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차가 우리를 구할지도
따뜻한 차가 우리를 구할지도
  • 정다솜 | 정다솜
  • 승인 2020.05.1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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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 Tea, U.K

비대한 태풍이 된 바이러스가 기어코 세계를 삼키고 말았다. 어디든 쑥대밭이며 영국도 예외는 아니다. 국가 봉쇄 4주 차. 런던 동쪽 변두리의 7평짜리 작은 방에 꼼짝없이 갇힌 지 정확히 26일째다. 휴식도 지나치면 독이란 사실을 아시는지. 봉쇄 초반에 바랐던 ‘슬기로운 집콕 생활’은 바람으로만 그쳤다. 지금 내게 남은 건 그간 섭렵한 온갖 유튜브 채널 이름뿐. 하물며 생전 찾지 않던 드라마를 보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것도 영국 대하드라마를.

뜻밖의 신스틸러
며칠째 드라마 <다운튼 애비Downton Abbey>를 정주행하고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신문물이 대거 유입되고 여성 지위, 신분제 등에 큰 변화가 생겼던 격동의 20세기 초반, 영국 요크셔 지역의 저택 다운튼 애비를 소유한 귀족 그랜섬 가문을 둘러싼 이야기를 다룬 시대극이다. 흥미진진한 줄거리와 입체적인 인물들은 물론 다채로운 볼거리가 인상적이다. 시대극이니만큼 고택의 건축 양식이라든가 화려한 의복, 앤티크 가구처럼 당대 영국 상류층의 생활상이 엿보이는 장치가 그득하다. 한데 무엇보다도 내 눈길을 잡아끄는 건 음료다. 브라운관 속 캐릭터들이 정말 끊임없이 마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브랜디를 마시거나 와인을 마시거나 홍차를 마시고 홍차를 마시거나, 그리고 홍차를 마신다. 일어나자마자 침대 위에서, 아침 식사를 하면서, 목욕하면서, 손님을 접대하면서, 계략을 꾸미면서, 심지어 장례를 치르면서도 손에서 찻잔을 놓지 않는다. 차 마시는 일엔 신분이 없어서 지하에 둘러앉아 티타임을 갖는 하인들의 모습도 매회 볼 수 있다. 과연 ‘홍차의 나라’답다.

대영제국을 매료시킨 붉은 차
유럽의 차 문화는 17세기 초,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중국 차를 암스테르담에 들인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때만 해도 홍차는 대단히 귀한 선물이었다. 영국의 경우 찰스 2세의 결혼식 날 신부였던 포르투갈의 캐서린 왕녀가 중국 홍차와 설탕을 지참금 격으로 대량 가져오면서 소개됐다. 신문물 대부분이 그렇듯 홍차도 초반에는 상류 계급의 기호품이었으나, 쾌속 범선의 개발과 수에즈 운하 개통, 식민지 차 재배 등으로 비용이 저렴해짐에 따라 평민 사회에까지 보급됐다. 영국의 싸늘하고 궂은 날씨와 나쁜 수질도 차의 상승세에 한몫했다. 사람들은 따뜻한 차에 우유나 설탕을 더해 수시로 마셨다. 이후 산업 혁명기 기업들이 근로자들의 휴식 시간에 차와 간식을 제공하면서 홍차는 영국인에게 없어선 안 될 생필품으로 더욱 깊이 뿌리내렸다. 홍차 사랑은 전장에서도 변함없어서,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필수 전투식량 목록에 항상 ‘티타임 세트’가 올랐으며 아예 찻물 끓이는 장비가 육군 전차에 탑재됐을 정도였다.

여성들의 주도 아래 꽃피운 음료
사실 홍차의 유입 이전에 영국인들이 주로 마신 음료는 커피다. 해서 17세기 초반에는 사람들이 모여 담배를 태우고 신문을 읽으며 교류하는 ‘커피하우스’가 상당히 번성했다. 카페 역할을 넘어 증권거래소 노릇까지 겸한 커피하우스도 있었다고. 괴상한 부분이라면 오로지 남성만 출입할 수 있었다는 점인데, ‘커피는 여성에게 해롭다’는 근본 없는 소문이 떠돌다가 정설처럼 굳어졌던 탓이다. 이에 불만을 가진 여성들이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단순 해프닝에 그쳤다는 후문. 아무튼 그러던 중 상류층 여성들 눈에 띈 게 왕실과 귀족 사이에서 알음알음 소비되던 홍차다. 얄궂은 소문도 없고 멀리 가지 않아도 내 집 거실에서 우아하게 누릴 수 있다는 편리함에 아름다운 빛깔과 향미까지. 여러모로 여성들 맘에 쏙 든 홍차는 이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커피의 대항마로 부상했다.

