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찾아 떠난 대만의 진과스
가을 찾아 떠난 대만의 진과스
  • 글 사진 이두용
  • 승인 2018.10.1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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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ime with cats, rain & tea

동물을 직접 키우지 않는다. 그렇다고 딱히 싫어하는 건 아니다. 그걸 아는지 고양이나 개가 먼저 와서 꼬리를 흔들거나 아는 척하는 일은 없다. 진과스에서 길을 잃었던 날, 멈칫거리며 서 있는 내게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와 몸을 비비며 주변을 맴돌았다. 순간 긴장이 풀렸다. 긴장할 것도 고민할 것도 없는 인생이다. 결국 마음가짐의 결과가 행동으로 나타난다. 다른 여행보다 생각이 많았던 대만. 마주한 모든 것이 의미 있었다.

고양이에게 방법을 찾다
고양이 사진을 찍은 건 오래됐다. 관악산 근처에 살다 보니 깊은 밤 사람 목소리로 우는 고양이와 자주 만났다. 녀석들은 처량하게 울다가도 나를 맞닥뜨리면 머쓱한지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자주 봤어도 친해지지 못한 걸 보면 둘 중 하나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친하지 않아도 고양이를 유독 많이 찍는다. 얼추 몇 천 장은 되지 않을까.

대만에 도착하고 첫 일정을 진과스(金瓜石)로 잡았다. 진과스는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台北)에서 북쪽으로 2시간 정도 떨어진 폐광촌이다. 대만도 우리나라처럼 일제강점기를 거쳤는데, 당시 엄청난 금과 은 생산량으로 많은 일본인이 이곳에 머물며 채굴 작업을 했다. 하지만 생산량이 줄면서 폐광했고 사람이 떠난 마을은 시간을 몸에 두르며 자연과 동화돼 갔다. 관광지로 유명해진 지금도 마주한 바다를 제하곤 사방이 온통 숲일 수 있는 이유다.

태어나서 줄곧 산을 곁에 두고 자란 터라 국내외 어딜 가도 도시보단 자연이 좋다. 진과스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여행 책을 펼쳤다. 능선으로 켜켜이 이어진 산이 가장 인상적이다. 그런데 이심전심.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 능선과 계곡을 이어 여러 개의 트레킹 코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자연으로 들어가 걷고 싶은 건 우리나 대만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버스에서 내렸는데 하늘이 흐리다. 연평균 기온 약 23도의 아열대성 기후라더니, 오늘이 1년 중 가장 추운 날이었던가. 긴팔 옷을 입고도 쌀쌀하다. 빨리 돌아볼 요량으로 코스를 짰다. 이곳 여행은 가장 안쪽인 권제당(勸濟堂)을 시작으로 황금박물관을 본 뒤 버스를 타고 지우펀(九份)으로 이동해서 지산제(基山街)~수치루(竪崎路)를 보는 코스가 적당하다.

권제당에 들어서니 누가 귀라도 막은 듯 순간 고요해진다. 모든 사당이 그렇듯 적막과 함께 마음도 경견해졌다. 이곳은 소설 삼국지에 등장하는 관우를 모신 사당이다. 대만과 중국을 비롯한 중화권 사람들에게 관우는 의와 부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지붕 곳곳에 화려한 의복을 갖춘 삼국지 주인공들이 서 있다. 사당 뒤편에는 거대한 관우 좌상이 세워있다. 12m나 된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당장이라도 일어나 창을 휘두를 것처럼 위풍당당하다.

관우 좌상 옆으로 길이 나 있다. 좁다란 길을 따랐는데 집 몇 채를 지나니 방향을 통 모르겠다. 지도에는 권제당 정문으로 나와서 내려가라고 쓰여 있었다. 여기가 지름길이라고 짐작하고 왔는데 점점 낡은 가옥만 이어진다.

그때 풀숲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러더니 내게 다가와 다리에 머리를 비비적댄다. 살짝 다리를 벌려주니 그사이를 오가며 주위를 맴돌았다. 느닷없는데 반갑다. 고양이가 먼저 다가와 준 게 얼마 만인가. 길을 잃은 것도 제쳐두고 다리를 구부리고 앉아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눈을 감은 채 ‘그르렁그르렁’ 소리를 내며 좋아한다. 순간 나도 미소가 나오며 긴장이 풀렸다. ‘길이야 찾으면 되고 굳이 코스대로 안 가도 되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빗물에 마음을 헹구다
고양이와 안녕하고 일어났다. 여행이 숙제는 아니니까 정해진 대로 할 필요는 없었다. 잘못 왔다고 생각한 길을 다시 걸었다. 막아설 것만 같던 길이 계속 열리더니 저 멀리 황금박물관이 보였다. 진짜 지름길처럼 여행 책의 안내보다 빨리 왔다.

박물관은 과거 광산을 복원해 조성한 공원과 당시 쓰이던 장비들, 2층짜리 건물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 안에는 다양한 금붙이가 있는데 최고 인기는 220kg짜리 금덩이다. 알고 간 사람도 눈앞에 황금을 보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절대반지를 본 골룸처럼. 금전의 복을 받고 싶은 사람들은 유리관 구멍에 손을 넣어 금덩이를 만지며 소원을 빈다.

개인적으론 가질 수 없는 금보다 과거의 모습을 재현해놓은 마당과 철길, 근처의 집들이 더 인상 깊었다. 일제 치하에 있었던 터라 이곳 가옥들도 일본의 영향이 남아있다. 식사 때 왔다면 광공식당(鑛工食堂)에 들러보자. 광부가 먹던 식사를 요즘 입맛으로 재구성한 ‘광부도시락’이 인기다. 일제 치하에 먹었다고 하기엔 반찬이 너무 고퀄이다. 제법 맛도 있다.

