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스터의 성지, 체코 브르노
힙스터의 성지, 체코 브르노
  • 글 사진 김주현
  • 승인 2020.10.13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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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한 척 하지만, 여전히 동화 속 주인공을 꿈꾼다면

서촌의 한 위스키 바에서 정체불명의 메시지를 받고 한 도시를 떠올렸다. 체코의 동화 속 소녀 같은 모습과 베를린Berlin이 생각나는 시크한 느낌의 카페와 바, 그리고 행복의 건축이란 이름에 걸맞는 빌라 투겐하트Villa Tugendhat까지. 머릿속은 이미 ‘힙스터의 성지’로 급부상한 브르노Brno로 가득 들어찼다.

위잉-’
달과 해가 비슷한 높이에 있던 초저녁, 핸드폰이 탁자와 부딪혀 일정한 간격의 소리를 냈다. 진한 흑갈색 나무로 만든 바Bar 자리여서 그런지 진동소리가 평소보다 컸다.
약속 시간보다 빨리 도착한 탓에 시간을 때우기 위해 찾아간 곳은 서촌 ‘코블러’였다.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낮은 조도의 빛과 나무로 된 실내 인테리어뿐이었지만 어딘가 따뜻함이 느껴졌다. 이 자리. 어딘가 낯이 익어 검색해보니, 영화 <소공녀> 속 여자 주인공이 맛있게 담배를 태우며 위스키를 홀짝이던 바로 그 자리였다.

사실 내가 생각했던 검색 결과는 아니었다. 분명 내가 가봤던 장소 중에 비슷한 곳이 있었는데, 첫사랑의 얼굴처럼 명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버번위스키로 만든 어느 도시 이름의 칵테일을 목구멍으로 털어 넘기며 정답을 열심히 떠올리고 있는데,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잘 지내? 너네 동네 핫플레이스 됐더라?”
‘음… 우리 동네? 근데 누구세요?’하고 물어보려는 찰나에 핸드폰 너머 상대방이 참을성 없이 말을 이어갔다.
“라떼는 말야… 우리 여행할 때는 여행정보가 하나도 없었는데, 이 링크 들어가 봐! 오빠가 살던 그 동네 엄청 핫플됐대!”

순간 보이스 피싱이 아닌가 의심했던 낯선 상대는 어떤 게시물의 링크도 보내왔다. <체코 브르노Brno, 힙스터들의 성지>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브르노’ 세 글자를 보자마자 두 가지 궁금증ㅡ이곳(코블러)과 비슷한 느낌의 장소가 어딘지, 낯선 대화 상대가 누군지ㅡ이 확실히 풀렸다. 뜬금없이 메시지를 보낸 상대방은 체코 브르노에 있을 때 만난 Y였다. 그리고 어렴풋하게 남아있던 기억 속 장소는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닌, Y를 처음 만난 브르노 구석의 작은 바였다.

사실 브르노는 프라하Praha나 체스키크롬로프CeskyKrumlov처럼 친숙한 관광지는 아니다. 체코를 두 지역으로 나눌 때 서쪽은 보헤미아Bohemia, 동쪽은 모라비아Moravia로 나눌 수 있는데, 서쪽을 대표하는 도시가 프라하라면 동쪽의 경우는 브르노다. 그만큼 체코에서는 역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중요한 도시다.

브르노 대학가 주변에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외관의 카페나 바들이 즐비해있었다. 개인적으로 베를린의 시크하고 모던한 느낌과 프라하의 동화 속 소녀 같은 모습이 공존하는 도시라 생각했다. 좋아하는 것에 이름 붙이기를 좋아하는 내가 ‘체코의 혜화동’이라는 애칭을 붙여주기까지 한 거 보면, 브르노라는 도시에 꽤나 큰 매력을 느꼈던 듯하다. 체코에서 가장 많은 대학교가 몰려 있는 도시라 그런지, 관광객들을 상대하는 화려한 상점보단 맛과 실력, 디자인으로 젊은 층의 이목을 끌려는 가게들이 많았다. 그러한 마케팅의 일환일지 몰라도 대부분의 가게들이 간판 없이 운영해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대신, 힘들게 찾은 카페나 바는 나만 아는 장소처럼 느껴져 여행자인 나의 간지러운 곳을 긁어줬다.

