게 풀어진다. 설탕을 넣지 않은 조청으로 만든 식혜는 달달하면서도 담백해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손에서 내려놓기 어렵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전남 담양 장흥 고씨 양진재 문중의 10대 종부이자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35호 기순도입니다.

언제부터 간장을 담기 시작했나요?
시집오면서 시어머니가 알려주신 방식대로 간장을 담기 시작했어요. 당시엔 집집마다 간장을 담갔기 때문에 흔한 일이었죠. ‘간장 맛이 변하면 집에 우환이 든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어느 집이나 간장을 중요하게 여기던 때거든요. 처음에는 식구들끼리 먹을 간장만 만들었는데, 우리 집 간장 맛이 좋으니 상품화해보라는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더 만들기 시작했어요. 수요에 따라 열심히 담그다 보니 벌써 51년째네요. 장이 담긴 항아리도 어느새 1200개를 넘겼습니다.

장을 담그는 과정이 궁금해요.
모든 일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때’가 가장 중요해요. 선조들이 해 온 것처럼 동짓달에 메주를 끓이고 섣달에 메주를 발효시켜 정월에 장을 담가야 가장 좋은 맛이 나요. 좋은 재료를 사용하는 것은 기본이고 정성도 들여야 합니다. 장을 담그기 전, 장이 잘되기를 바라며 제를 올린 후 메주를 씻고, 죽염과 물을 섞어 염도를 맞춰요. 이렇게 만든 물을 항아리에 붓고 메주를 넣은 다음 고추, 숯, 대나무 등을 올리고 뚜껑을 닫습니다. 이 상태로 최소 1년은 기다려야 장이 완성돼요.

1년이 지나면 비로소 ‘기순도 전통 간장’이 되는 건가요?
전통 간장이라 하면 국간장, 짠간장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숙성기간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간장의 종류가 나뉘어요. 숙성기간이 1년인 간장은 ‘청장’이라고 불리는데 맑고 연한 색을 띱니다. 짠맛이 덜하고 자극적이지 않은 담백한 맛이에요. 보통 소고기 뭇국이나 콩나물국, 오이냉국처럼 맑은 요리에 쓰입니다. 숙성기간이 2~3년쯤 되면 ‘중간장’이라고 불러요. 청장보다 색이 진하고 감칠맛과 단맛이 더해지죠. 미역국, 불고기, 잡채 등을 만들 때 쓰입니다. 숙성기간이 5년을 넘어가면서부터는 색이 검고 향이 깊은 ‘진장’이 돼요. 짠맛이 적은 반면 감칠맛과 단맛은 높으며 육포, 약식, 보양식 등의 요리에 사용됩니다.

장을 담글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있나요?
장을 담그는 일에는 연습이 없어요. 일 년에 한 번 담그면 그걸로 계속 먹어야 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좋은 콩과 좋은 물, 정성, 손맛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죠. 간장을 만들 때 국내산 콩 중에서도 가장 품질이 좋은 것을 골라 쓰고 천일염을 구워 만든 죽염과 맑은 물을 사용합니다. 보통 간장을 만들 때 소금을 사용하는데, 저는 건강에 좋고 깊은 맛도 내는 죽염을 써요. 장이 잘 되기를 바라며 제를 올릴 때도 특별히 신경을 씁니다. 좋은 날을 받아 메주를 끓여요. 정성이 더해져야 깊은 맛이 완성된다고 믿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노고가 전해져요. 51년째 장을 담그고 있는데,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없나요?
장을 그만 담근다는 것은 저에게 그만 산다는 것과 같아요. 평생을 바쳐온 일이기도 하고 우리 집 간장을 찾는 분들을 보면서 보람과 감사를 느끼거든요. 돈을 주고 간장을 사 가면서 오히려 저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한 손님도 있었어요. 그런 말들이 큰 원동력이 됩니다. 덕분에 정성과 시간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장을 담고 있어요.

