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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의 길 위에서 보내는 편지
순례자의 길 위에서 보내는 편지
  • 글 사진 백종민
  • 승인 2019.07.26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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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크, 또다른 스페인을 만나다

여긴 스페인이 아닙니다
여기에 도착할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머무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당신에게 편지도 보낼 수 있게 되었군요. 스페인 북부의 잘 알려지지 않은 땅을 걷고 있습니다. 굳이 바르셀로나나 세비야 같이 익숙한 여행지를 두고 여기까지 오는 이들은 많지 않아요. 혹시라도 바스크에 대해 들어 봤다면 순례길을 걷다가 지나가는 풍경 정도인 경우가 많죠. 괜찮습니다. 이 곳 사람들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으니까요.

'왕좌의 게임' 촬영지로 더욱 유명해진 ‘산후안 데 가스텔루가체’. 성당에 오르는 내내 신앙의 힘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게 한다.
'왕좌의 게임' 촬영지로 더욱 유명해진 ‘산후안 데 가스텔루가체’. 성당에 오르는 내내 신앙의 힘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게 한다.

만약 당신이 내 편지를 읽고 바스크에 들린다면 유쾌한 스페인이 아니라 어리둥절할 거예요.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주저 없이 “아미고(친구라는 뜻의 스페인어)!”를 외치는 스페인은 여기에 없어요. 농담을 주고받으면서도 웃지 않는 그들 표정에 저도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덕분에 바스크는 별종 취급을 받습니다. 자기들도 스페인 사람보다는 ‘바스크인’ 이라 불리길 좋아하더군요. 아마도 날씨 탓이겠지요.

영화제를 즐기고 있는 빌바오 시민들.
영화제를 즐기고 있는 빌바오 시민들.

개미들이 일꾼 땅
대서양을 앞둔 이 지역은 겨울에 쌀쌀 하기까지 합니다. 스페인에서 두꺼운 점퍼를 입고 잔뜩 움츠린 채 걷는 풍경이라니 재미있지 않나요? 저도 이 겨울을 처음 접하고 꽤나 당황했습니다. 비도 자주 내립니다. 빨래를 해서 널어놓으면 반나절 만에 섬유가 타버릴 것만큼 바짝 마르는 게 스페인의 태양입니다. 그런데 여긴 비구름 때문에 도통 빨래가 마르지 않아요. 심지어 비를 피하려고 빨래 건조대 위에 우산을 씌워 놓기도 했다니까요. 이건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풍경 같아요.

세계 올리브 오일 생산량의 50%를 차지하는 곳이 스페인입니다. 비가 잘 내리지 않고 태양이 뜨거운 이베리아 반도 어디에서나 올리브 나무를 볼 수 있죠. 하지만 바스크에서는 그 억척스러운 나뭇가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참나무며, 소나무며 삐쭉삐쭉한 이파리만 잔득합니다. 비가 자주 내리는 덕에 계곡에는 풍성한 물이 흐릅니다. 올리브가 없는 대신 서늘해서 채소를 키우기에 좋은 곳이지요.

순례길 위에 자리한 빌바오는 배낭을 매고 도시를 가로 지르는 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순례길 위에 자리한 빌바오는 배낭을 매고 도시를 가로 지르는 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바스크인들이 사는 땅은 피레네와 칸타브리아 산줄기가 마주한 곳에 있습니다. 네, 산이 많습니다. 온통 산과 늪지로 둘러쌓인 풍경에 이곳에서는 너른 평지는 사치인가 싶어집니다.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의 대지 위에 사는 스페인 남동부 사람들은 ‘그 동네에 어디 사람 살만한 땅이 있는가’ 하고 놀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땅에 불평하지 않습니다. 되레 자랑스러워합니다. 사람들은 비탈을 따라 올라 소를 키우고, 자투리땅을 일궈 곡식을 심었습니다. 근성 있는 사람들의 대지라고 하면 좋을까요? ‘개미와 배짱이’ 의 개미처럼 땅을 일궈 지금은 스페인을 먹여 살리는 부자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 중심에 쇳물을 녹여 배를 만들었던 빌바오가 있습니다.

‘바스크인’ 들은 활동하기 편한 베레모를 만들어 쓰고 부지런히 계곡을 따라 철길을 놓았습니다. 빌바오 강을 따라 출발한 열차는 이내 큰 강을 흘려보내고 작은 개울과 깊은 계곡을 지나 숲 속으로 들어갑니다. 창 밖에는 강원도 정선을 향하는 태백선 열차가 생각나는 풍경이 지나갑니다. 나무 사이로 달리는 기찻길을 따라 듬성듬성 자리한 집이 외로이 서 있는 나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산허리를 몇 차례 더 숙이면 그 유명한 게르니카 Gernika-Lumo가 보입니다.

