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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부인, 문밖으로 일탈하다
자유부인, 문밖으로 일탈하다
  • 김혜연 | 김혜연
  • 승인 2021.12.17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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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거창 비계산 하이킹

과도한 업무, 지친 일상, 반복되는 스트레스로부터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일상탈출이 필요했다. 어머니 또는 아내로의 야무진 업무를 해내고 있는 유부녀들의 하룻밤 일탈이다.

땀은 뻘뻘 나는데, 산행은 시작도 안 했다
자유부인들의 목적지는 경상남도 거창의 비계산이다. 산세가 마치 닭이 날개를 벌리고 날아가는 것처럼 보여 이름 붙여졌다는데, 일상으로부터 훨훨 달아 나고 싶은 우리의 열망을 담은 것 같다.

시작은 거창군과 합천군의 경계 지점이자 수도지맥 3, 4구간의 일부인 산체지고개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비계산, 길 건너는 두무산으로 향하는 들머리가 나오니 표지판을 잘 확인하고 시작하면 좋겠다. 도로 옆으로 나 있는 들머리는 초입부터 고개를 쭉 빼고 올려다보아야 그 끝이 보일 정도로 급경사이니 조심하는 게 좋다.

서울에서 출발한 탓에 시간은 벌써 점심시간이 훌쩍 넘었다. 서둘러 준비하고 산행을 시작했다. 따뜻한 햇볕과 포근한 날씨 덕분일까. 몇 걸음 떼자마자 땀방울이 맺힌다. 땀 한 방울에 육아, 또 한 방울에 가사로 받은 스트레스가 흘러내리기 바라면서 꾸준히 오른다.

숨이 가빠질 때쯤 능선에 닿고 또다시 조금 이동하자 갈대밭 구릉지가 나오고 그 앞에 비계산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나타났다. 우리는 산행을 시작한 게 아니었다. 비계산으로 향하기 위해 언덕을 넘어 온 것뿐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옛말이 있는데 옛말도 다 맞는 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투정 섞인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푸른 하늘에 병풍처럼 드리워진 탄탄한 비계산을 마주하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눈앞에 아름다운 산세를 그림 삼아 하루를 보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야 한다. 아직 우리에겐 갈 길이 멀다.

이제부터 제대로 된 산행의 시작이다
산길을 서로 의지하며 올라간다. 풀을 헤치고 아슬아슬한 흙길을 지나고 올록볼록 바위를 지난다. 중간중간 나무 사이로 건너편 능선과 잘 다져진 골프장 필드를 감상하는 건 보너스. 길이 순탄하지 않으니 바닥에 집중하면서 열심히 걷고 있는데 눈앞에 큰 너덜겅 지대가 나타났다. 호기롭게 ‘여기로 올라가 볼까?’ 하는 너스레를 떨며 잠시 휴식을 하고 있는데, 풀숲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혹시 산짐승이라도 나타날까 흠칫 겁이 났다. 칼 군무처럼 셋이 동시에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눈에 들어 온 것은 흰털에 까만 눈을 가진 강아지 한 마리였다. 그리고 그 녀석 뒤로 경계의 눈빛을 한 아기 누렁이가 보였다. 가까이 가서 귀여워해 주고 싶었지만 잠시 눈을 돌린 사이 신기하게 또 사라져버린 녀석들. 부디 떠돌이 강아지가 아니라 마을에서 산책 나온 아이들이 길 바라면서 산행을 이어간다.

등산로는 탄탄한 흙길과 원시림 같은 숲길의 연속이며 숲길 중간에 쓰러져있는 나무도 한껏 숲의 멋을 더했다. 어느새 우리 일행은 자유부인 둘과 나, 그리고 아까 사라졌던 멍멍이 둘, 총 다섯이 되었다. 시크한 표정으로 일정 간격을 유지하며 뒤따라오던 강아지들은 우리가 힘겹게 오르막을 오를 때면 우리에게 지름길이라도 알려주듯 바삭바삭 낙엽을 밟으며 숲으로 사라졌다가 또 어느새 뒤에 서 있던 이 녀석들 덕에 목까지 차오른 숨도 잊은 채 깔깔깔 웃음 짓게 만든다.

