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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서울의 민낯을 걷다
을지로, 서울의 민낯을 걷다
  • 이지혜 | 정영찬
  • 승인 2020.12.1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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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와 함께한 을지로 도보 여행

한국의 근대화를 이룬 산업시설이 밀집되어 있는 서울시 중구 을지로는 조명, 공구, 미싱, 타일, 신발, 가구 등 다양한 산업 분야의 근대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면서, 동시에 지금 서울에서 가장 ‘힙’한 장소다. 을지로 특화 골목과 문화유산, 곳곳에 숨겨진 ‘레트로’한 흔적을 따라 걸었다.

을지유람’으로 즐기는 진짜 을지로
우리는 흔히 을지로 지역을 지하철 을지로입구역에서 을지로4가역까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확히 을지로는 서울시청에서 동대문 DDP에 이르는 2.74km의 거리를 칭한다. 광복 후 일제식 명칭을 개정하며 우리 명장의 이름을 따서 길을 새로 지정하던 시절, 을지문덕 장군의 성에서 유래됐다. 역사적으로 조선시대부터 을지로에는 많은 관아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그 흔적은 지금도 을지로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 때 도심 재창조라는 시대의 흐름에서 밀려나기도 했지만, 재정비촉진계획 등을 통해 지금은 그 어느 지역보다 밀레니얼 세대의 발길이 늘고 있다.

‘을지유람’은 서울시가 을지로 골목골목에 숨겨진 곳들을 탐험하는 여행으로 기획한 프로그램이다. ‘못 만드는 것이 없다’던 을지로의 산업 이야기, 오랜 전통을 지켜온 맛집, 변화를 시도하는 젊은 예술가들의 활동 등 골목을 탐험하는 도시 여행이다. 도심 재창조 계획 속에 언제 변화될지 모를 을지로를 자세히 보고자 했던 시민과 관광객은 을지로에서 해설사와 함께하는 을지유람을 신청해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된다. 하지만 골목 바닥이나 전봇대 곳곳에 을지유람 코스 표지판이 잘 붙여져 있어, 투어를 신청하지 않아도 충분히 을지유람을 즐길 수 있다.

을지유람은 1, 2코스로 나뉘어져있는데 약 5년 전 을지로 3가역 3번 출구에서 시작된 을지유람 1코스는 타일·도기 특화거리를 거쳐 을지로 노가리골목, 세운청계대림상가, 을지로 청년예술창작공간에서 마무리된다. 2코스는 을지로 4가역 6번출구에서 시작해 방산시장을 거쳐 성제묘, 염초청터를 지나 방산종합시장, 미싱특화거리, 조각특화구역을 지나 세운청계상가, 조명특화거리에서 마무리되는 코스다. 1코스는 주황색, 2코스는 파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1코스와 2코스에서 겹치는 구간도 있지만 각자의 매력이 모두 달라 두 코스 모두 즐기는 것도 추천한다.

과거의 흔적과 변화의 공존
을지유람 1코스의 시작지점인 을지로 버스정거장 인근은 타일·도기 특화거리다. 현재 이곳에는 약 140개의 업체가 있는데, 을지로 3가역 1번 출구부터 3번 출구까지 약 250m 구간에만 80개의 상점이 밀집돼있다. 6·25사변 당시 3개였던 타일가게는 1661년 타일 수입 금지 정책으로 이곳에서 국내 타일 제조업이 시작됐다. 그 후 도시 재건을 위해 집수리에 관련된 것들이 자리 잡게 되며 확산됐다. 국내는 물론 해외수출까지 진행되었고, 현재는 국내 타일 도기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욕실 인테리어와 관련된 모든 것을 이 특화거리에서 볼 수 있는데, 수백 가지의 타일 종류, 세련된 디자인의 세면대와 욕조 등을 구경하며 지나는 재미가 쏠쏠하다.

코너를 돌아 1953년 문을 열어 지금까지 대를 이어온 중식당인 오구반점을 지나면 국내 수제 등산화 업체 중 가장 오래된 송림 수제화가 나타난다. 고층빌딩이 즐비한 을지로 3가에 어깨동무를 하고 줄지어진 낮은 건물이 수시로 간판을 고쳐 다는 동안 80년 넘게 한 자리를 지킨 송림수제화. 이곳은 한국 최초로 수제 등산화와 산악 스키화를 만들고 88올림픽에 사격화를 협찬하고, 허영호 대장이 에베레스트를 오를 때 그의 삼중화를 만드는 등 한국 등산화의 역사를 써내려가는 장소다.

1970년 사단법인 한국 청소년 육성회 회원들이 모금하여 건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청소년 수련관인 서울 청소년 수련관을 지나 오래된 노포집인 원조녹두를 마주한다. 가치와 세월이 깃든 이곳 노포들의 간판은 한 대기업에서 ‘을지로체’를 만들어 서비스와 전시를 할 만큼 레트로한 매력이 넘친다. 곧 을지로 노가리 골목이 나타난다. 올 여름, 코로나19 사태에도 호황을 누렸던 이곳은 야외에 테이블을 깔아 놓고 맥주를 마시는 서울에 몇 없는 장소다. 만선호프는 ‘한국의 옥토버페스트’라는 별칭을 가진 이 골목의 대표 호프집이다. 뮌헨호프, OB베어, 초원, 마부 등 노가리 골목을 형성하고 있는 집마다의 특별함이 묻어난다.

