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안다고 생각했던 파주
잘 안다고 생각했던 파주
  • 임효진 기자 | 아웃도어 DB, 파주시청
  • 승인 2019.02.0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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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따라가는 여행

여행은 이제 일상 깊숙이 자리 잡았다. 하지만 막상 SNS에서 핫하다고 해서, 소문난 곳이라고 해서 가보면 실망할 때도 적지 않다. 맛집과 인생샷으로 점철된 여행이 이제는 어쩐지 공허하다.

그렇다고 그 좋은 여행을 안 갈 수도 없는 노릇. 기왕에 어렵게 낸 시간과 귀하게 번 돈을 들여서 가는 여행이라면 남는 게 있으면 더 좋을 것이다. 전에는 주마간산처럼 스쳐지나가던 곳을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애정을 갖고 보면 기대했던 것과 다른 모습을 선물해 줄지도 모른다. 이른바 읽고 가는 인문학 여행. 첫 번째는 가까워서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의외의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어 더 매력적인 경기도 파주다.

1 조선의 수도가 될 뻔 한 파주
지난 해 사람의 많은 시선이 쏠렸던 도시를 꼽자면 아무래도 파주가 아닐까. 남과 북의 최고 권력자들이 판문점에서 손을 맞잡고 얼싸안으며 포옹하는 역사적인 장면을 전 국민이 생중계로 지켜봤다. 당장이라도 휴전선을 걷어낼 것 같은 따뜻한 기운에 마음은 모두 파주로 달려갈 채비를 마쳤었다.

그전까지 파주는 판문점이나 끊어진 철길, 군부대 등으로 군사 도시의 이미지가 강했다. 또한 북한과 맞닿아 있어 언제라도 비상사태에 돌입할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을 주곤 했다. 그러다 근래 들어 헤이리마을과 출판도시가 들어서면서 20~30대에겐 문화도시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지혜의 숲과 같은 독서복합문화공간은 대표적인 교외 나들이 장소이자 데이트 스팟으로 자리 잡았고, 근방에 사는 사람들은 쇼핑을 위해 아웃렛을 자주 찾는다. 최근에는 파주 교하를 지나는 수도권광역급행철도 GTX A가 착공하면서 인근 주민들은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고, 신혼부부들에게는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떠올랐다. 파주 입장에서는 오랜만에 받아보는 따뜻한 시선에 낯이 좀 뜨거울 수도 있겠다.

어쨌든 지금은 파주가 군사도시 이미지가 강하고 통일 안보관광지라는 무지막지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한때는 수도 후보지로 거론됐던 귀한 땅이다. 조선 광해군 때 지리학을 공부하는 이신이 상소를 올려 파주 교하 자리로 천도할 것을 청하였다. 이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역적들의 변란이 잇달아 꼬리를 물었으며, 조정의 신하들은 당을 가르고 사방의 산들이 벌겋게 벗어진 것은 한양의 지기가 쇠했기 때문이라며 교하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해군도 마음이 기울었지만 우리가 잘 알다시피 파주 천도는 실현되지 않았다.

2 황희 정승과 율곡 이이가 아끼던 곳
파주가 특별한 땅이라는 건 뒤에 나올 두 사람과 관련됐다는 사실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이름이 잘 알려진 위인인 황희 정승과 율곡 이이가 여생을 보내고 묻힌 곳이 파주이다.

율곡 이이는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3세부터 29세까지 9번의 과거에서 9번 장원급제한 천재 유학자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동서분당 화해를 위해 노력했고, 임진왜란이 있기 전 10만 군대 양성을 주장했으며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개혁가였다.

조선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율곡 이이와 어머니인 신사임당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도시는 강릉이다. 하지만 율곡 이이 선생께 물어보면 아마 강릉에 대한 기억보다는 파주에 대한 추억을 더 많이 갖고 있을 듯하다.

