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가 음악이라면 즉흥환상곡
맥주가 음악이라면 즉흥환상곡
  • 정다솜 | 정다솜
  • 승인 2020.02.1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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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mbic, Brussels

산티아고 순례길 중반이었나. 끝을 가늠할 수 없이 드넓은 들판을 종일 걷는 구간이었다. 쏟아붓는 유월의 햇살에 대지 위의 모든 것이 뜨겁게 달았고, 미지근한 물로 목을 축여봤자 가쁜 숨과 벌건 이마는 식질 않았다. 아, 진짜 맛있는 맥주 마시고 싶다. 간절한 나머지 속말이 바깥으로 새어 나왔다. 며칠이 지난 밤. 모두가 잠든 알베르게 주방 구석에서 나는 몹시 가냘픈 신호의 와이파이를 어르고 달래가며 덥석 예약해버렸다. 계획에 없던 브뤼셀행 야간버스를.

할머니표 열무김치의 향수를 소환하는 맥주라니
바르셀로나를 떠난 버스는 서른 시간 만에야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 닿았다. 내려서 잠시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이가 보였다. 반년 전, 내가 일하던 펍에 여행자 손님으로 와 알게 된 ’레미‘다. 버스표를 끊고 브뤼셀에 산다던 그가 문득 생각나 맥주나 한잔하자고 했더니 기꺼이 호스트를 자처해준 것이다. 그의 집 다락방에 배낭을 대충 부려놓고서 우리는 벼르고 별렀던, 꿈엔들 잊힐 리가 없던 모에더 람빅Moeder Lambic으로 직행했다. 건배하고 첫 모금을 들이켠 때의 희열이란. 그것은 마치 잘 익은 열무김치. 그러니까 시골집 마루에 앉아있으면 할머니가 서늘한 광에서 꺼내와서는 삶은 소면을 턱 말아주시던 그 김치의, 정확히는 국물의 맛. 묵은 김치 특유의 톡 쏘는 새큼함 뒤에 코를 자작이 적시는 쿰쿰한 군내, 그리고 여독도 더위도 단번에 씻어내는 감칠맛의 대파티. 잔을 놓지 못하고 실실 웃음만 흘렸다. 그래, 이거지. 요 이상한 맥주 마시러 여길 다시 왔지 내가.

범주 안에 들기를 거부하는 아웃사이더
흔히들 말한다. 세상의 모든 맥주는 라거와 에일로 나뉜다고. 둘의 구분 기준으론 쓰이는 효모의 종류와 그에 따른 발효 방식의 차이가 설명된다. 대체로 맞는 말이나 들여다 보면 발효 공정은 거의 같다. 보편적인 라거, 에일은 종류를 막론하고 인간이 배양한 효모들을 사용하며, 양조사가 직접 효모를 외부 공기와 완벽히 차단된 발효조에 투입한다. 공기 중 미생물이 맥주에 침투하면 예측하지 못한 맛과 향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서다. 일반적인 맥주 양조 과정에서 예측 불가능성이란 치명적이므로, 효모가 맥주와 만나는 순간부터 발효가 종료되는 시점까지 양조사들은 가능한 한 모든 변수를 철저하게 통제하며 긴장을 놓지 않는다. 그런데 누구도 원치 않는 이 예측 불가능성을 반기는 당돌한 이가 있으니.

라거나 에일 어느 범주도 거부하는 이 맥주는 인공 배양 효모를 사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스스로를 일부러 공기에 노출하는, 다소 도발적인 ‘즉흥 발효(Spontaneous Fermentation)’ 방식을 거친다. 낡은 대중탕을 닮은 나무 발효조에 대(大)자로 누워 대기를 떠도는 야생 효모며 천장 서까래 밑에 사는 각종 미생물을 전부 불러들이는 맥주, 바로 ‘람빅’이다. 양조사들에게 있어 라거와 에일이 품 안의 자식이라면 람빅은 방목이 미덕인 보헤미안이라고 할 수 있겠다.