애프터눈 티, 레전드 문화의 등장
영국 음식 문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 역시 여성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피어났다. 이를 최초로 시작한 사람은 제7대 베드포드 공작부인 ‘안나 마리아’다. 아침과 저녁 식사 사이의 긴 공백 중에 출출함을 느낀 그녀는 어느 날 하녀에게 차와 버터 바른 빵을 침실로 가져올 것을 주문했다. 처음에 혼자 즐기던 부인은 점점 특별히 친밀한 지인들을 불러들여서 드로잉 룸에 멋들어진 찻상을 꾸렸다. 빅토리아 여왕의 모친과 절친한 데다 상류층의 아이콘이었던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주변 귀부인들에게 시시각각 알려졌으므로, 이러한 형태의 티타임은 즉시 ‘애프터눈 티’라는 이름이 붙어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귀부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오후 네 시가 되면 풍성한 티 푸드를 곁들인 차를 마셨다. 한편 찻잔과 티포트, 스트레이너, 밀크저그 등의 다기 재료로는 중국산 고품질 도자기나 은이 쓰였는데, 이와 같은 고급 다기 세트가 인기를 구가하자 커피하우스에 가기보다 손님들을 자택으로 초대해 홍차를 마시며 은근하게 재력과 교양을 과시하는 남성들도 빠르게 늘었다. 애프터눈 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멀리 퍼졌고, 이제 사람들은 성별과 계층, 때와 장소를 막론하고 홍차를 즐겼다. 커피하우스가 저문 자리에 크고 작은 티룸들이 생겨났다.

완벽한 홍차를 위한 골든룰
1) 333 법칙
취향에 따라 알아서 마시면 그만이겠으나 여전히 많은 이가 따르는 법칙이라면 봐둘 필요는 있을 터. 더욱이 아주 간단하다. 홍차 한 잔을 기준으로, 홍차 3g에 물양은 300mL으로 맞출 것. 그리고 더도 덜도 말고 3분만 우릴 것. 가장 적절한 향과 맛을 위해서 지켜야 할 전부다. 다기를 미리 예열해 두면 더 좋다.

2) 홍차 먼저, 아니 우유 먼저
잉글리시 밀크티는 홍차 위에 우유를 부어야 할까, 우유 위에 홍차를 부어야 할까. 말장난에 불과해 보이지만 실제로 이를 매우 진지하게 생각한 이가 있다. 소설가 조지 오웰이 그렇다. 오웰은 <이브닝 스탠다드>지에 ‘완벽한 홍차 한 잔’이란 칼럼을 실어 ‘티스플레인’을 과시할 만큼 홍차를 향한 애정이 깊었는데, 이 글에서 그가 제시한 열한 가지의 골든룰 중 밀크티에 관한 부분은 오래간 논쟁 대상이었다. 오웰은 잔에 차를 먼저 붓고 우유를 나중에 넣을 것을 고집했으나, 오웰 탄생 100주년을 맞은 2003년, 영국 왕립화학협회가 예의 칼럼과 동일한 제목을 단 글을 발표하면서 논란은 종결됐다. 협회는 오웰의 방식대로 하면 우유의 단백질이 변형되므로 우유를 먼저 넣고 홍차를 위에 부어 마실 것을 엄숙히 선언했다고.

3) 티푸드도 위아래가 있거늘
티 푸드와 관련한 골든룰도 있다. 애프터눈 티의 경우 보통 3단 트레이에 각종 음식이 넉넉히 담겨 나오는데, 음식을 두는 위치와 먹는 순서가 엄연히 정해져 있다. 우선 제일 아래 트레이에는 속을 든든히 채워줄 샌드위치를, 중간층엔 스콘과 빅토리아 스펀지 케이크 같은 베이커리류를, 그리고 3층엔 설탕에 절인 과일과 초콜릿, 타르트 등의 달콤한 디저트를 올리는 게 룰이다. 하단의 트레이부터 차례로 먹고 디저트로 마무리한다.

Sweet Tea Is The Thing For Frayed Nerves
방에 갇히었던 동안 날씨가 많이 달라졌다. 앙상하던 나무들엔 어느새 짙푸른 잎이 무성하고 겨우내 보기 어려웠던 해가 종일 창가에 머문다. 이토록 여름이 성큼 다가왔지만, 모두가 축 가라앉아 있다. 바깥소식은 침통하기만 해서 사람들은 갈수록 예민하다. 태풍은 언제쯤 그칠 것이며 해방은 언제쯤 올까. 아무도 모른다. 모르니까 별 게 다 아쉽고 별 게 다 생각나는 요즘. 아무래도 그랜섬 가문의 큰 어른 바이올렛 부인 말씀을 받들어 우유와 설탕을 듬뿍 넣은 차부터 좀 마셔볼까 싶다. 그의 말처럼 달콤한 차가 곤두선 신경과 예민함을 사르르 녹여주었으면, 우리를 구해주면 참 좋겠다.

정다솜
여행과 술을 사랑하는 바텐더. 여행하면서 만나는 수많은 ‘마실 것’에 호기심이 가득하다. 그 호기심의 범위를 더 넓히기 위해 현재 런던에서 워킹홀리데이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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