해운업의 영향으로 환경이 망가졌던 빌바오는 20세기 말부터 도시 재생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산 위에서 내려다 본 빌바오 시내 전경.
해운업의 영향으로 환경이 망가졌던 빌바오는 20세기 말부터 도시 재생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산 위에서 내려다 본 빌바오 시내 전경.

거친 바다 위의 삶
게르니카에서는 죽음과 침묵을 생각하게 합니다. 죽은 것과 침묵은 다릅니다. 시끄러워도 죽은 것들이 있고 조용해도 산 것이 있습니다. 게르니카는 폭탄이 터지는 굉음 속에서 많은 이들이 죽었지만 지금도 조용히 살아 있습니다. 피카소의 그림 속에서도, 곳곳에 남아 있는 방공호에서도, 광장에 앉아 속삭이듯 이야기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을은 살아남았습니다.

긴 습지를 품고 있는 게르니카를 지나면 이내 문다카Mundaka입니다. 잔잔한 파도가 밀려오는 강과 순례자의 십자가를 따라 걸어 보았습니다. 마을 끝 절벽에 서니 조금 전까지 저를 따라오던 평화로운 풍경은 온데 간데 사라집니다. 거친 파도가 내뿜는 하얀 거품과 검푸른 물빛에 발을 담그면 잡아먹힐 것 같았습니다. 그 포세이돈의 바다 위에서 서퍼들은 작은 판 하나에 의지해 파도를 탑니다.

산 끝에 바다가 자리한 바스크의 풍경과 강원도에서 봤던 장면이 겹친다.
산 끝에 바다가 자리한 바스크의 풍경과 강원도에서 봤던 장면이 겹친다.

서퍼들이 만드는 풍경과 달리 이 바다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녹록치 않습니다. 잔잔한 지중해 위의 도시들처럼 쉽게 살 수 있는 땅이 아니란 뜻이지요. 어부들은 손바닥만한 어선에 올라타고 바다의 배를 갈라서 바깔라오 (대서양 참대구)를 잡습니다. 소금에 염장한 이 생선은 이 지역 사람들을 먹여 살린 특산물이기도 합니다. 어부들은 대서양으로 나가 목숨을 걸고 포세이돈과 싸워야 이 생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 년 중 하루는 자신과 다른 어부들의 안녕을 위해 성모 마리아를 배에 실어 가까운 바다를 돕니다. 신에게 기도할 수밖에 없는 처절함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닷가 마을 산투르치Santurtzi의 엘 카르멘 축제의 풍경입니다.

대서양의 거친 파도는 방파제를 지나면서 잔잔한 파도로 바뀐다.
대서양의 거친 파도는 방파제를 지나면서 잔잔한 파도로 바뀐다.

바스크 사람들은 신의 은총을 간절히 바라는 듯합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여길 지나서 인지 신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기도의 흔적은 여기저기 묻어 있습니다. 그 중 최고는 저 바닷가 절벽 위에 세워진 성당입니다. 닿을 듯 말 듯 한 섬을 돌다리로 이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절벽을 오르내리며 돌을 쌓아 성당 ‘산후안 데 가스텔루가체’를 지었습니다. 그 풍경이 너무 신비롭기도 했지만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더군요. 아마도 제 여행을 보며 당신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이 마을에서 벌어진 잔혹한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현장 학습 나온 스페인 학생들의 모습.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이 마을에서 벌어진 잔혹한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현장 학습 나온 스페인 학생들의 모습.

그때까지 평안하시길
편지를 마무리 하려고 보니 지금껏 알고 있던 풍경과 달라서 당신이 놀라지 않았나 걱정입니다. 제 욕심이 컸나 봅니다. 이제 펜을 내려놓고 다시 신발끈을 묶으려고 합니다. 이 길이 어디서 끝날지 알 수 없어 만남을 기약하지는 못하겠군요. 혹시라도 지나치게 된다면 반갑게 인사해 주십시오. 부디 다시 만날 때까지 평안하길.

지중해와 달리 너른 해변이 없는 이 지역 아이들은 다이빙을 하며 더위를 식힌다.
지중해와 달리 너른 해변이 없는 이 지역 아이들은 다이빙을 하며 더위를 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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