그래도 1200여 개의 항아리를 관리한다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아요.
특히 요즘에는 기온이 높아지면서 맛을 보존하는 게 어려워졌어요. 항아리가 마당에 있으니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거든요. 옛날 선조들이 해가 뜨거운 여름이면 항아리 사이사이에 봉숭아 나무를 심어서 그늘을 만들어 온도를 조절했다는 얘기를 듣고, 따라 심었어요. 다행히 그늘 덕분에 뜨거웠던 항아리의 온도가 차츰 내려갔죠. 선조들의 지혜에 다시 한번 감탄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 방한 당시 ‘360년 된 간장’으로 씨간장이 화제가 됐어요.
2017년에 청와대에서 트럼프가 태어난 해인 1946년에 담근 간장이 있는지 문의가 왔어요. 안타깝게도 정확히 그해에 담근 간장이 없어 처음에는 거절했죠. 비슷한 시기에 담근 간장을 내놓을 수 없으니까요. 그러다 한국의 전통 간장을 알릴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 10대째 내려오는 씨간장을 전하게 됐습니다.

간장은 흔한 식재료 중 하나인데, 씨간장은 어떻게 다른가요?
씨간장은 장흥 고씨 가문에서 370년째 전해 내려 오는 가보와 같은 간장이에요. 외부로 나간 적은 거의 없고, 집안에서도 제사 등 중요한 날에만 사용해요. 매년 혹은 몇 년에 한 번씩 직접 담근 간장 중 가장 좋은 진장을 첨장해 떨어지지 않도록 보관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줄어든 간장에 새로 담근 간장을 더하는 것을 첨장이라고 하는데, 오래 숙성된 간장에 햇간장을 더하면 맛이 더욱 깊어져요. 집집마다 간장을 직접 담그던 시절의 맛을 아는 사람들은 씨간장을 약이라고 말할 만큼 귀한 물건입니다.

이후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어요.
2002년 신세계백화점에 입점하면서 일반 판매를 시작한 후 롯데백화점, 현대백화점 등을 비롯해 프리미엄 마트인 SSG청담마켓, 마켓컬리, 헬로네이처 등에 납품하며 이름을 알렸습니다. 2017년 트럼프 대통령 방한 당시 씨간장이 알려진 후로는 해외에 전통장을 소개할 기회도 많아졌어요. 2018 파리 국제 식품박람회에 참여했고, BTS 파리 K-팝 공연 때 열린 VIP 시식회에도 간장 소스로 만든 한국 요리를 선보였습니다. 이후 프랑스 최초의 백화점인 르봉 마르셰와 갤러리 라파예트에 입점했고, 해외의 미슐랭 스타 셰프들의 방문도 늘었습니다.

인기 비결이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근본적으로는 ‘건강한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증가한 덕분이라고 봐요. 간장이야말로 1년의 수고를 감내해야 완성되는 슬로우 푸드니까요. 발효식품인 만큼 맛도 건강에도 좋아요. 간을 낼 때 짠맛만 내는 소금 대신 다양한 감칠맛이 어우러진 간장을 사용하는 사람도 많아졌어요. 거주 형태가 아파트로 변화하면서 장문화가 사라졌으니 저처럼 시골에서 전통 방식으로 담그는 간장이 귀해진 게 아닐까요. 해외의 인기 역시 K-문화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이 커진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BTS처럼 K-팝을 이끄는 아티스트들 덕분에 K-음식도 세계에 알릴 기회가 많아진 거죠.

ⓒ기순도

훌륭한 맛도 한몫했을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웃음) 감사하게도 집에서만 먹던 간장이 입소문을 타고 여기까지 오게 됐으니까요. 따로 홍보도 하지 않았어요. 손님이 오면 내주는 식혜도 마찬가지예요. 대접하기 위해 직접 담근 조청으로 식혜를 만들었는데, 맛이 좋아 찾는 사람이 많다 보니 판매까지 하게 됐습니다.

앞으로의 목표나 계획이 있다면?
코로나19 이전에 이화여대 식품 전공 학생들에게 강의를 했던 적이 있어요. 강의라고 할 것도 없이 그저 간장으로 한식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줬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간장이 이렇게 많은 요리에 쓰이는지 몰랐다고 하더라고요. 한국의 전통을 이어갈 미래의 전문가들에게 한식에서 간장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직접 보여주진 못하지만 더욱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화상 회의 같은 비대면 강의 방식을 통해 제대로 된 한국의 전통장을 알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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