환상의 맛을 만드는 축, 박테리아
아래턱부터 귀밑까지 좍좍 끌어당기는 짜릿한 신맛 틈으로 청사과를 비롯해 덜 익은 자두류의 풋내와 쿰쿰한 치즈 냄새가 엷게 스치다가 살짝 떫은 듯 날카롭게 떨어지는 마무리까지. 람빅의 복잡스러운 맛과 향은 정말이지 독보적 장르다. 이 환상적인 팔레트가 가능하도록 돕는 미생물은 대략 80종으로 분석되는데, 특히 주요하게 관여하는 박테리아로 셋을 꼽는다. 우선 쨍한 산미는 김치나 요구르트에 함유된 젖산균인 락토바실루스Lactobasillus와 식초를 만드는 초산균 아세토박터Acetobacter에서 온다.

다음으로 람빅의 핵심적인 군내, 즉 젖은 건초와 가죽, 묵은 치즈나 말 안장 등으로 표현되는 퀴퀴한 향과 맛을 부여하는 역할은 브뤼셀 근교에 서식하는 야생 효모 브레타노미세스Brettanomyces가 맡는다. 뜨거운 맥주가 식어가며 잠든 하룻밤 새 이들 셋을 포함한 여러 미생물이 맥주에 녹아들면 일단 준비는 완료. 다만 박테리아는 배양된 효모에 비해 맥주의 당을 갉아먹고 알코올을 분비하는 속도가 아주 느린 편이라 발효 기간이 훨씬 길고 숙성도 필요하다. 최소 반년에서 길게는 수년을 오크통 속에서 잠들어있던 귀한 람빅이라야만 술상에 놓일 수 있다.

괴즈: OB가 YB를 만나면
자연 속을 부유하는 미생물을 즉흥적으로 끌어다 발효시키는 맥주이다 보니, 동일한 양조장에서 동일한 공정으로 만든 람빅일지라도 찰나의 환경과 계절 등에 따라 맛의 편차가 있다. 그래서 숙성조와 연식이 각기 다른 람빅을 섞은 새로운 스타일의 맥주가 파생되기도 한다. 람빅계 상징이라 여겨지는 ‘괴즈Gueze’가 그렇다. 괴즈를 만들기 위해서는 보통 숙성 기간 1년 이하의 ‘영 맥주Young Beer’와 2~3년 된 ‘올드 맥주Old Beer’를 적절히 블렌딩한 뒤 코르크 마개로 막아놓은 병에 담아 2차 발효를 시킨다. 이때 영 맥주에 아직 남은 소량의 당이 2차 발효를 거치는 동안 탄산으로 바뀌며 발포성을 얻기에 브뤼셀의 드라이 샴페인이란 별칭도 있다. 람빅 양조장이라면 기본적으로 괴즈를 생산하지만 배합 비율이나 숙성 기간은 저마다 다르다. 절제된 산미와 브렛의 묵은 풀, 군내의 풍미가 조화롭게 어우러질수록 상급 괴즈로 인정받는다.

스위트 람빅: 진입 장벽 낮추기
그러나 제아무리 독보적이고 귀한 맥주라 하더라도 모두의 입에 맞을 순 없는 법. 사실 람빅만큼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는 맥주도 없다. 본토 벨기에서조차 매니악한 맥주로 통해온 람빅은 예부터 시장성이 취약한 편이었는데, 람빅 원주에 빙설탕을 첨가한 ‘파로Faro’를 필두로 ‘가당 람빅(Sweetened)’의 시대가 열리면서 판도가 조금 바뀌었다. 이 시기에 체리(Kriek)나 복숭아, 라즈베리류의 과일과 함께 설탕이나 쥬스 등 인위적인 당분까지 추가해 만든 스위트 람빅들이 줄줄이 등장했고, 이들은 확실히 대중의 눈과 입을 사로잡으며 람빅에 대한 진입 장벽을 낮췄다. 마셔보면 산미가 느껴지긴 해도 단맛이 보다 전면에 나선다. 과일 쥬스에 가까워 식전주 혹은 식후주로도 알맞다. 대신 람빅 고유의 특질과 개성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해서, 장인정신과 자부심을 중요시하는 보수적 성향의 양조장들은 스위트 람빅을 일절 배제한 채 전통 람빅에만 열중하기도 한다.