얼마간 숲길이 이어지고 바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하늘이 트였다. 그리고 우리 앞에 거대한 암릉이 나타났다. 오랜만에 익사이팅한 산길을 만난 두 자유부인은 환호했다. 자녀들 조심시키느라 안전한 꽃길만 걸었을 테지만 오늘은 고삐가 풀렸다. 그 어느 때보다 재미있게 암릉 구간을 지나온다. 물론 안전은 기본이다.

암릉 미션을 패스했다면 다음은 밧줄 잡고 절벽 내려가기 차례다. 마치 유격훈련을 받는 군인들처럼 씩씩하게 절벽 미션도 완벽히 마무리했다. 정비가 안된 등산로의 밧줄들은 오래되면 삭는다. 마치 동화에 나오는 썩은 동화 줄처럼 말이다. 그래서 탄탄하지 않은 낡은 밧줄을 잡아야 할 때는 밧줄의 상태를 먼저 당겨본 뒤 체중을 싣는 것이 좋다.

고난도 코스를 통과하자 이번엔 오르락내리락 체력 단련 코스가 이어진다. 나뭇잎들이 떨어진 산길은 서두르지 않고 조심히 걸어야 한다. 낙엽이 젖거나 낙엽 아래 얼음이 얼어 미끄러울 수 있기 때문에 한겨울뿐만 아니라 겨울에 가까워진 늦가을이나 초봄까지는 항상 스틱을 지참해 산행하고 아이젠을 준비해야 한다. 즐거운 산행의 준비물은 항상 안전이니까.

체력 단련 후에 만난 정상
드디어 비계산 정상이 우리를 반긴다. 늦게 시작한 탓에 해는 벌써 건너편 산과 하이파이브를 할 듯 내려와 있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산은 두 얼굴을 보여줬다. 한없이 포근했던 바람이 차갑고 매섭게 바뀌었고 입김도 나기 시작했다.

서둘러 잠자리를 마련했다. 협소한 공간 탓에 모든 것이 빼뚤었지만 자유부인의 밤은 행복 그 자체다. 그러나 엄마들의 전화기는 수시로 울렸다. 수화기 너머로 남편들의 애정 가득한 걱정이 이어진다. 왠지 모를 패배감이 느껴졌지만 나는 따뜻하게 나를 보호해줄 침낭과 핫팩이 있기 때문에 괜찮다. 내 편인 침낭과 핫팩 덕에 무사히 밤을 보내고, 나무 사이로 일출을 감상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은 비계산을 지나 마장재를 거쳐 우두산 들머리로 하산할 예정이다. 머문 흔적 없이 정리하고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화창하기만 한 하늘과 함께 자유의 날 2일 차를 시작한다.

어제의 숲속 탐험과 달리 오늘은 시원시원한 능선이 자유부인을 반긴다. 아직 겨울 준비를 못 한 산등성이들은 지금 알록달록해도 되는지 마는지 대략 난감해 하는 듯하다. 늦어도 괜찮으니 마음껏 뽐내다가렴.

작은 바위를 하나 디디고 올라섰는데 바위 옆 쌓인 낙엽 사이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등산 스틱만 한 길이의 뱀이 유유히 지나가고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을 친 것이 무색하도록 그냥 제 갈길을 가던 뱀. 이 녀석도 느긋한 가을을 더 즐기려고 겨울잠에 들어가지 못한 한량이리라.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처럼 뱀 보고 놀란 가슴 나뭇가지 보고도 놀랐다. 어제는 바위에, 오늘은 뱀에 스릴 넘치는 산행이 계속된다. 그러다 마장재의 황금 물결이 고스란히 내려다보이는 능선 끝에 섰다.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과 아쉬움이 함께 공존하는 시간이다.

가파른 내리막을 길게 지나 마장재에 닿았다. 가을 끝이라 억새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지만 봄철에는 철쭉이 만발하는 군락지라 하니 봄에 다시 찾아도 좋을 것 같다. 짧은 하산 후 우두산 고견사 주차장에 닿으며 자유부인의 일탈은 막을 내린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하루를 살았을 엄마들이 오롯이 내가 되어 자연에 머물고 충전하여 일상으로 돌아갔기를 바란다.

Sleep Outside! Have Fun 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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