다시 태어난 을지로의 건물들
을지로에는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켜온 음식점이 곳곳에 있다. 대통령의 맛집으로 유명한 양미옥, 평양식 냉면의 시초인 을지면옥, 50년 이상 세월을 지켜 온 을지다방 등이 을지로 3가역 5번 출구를 기준으로 한 라인에 모여있다. 을지면옥은 의정부의 ‘평양면옥’의 효시인데, 겉껍질을 까서 곱게 빻은 메밀과 전분을 혼합해 만드는 냉면 면발과 맑고 담백한 육수가 어우러진 깔끔한 맛이 특징이다.

을지다방은 최근 가수 BTS의 촬영지로 더욱 유명해졌는데, 달걀노른자를 동동 띄운 쌍화탕은 대표적인 아날로그 메뉴로 손꼽힌다. 을지다방은 몇 번의 주인이 바뀌었지만 50년 세월 한자리를 지켜온 곳이다. 추억 속 여행을 꿈꾸는 여행자들에게 강력 추천하고 싶은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오래된 물건과 손때 묻은 소박한 공간이 펼쳐진다. 과거로 들어가는 타임머신을 탄 듯하다.

길을 가로질러 세운상가로 향한다. 세운상가는 종로 3가와 퇴계로 3가 사이를 잇는 주상복합상가 건물군(세운, 현대, 청계, 대림, 삼풍상가 등)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으로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 아파트이기도하다. 70~80년대 문화와 산업을 대표하는 장소 중 하나로 처음에는 고급주거아파트와 상가가 함께 존재했지만 미군부대에서 빼내온 각종 고물들을 고쳐 판매하는 사업장이 동네에 자리 잡기 시작하며 이곳의 상가들은 주변의 사업장과 결합해 가전을 비롯한 각종 전자 제품의 메카가 되었다. 한때 상권이 쇠락하며 슬럼화된 건물은 서울시가 몇 년 전부터 ‘다시세운 프로젝트’를 통해 건물과 상가를 재생했다. 지금은 다양한 카페, 공방, 음식점 등 전자상가와 ‘힙’한 매력의 젊은 감성 넘치는 숍들이 함께 어우러진 이색적인 풍경을 가지고 있다.

을지로의 실핏줄, 산림동 일대
세운상가 근처의 산림동 조각특화거리는 을지로의 매력을 정점으로 보여주는 장소다. 좁고 낡은 골목 사이사이로 오래된 가게들은 저절로 셔터를 누르게 하는 분위기를 가졌다. 담벼락에 붙어 있는 오래된 포스터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은 살아있는 박물관 같은 느낌을 준다. ‘이곳이야말로 서울의 민낯이자 을지로의 실핏줄이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산림동엔 금속을 깎거나 연마해 상패 등을 제작하는 이른바 ‘조각 공장’과 각종 기계 부품을 만드는 기계·정밀 공장이 550여 곳 몰려 있다. 과거의 부흥을 뒤로하고 한 때 이곳은 세운상가와 마찬가지로 슬럼화 되었는데, 독특한 분위기 덕분에 영화 <피에타>의 촬영지이기도 했다. 사실 이 공구거리 주변은 산업 근대화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영화 촬영 장소로 인기가 많다. 이곳에서는 <피에타>를 비롯해 <도둑들>, <감시자들>이 촬영되기도 했다. 중구청은 산림동의 조각특화거리 곳곳을 젊은 예술가들의 작업실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현재는 2기를 모집 준비 중이다.

을지로4가역의 미싱특화거리는 미싱 인구 감소에도 불구하고, 수출과 특수 미싱이 늘어나며 꾸준히 자리를 지키는 거리다. 국내 최초로 건설된 중앙 아파트를 지나면 ‘금손’들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는 방산종합시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과거 학교였던 이 부지는 베이킹과 향초, 테라피 용품, 포장자재와 인쇄가 유명하다. 초콜릿과 사탕, 쿠키 등 먹는 재료에서부터 비누, 디퓨저, 캔들까지 직접 만들 수 있는 재료들을 쉽고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

을지로 골목의 ‘힙’한 변신
을지로 4·5가와 청계천 사이에 자리한 방산시장은 각종 포장자재, 장판, 벽지, 판촉물, 제판, 출력, 종이, 인쇄물, 타월 등을 다루는 국내 최대 시장이다. 광복 직후 미군이 을지로 6가 쪽에 주둔하며 방산종합시장 일대는 소위 ‘양키 시장’으로 불리며 활기를 띄었다. 특히 소시지, 육류, 통조림 등 외래 식품과 서울 일원에 산재해있던 가내수공업 형태의 제과공장에서 생산되던 각종 과자류가 대량 집산되며 전국 과자류 시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다 1980년대 말 식품 원재료를 취급했던 가공식품 도매시장으로서의 역할이 축소되고 인쇄, 포장 관련 전문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을지로3가역, 을지로 4가역에서 청계천로 방향으로는 이처럼 다양한 서울 산업의 민낯과 과거를 확인할 수 있는 곳들이 즐비하다. 반대쪽에는 소위 ‘힙지로’라고 하는 젊은 감성의 가게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도심산업이 유지, 발전할 수 있도록 개발 및 관리가 진행되고 있다. 다양한 빌딩과 시장, 상가가 발달돼 있는 을지로는 오래된 가게와 골목길이 모인 을지로 상권이 복고 바람과 맞물려 젊은층에게는 새로운 문화 콘텐츠가 되었다. 젊은 감각에 맞춘 카페와 펍, 복합문화공간 등도 인쇄소와 공구상가 골목 사이사이에 들어서 젊은이들의 발길을 끌어당기고 있다. 산업과 문화 그리고 예술이 공존하는 을지로, 젊은 크리에이터들이 모이는 이곳에서 서울의 과거와 미래를 찾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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