람빅이란 이름으로 견뎌야 하는 무게
브뤼셀 여행 막바지에 레미의 친구들로부터 홈파티 초대를 받았다. 주뼛거리는 내게 다들 맥덕이니 잘 맞을 거라며 레미가 다독였는데, 아파트 내부로 들어서자 보이는 광경이 과연 대단했다. 상자째로 쌓인 크래프트 맥주들과 가지런히 정리된 전용잔 콜렉션, 맥주에 관한 수많은 책과 단독 냉장고까지. 언제나 맘속으로 희망하던 모델하우스가 실제로 구현된 집이었다. 주뼛이 웬 말, 우리는 금세 입이 트여서 한낮에 시작한 자리가 이튿날 동틀 무렵에나 끝났다. 하나둘 비워 수십이 된 맥주병을 상에 늘어 놓아가며 다섯이서 맥주 얘기만으로 밤을 새운 것이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오래 했던지. 모든 게 기억날 리야 만무하지만, 여전히 또렷한 것들은 있다. ‘람빅은 다른 왕관을 쓴 유일한 맥주야. 그런 만큼 무게가 있고, 또 무게가 있어야만 해. 세상이 바뀌고 진보해도 지켜져야 할 가치는 계속돼야 한다고. 고유한 것을 다 죽이고 설탕만 바른 맥주가 돼선, 그게 람빅이란 이름을 가져서는 안 돼. 람빅은 그런 공산품이 돼서는 안 돼.’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힘주어 되풀이하던 앤소니의 단호한 미간과 빈센트의 따뜻한 손, 악수와 함께 건네진 맥주 잡지. 그 두 권을 카메라보다도 소중히 끌어안고 걷던 브뤼셀 어느 거리의 새벽 공기.

즉흥 여행이 가져다준 5일의 환상
없던 일정을 갑자기 만들어 떠났던 브뤼셀 나들이는 지금 돌이켜봐도 희한한 구석이 있다. 일단, 마실 복이 본래 좀 있는 편이긴 하지만 그 며칠이 참 유난했다. 깨어나 다시 누울 때까지 맥주를 정말 주구장창 마셨으니까. 게다가 오 분 전까진 생판 모르던 타인들과 합석이라니. 따져보면 머나먼 땅에서 단 한 번 본 사이일 뿐이건만 반년도 더 지나 즉흥으로 보낸 메시지 한 통에 여정의 대부분을 선뜻 책임져 준 레미도 그렇고 레미를 대하듯 살가웠던 그의 친구들 빈센트와 앤소니, 작은 펍에서 우연히 만나 한나절을 보낸 플로리다 출신 맥덕 아저씨들과 캐나다에서 온 미셸과 맷까지. 이토록 낯선 사람들과 술을 마시며 마음을 열고 떠들어 댄 게 너무 오랜만, 아니 낯을 꽤 가리는 인간인 내겐 그때나 지금이나 전례 없던 일이다.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순례길을 끝내고 장기 여행 중반에 접어들면서 모르는 새 찾아든 권태가 브뤼셀 덕분에 뭉글뭉글 풀어졌었다. 맛있는 맥주와 더불어 여행의 감칠맛까지 얻었던 환상의 5일.

바르셀로나로 돌아가는 나를 배웅하며 레미가 말했었다. ‘앤소니랑 빈센트 말야. 네가 그 맥주 잡지를 만들거나 칼럼니스트가 되면 꼭 알려달래. 블로그부터 시작하라고도 전해달래.’ 나는 결국 잡지를 만들지도, 칼럼니스트가 되지도 못했지만, 가끔 그 말을 떠올리곤 했다. 많이 늦었지만 그날 나눈 얘기들을 종이 위에 한 꼭지나마 풀어놓을 수 있는 정도는 됐으니 이젠 괜찮은 건가. 잘 모르겠다. 모르겠고, 쓰다 보니 아. 마시고 싶다. 진짜 맛있는 맥주.

정다솜
여행과 술을 사랑하는 바텐더. 여행하면서 만나는 수많은 ‘마실 것’에 호기심이 가득하다. 그 호기심의 범위를 더 넓히기 위해 현재 런던에서 워킹홀리데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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