율곡 이이는 1536년 강원도 강릉부 죽헌동에 있는 외가인 오죽헌에서 덕수 이씨 통덕랑 사헌부감찰 이원수와 평산 신씨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살에 글과 말을 익혔다고 알려지며 6살이 되던 해에는 본가인 파주로 와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관직에 있을 땐 한양에서 살다가 말년에는 다시 파주로 돌아와서 임진강을 바라보며 지냈다. 그의 호 율곡도 살았던 마을 지명에서 따왔다. 파주에 가면 여전히 그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율곡 이이 유적지와 화석정이 대표적이다.

본래 화석정은 고려 말 학자인 야은 길재가 살던 곳이었는데 율곡의 증조부가 이를 물려받았다고 한다. 율곡 이이가 8살이 되던 해 화석정에서 시를 지었다고 알려진다. 화석정에서 좀 떨어진 율곡 이이 유적지에 가면 율곡기념관과 사후 31년인 1615년에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자운서원이 있고, 이이와 신사임당의 묘가 있다.

파주 이이 유적
경기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5-1
031-958-1749

3 두문불출하다 최고의 재상자리에 오른 황희
파주 문산읍 사목리에 가면 황희 정승의 묘도 찾아볼 수 있다. 황희 정승은 고려말 과거에 합격했으나 고려가 망하면서 개성 두문동에서 은둔하다 태조 이성계의 강력한 요청으로 조정에 들어간 후 태조부터 세종까지 네 임금을 받들었던 재상이다. 청렴결백하고 조선 정승의 모범이 돼 역사상 가장 빼어난 정치가로 꼽힌다. 한 곳에 머물며 밖에 나가지 않는다는 뜻의 두문불출이라는 말도 황희를 비롯한 고려 유신들이 조선에 반대하며 두문동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는 말에서 비롯돼 지금까지 쓰이고 있다.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보낸 곳이 파주 반구정(伴鷗亭,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호)이다. 임진강 기슭에 세워진 정자로 원래는 낙하정이라 했다. 한국전쟁 때 모두 불타버렸으나 그 뒤 후손들이 부분적으로 정자를 복원해 오다가 1967년 개축하고, 1998년 유적지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반구정과 양지대 등을 목조건물로 새롭게 개축했다.

황희 선생 유적지
경기 파주시 문산읍 반구정로85번길 3
031-954-2170

4 미군기지가 만든 문화와 역사
파주는 조선시대에는 점잖으신 분들이 여생을 보낸 조용한 동네였지만, 한국전쟁 이후에는 미군과 유흥 시설들이 대거 들어선 모습으로 변모한다. 파주는 1971년 파주군이었던 당시, 읍과 면 11군데에 모두 기지촌이 들어서 나라 안에서 기지촌이 가장 많았던 곳이었다. 파주읍 연풍 1리의 용주골과 연풍2리의 대추벌, 문산읍 선유4리, 조리면 봉일천리, 월롱면 영태리 등에 미군 부대가 마을을 에워싸고 원을 그리며 들어섰고 이 부대를 따라 유흥업소가 들어왔다. 덕분에 60년대에 이미 길이 포장된 곳이 있었고 시가지도 형성됐다. 그 중에서 미군 종합 휴양 시설인 ‘RC’가 있던 용주골이 가장 번성했는데, ‘용주골 사람치고 포커 못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유명하다.

하지만 70년대 들어 문산에 있던 제2사단이 동두천으로 옮기면서 미군을 따라 번성했던 경제도 쇠락의 길을 걷는다. 어쨌든 파주에 있던 기지촌 역사는 그리 유쾌한 사실은 아니지만 외화벌이의 중요한 수단으로 국가 경제를 일으키는데 이바지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당시 파주읍 연풍리 골목은 ‘달러골목’으로 불렸는데 아침에 청소하던 사람들이 길가에 여기저기 버려져 있던 달러를 쉽게 주워서 생긴 말이다. 뒷주머니에 돈을 넣고 다니던 미군들이 흘린 달러였다. 이곳에는 1962년 개관한 문화극장이 있는데 미군 위문공연 등이 이뤄지던 종합엔터테인먼트 공간으로 서울을 제외하고 수도권에서 가장 먼저 생긴 극장이다.