그날도 체코 현지 친구와 1차로 맥주를 마시고 테이블 별로 몇 리터의 맥주를 마시는지 전광판에 기록되는 술집에서 전투를 펼쳤다. 1등은 안주가 공짜다. 2차로 이름 모를 위스키 바를 찾았다. 한두 잔쯤 비웠을까, 구석에서 춤추는 무리가 보였다. 바닥이 나무로 되어있어 이따금씩 삐그덕대는 기괴한 소리가 들렸다. 나와 친구가 잔을 비우는 사이 삐그덕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 소리를 내는 무리 중에는 한국인처럼 보이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검은색에 빨간 땡땡이가 들어간 원피스를 입고 몸을 흔들고 있었다. 술 때문인지 혹은 그 땡땡이 무늬 때문인지 멀미가 일었다.

잠깐 바깥공기를 쐬고 오니, 춤추는 무리는 사라져 있었다. 오랫동안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만 사용해서 한국말로 대화하고 싶었는데 아쉽다는 생각이 들 때쯤 구석 자리에 앉아있는 붉은 땡땡이 무늬를 발견했다. 살짝 취해있었지만 말 걸기는 조심스러웠다. 전에도 한국인을 닮아 말을 걸었으나 몽골 국적의 친구였고, 취한 상태에서 영어를 계속 쓰는 건 생각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하듯 크게 외쳤다.

“혹시 한국인이세요?”
한국인이면 반응이 있을 거고, 아니면 아닌 거였다. 반응이 없는 것 같아 “아니면 말고” 한마디를 더 하고 술잔을 향해 등을 돌리려는데, 빨간 땡땡이 무늬가 일어나 나를 향해 다가왔다.
“아, 안녕하세요! 여기서 한국인을 다 만나네요, 저는 북한 사람입네다.”

여기서 북한 사람을 만나다니.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데, 장난이었다며 악수를 청했다. 그녀는 쌍문동에 사는, 나보다 세 살 어린 동생이었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Y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Y는 브르노와 멀지 않은 소도시에서 교환학생을 하고 있었다. 그 도시에는 한인마트가 있어서(브르노에는 없었다.) 맛있는 음식을 사준다는 빌미로 Y에게 한국 음식 재료 배달을 시켰다. 그녀가 올 때마다 배달비 대신 맛있는 점심과 함께 브르노 가이드 투어를 해줬다.

“여기는 브르노의 낙산 공원, 슈필베르크Špilberk 성곽이야. 한눈에 이 도시를 내려다볼 수 있어. 종종 모터사이클 경기도 열린다!”
“여기는 브르노의 광화문, 양배추 시장Cabbage Market. 주말에 친구들이랑 나와서 맥주를 마시곤 해.”
“여긴, 알랭 드 보통의 <행복의 건축>이라는 책에 등장하는 빌라투겐하트Villa Tugendhat이야. 나도 나중에 성공해서 이렇게 집 지으려고!”

이런 말도 안 되는 가이드였지만, 당시 브르노에 대한 정보가 없었으니 Y에게도 대안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사실 이런 관광지보다는 예쁜 카페나 음식점을 더 기대했다. 브르노에 유독 감각적인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건 또 나의 전문분야였고, 그녀와 나는 서로 원하는 것을 얻으며 윈-윈Win-Win할 수 있었다.(덕분에 한국 요리를 마음껏 해 먹었다.)

브르노에 대한 좋은 기억 때문에 체코 여행을 가는 친구들에게 항상 브르노를 추천하곤 하는데, 지금까지 브르노로 여행 간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힙스터의 성지’라니. 그 게시물 말고도 포털 사이트에 브르노에 대한 게시글이 꽤 많이 보여서 이상하게 뿌듯했다. 나만 알던 가수가 어느덧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나와서 열창하는 걸 발견한 기분이랄까. 브르노뿐만 아니라 오랜만에 연락 온 Y도 잘 됐다고 했다. 그 당시 이야기했던 장래희망과 소름끼치게 똑같이, 모 대기업의 해외지사 주재원으로 둥근 지구 위에서 멋지게 꿈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를 거쳐간 것들은 다 잘됐다. 그게 헤어진 이성친구나 이제는 멀어진 친구라 하더라도. 어떤 대상과 헤어진 후에도 미운 정 때문인지, 그 대상들에 대한 응원하는 마음을 가지곤 한다. 종종 기도도 한다.(집착은 아니다.) 어쨌든 브르노나 Y처럼 잘되는 건 좋은 일이지만, 거쳐가지 말고 그냥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 그대 없는 밤은 너무 쓸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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