식사를 마쳤는데 갑자기 가랑비가 내렸다. 이 정도 비는 누구와 어디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운치가 있을 수도 최악의 상황일 수도 있다. 사실 진과스에 오기 전날 타이베이엔 소나기가 내렸다. 우산 하나 없이 카메라만 들고 나갔다가 길거리 상점 처마 밑에 들어가 이도 저도 못 하고 있었다. 시장하던 터라 한국인이 많이 찾는다는 딤섬 가게에 가려고 나왔었는데.

그런데 신기한 건 마음가짐이었다. ‘숙소까지 어떻게 가나’ 싶더니 10여 분을 비만 쳐다보고 있으니 ‘언제 대만에서 이렇게 비 오는 걸 보겠어’하고 바뀌었다. 그때 상점 주인이 다가와 뭐라고 얘기하며 빗물에 젖은 우비를 하나 내밀었다. 자신이 입고 있던 것이다. 내가 주저하자 미소를 보이며 다시 뭐라고 하며 뻗은 손을 흔든다. 받아서 재빨리 입고는 허리 숙여 인사하고 돌아섰다. 감사하다.

빗속으로 들어가니 좋다. 우비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음악소리 같다. 주저 없이 사진을 찍었다. 고작 얇은 비닐 한 장 걸쳤는데 마음이 이렇게나 편하다니.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기 짝이 없다. 우비를 입고 오토바이에 올라 빗속을 질주하는 사람이 많다. 사실 대만은 출퇴근 시간 도로를 가득 채우는 오토바이 행렬이 장관이다. 베트남에서 본 거리의 오토바이 풍경과 닮았지만, 또 확연한 차이가 있다. 들어가서 보고 느껴야만 아는 것이다.

비가 많이 내려서 바지 밑단이 금세 축축해졌다. 신경 안 쓰기로 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골목골목을 누비며 셔터를 눌렀다. 이국적이지만 사람의 삶은 비슷하고, 다른 언어와 다른 생김이지만 느끼는 감정은 또 닮았다. 비가 멈추고 우비를 돌려주러 상점을 찾았는데 철제 셔터가 내려와 있었다. 곱게 접어서 앞에 두고 돌아왔다.

차와 대화에 담은 온기
다시 진과스. 도시락을 다 먹으면 철제 도시락과 그걸 감싸는 보자기는 기념품으로 가져갈 수 있다. 튼튼하진 않지만, 기념이 될 만하다. 이곳에서 지우펀으로 향했다. 이곳은 ‘지산제로 시작해서 수치루로 끝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코스가 명확하다. 버스든 택시든 이곳에 와서 “지우펀에 도착했습니다”라는 말을 들었다면 그곳이 지산제 입구다. 지역의 명물을 파는 골목인데 연중 인파로 넘쳐나서 처음 온 사람은 ‘오늘 무슨 날인가?’하고 생각할 정도다. 하지만 그날이 그날이다.

안으로 들어서니 먹거리와 기념품을 파는 상점이 줄을 잇는다. 한국인에겐 땅콩 아이스크림과 소시지가 인기다. 가끔 취두부에 도전하는 사람도 있는데 개인적으론 냄새만 맡고도 양손을 다 들었다.

수취루는 가파른 언덕에 촘촘하게 지어진 집들 사이사이의 골목이다. 일제 강점기부터 지어진 건물들 틈으로 홍등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다. 별들이 소곤댄다는 홍콩은 사실 밤이 더 빛나는 홍등의 행렬 때문에 생긴 말이다. 하지만 현재 수취루만큼 과거 중화권의 홍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도 없다. 이곳의 밤 풍경과 한가운데 서 있는 건물이 독특하고 아름다워 미야자키 하야오는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수취루를 등장시켰다.

석양이 물드는 시간 주변에 지천인 찻집에 들어가 하나둘 불을 밝히는 홍등을 바라보는 게 이곳의 낭만이다.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는 찻집은 현재 이곳의 명물이 되어 수취루 근처를 가득 메웠다. 차에 대해 일자무식이지만 몸에 온기를 담고 여러 잔 마실 수 있어 커피보다 좋다. 눈앞으로 바다와 산봉우리가 그린 수묵담채화가 펼쳐진다. 동양인이라야 더 오롯하게 느낄 수 있는 감성이다.

사실 비를 맞고 들어간 숙소 휴게실에서 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역시 하루 전날. 북경에서 왔다는 20대 처자. 대학교에서 차를 전공했고 계속 공부하고 있다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더니 자기 방으로 돌아가 뭔가를 챙겨서 나온다. 차 도구다. 어디를 가든 꼭 가지고 다니는데, 여정의 거리와 기간에 따라 가짓수가 다르다고 한다. 그리곤 한의사가 정성스레 약을 달여내듯 여러 과정을 거쳐 차 한 잔을 건넨다. 눈으로 보고 느껴진 정성이 있어 맛도 더 깊게 느껴졌다.

사실 지인 중에도 차 전문가가 있다. 그분 집은 거실 한편이 예쁜 찻잔으로 벽을 이룬다. 차만 보관하는 방에 들어가면 분위기에 압도된다. 그 방에 앉아 차와 함께 나긋하게 얘기를 나누면 묵은 고민도 씻기는 기분이었다.

차의 종류도 다르겠지만 누구와 어디서 어떤 상태로 마셨는지가 더 중요한 것 같다. 차는 때로 제멋대로 널뛰는 마음을 정갈하게도 하지만 풍경에 곁들이면 술을 마시듯 깊게 취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사방이 어두워지며 날씨는 쌀쌀해졌지만, 시간이 갈수록 차를 들이켠 가슴은 점점 따뜻했다. 수취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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