미군과 관련된 흔적은 드라마 ‘태양의 후예’를 촬영하기도 했던 캠프 그리브스를 방문하면 찾아볼 수 있다. 캠프 그리브스는 50여년간 미2사단 506보병대대가 주둔하다 2004년 미군이 철수하면서 한국정부에 반환된 공간으로 지금은 안보체험 시설로 활용된다. 현대식으로 개축된 민통선 내 최초의 유스호스텔이다.

캠프 그리브스 유스호스텔
경기 파주시 군내면 적십자로 137
031-953-6970
dmzcamp131.or.kr

5 우리도 곧 밟게 될 JSA
판문점은 현재 남한 사람이 갈 수 있는 최북단이다. 얼마 전까지 그 땅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일은 요원해 보였는데 현재는 공동경비구역 JSA내 민간인의 자유왕래가 추진 중이다. 판문점은 조선시대에는 널문리로 불리며 서울에서 의주로 가던 사람들이 잠시 들러서 쉬어가던 ‘늘묵이 주막’이 있던 자리로 당시에는 개성까지 이름이 난 핫플레이스였다. 그러다 치열한 전쟁 끝에 부랴부랴 휴전 협상을 맺기 위해 널빤지로 적당히 지었던 게 오늘날 남과 북의 상황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가 되었다.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공산군은 이곳에서 회담을 열고 휴전 협상을 맺었다.

이때 유엔군과 공산군은 휴전 협상을 맺으면서 비무장 지대 안에 남북이 각각 마을 한 곳을 두기로 했고, 북쪽은 기정동 마을, 남쪽은 대성동 마을을 형성해 현재까지 주민들이 살고 있다.

자유의 마을이라는 역설적인 이름을 갖고 있는 대성동은 2015년 기준 약 200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저녁 7시에는 가구 별 인원을 점검하고 자정부터 새벽 5시까지는 통행이 금지되는 땅이다. 생활이 자유롭지는 않지만 대신 국민의 4대 의무 중 두 가지인 납세의 의무와 국방의 의무가 없다. 정전협정 제10항에 의해 대한민국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국제연합군사령관이 관할하기 때문이다.

6 고수김치를 담가먹는 파주 사람들
한국에서 삼겹살 등 고기를 구워 먹는 식당은 어디를 가나 찾아볼 수 있지만 파주에만 있는 특별한 점이 있다. 파주의 고기구이 식당에 가면 흔히 동남아 향신채소로 알려진 고수가 쌈채소로 나온다. 특유의 강한 향으로 호불호가 강하게 갈리는 고수는 동남아 음식에 주로 사용되면서 우리나라 음식에는 없는 식재료로 알고 있지만, 파주 사람들은 예부터 고수를 ‘전통적으로’ 먹었다. 고수는 고려시대에 한반도 땅에 전래돼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는 식재료로 한반도에서 고추를 먹었던 역사보다도 오래됐다. 고수라는 한국 이름을 갖고 있고 빈대 냄새와 비슷하다고 해서 빈대풀로도 불렸다. 파주 이외에 강화도, 황해도 남부, 전라도 일부 지역에서도 고수를 음식에 사용하고 있다.

파주에서는 김장철이 되면 고수김치를 담아서 겨우내 먹곤 한다. 또한 고기 먹을 때 쌈채소로 고수를 곁들여 먹곤 해서 어느 식당을 가든 상추 위에 고수가 올라가는 걸 볼 수 있다고 한다. 삼겹살과 고수의 조합은 한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먹어본 사람은 없다는 최강 꿀조합이라고 하니 파주에 가거든 한번 먹어보자.

로타리 삼겹살
경기 파주시 시청로 3-4
031-941-7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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