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건 가슴이야. 뭔가가 명치에 걸려 있어”…<채식주의자>
“아픈 건 가슴이야. 뭔가가 명치에 걸려 있어”…<채식주의자>
  • 오대진 기자|사진 정영찬 기자
  • 승인 2016.09.21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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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YLE|BOOK

“아버지,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순간, 장인의 억센 손바닥이 허공을 갈랐다. 아내가 뺨을 감싸쥐었다.
“아버지!”
처형이 외치며 장인의 팔을 잡았다. 장인은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입술을 실룩거리고 있었다. 한때 성깔이 대단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장인이 누군가에게 손찌검하는 광경을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정서방, 영호, 둘이 이쪽으로 와라.”
나는 머뭇거리며 아내에게 다가갔다. 뺨에서 피가 비칠 만큼 아내는 세게 맞았다. 그녀는 그제야 평정이 깨진 듯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두 사람이 영혜 팔을 잡아라.”
“예?”
“한번만 먹기 시작하면 다시 먹을 거다. 세상천지에, 요즘 고기 안 먹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불만스러운 얼굴로 처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나, 웬만하면 먹어. 예, 하고 먹는 시늉만 하면 간단하잖아. 아버지 앞에서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장인이 고함쳤다.
“무슨 얘길 하고 있어. 어서 팔 잡아라. 정서방도.”
“아버지, 왜 이러세요.”
처형이 장인의 오른팔을 잡았다. 장인은 이제 젓가락을 내던지고, 손으로 탕수육을 들고 아내에게 다가갔다. 아내가 엉거주춤 뒷걸음질치는 것을 처남이 붙잡아 바로 세웠다.

…… 내 다리를 물어뜯은 개가 아버지의 오토바이에 묶이고 있어. 그 개의 꼬리털을 태워 종아리의 상처에 붙이고, 그 위로 붕대를 친친 감고, 아홉 살의 나는 대문간에 나가 서 있어. 무더운 여름날이야. 가만히 있어도 땀이 뻘뻘 흘러내려. 개도 붉은 혓바닥을 턱까지 늘어뜨리고 숨을 몰아쉬고 있어. 나보다 몸집이 더 큰, 잘생긴 흰 개야. 주인집 딸을 물어뜯기 전까진 영리하다고 동네에 소문났던 녀석이었지.
아버지는 녀석을 나무에 매달아 불에 그슬리면서 두들겨패지 않을 거라고 했어. 달리다 죽은 개가 더 부드럽다는 말은 어디선가 들었대. 오토바이의 시동이 걸리고, 아버지는 달리기 시작해. 개도 함께 달려. 동네를 두 바퀴, 세 바퀴, 같은 길로 돌아. 나는 꼼짝 않고 문간에 서서 점점 지쳐가는, 헐떡이며 눈을 희번덕이는 흰둥이를 보고 있어. 번쩍이는 녀석의 눈과 마주칠 때마다 난 더욱 눈을 부릅떠.
…(중략)… 그날 저녁 우리집에선 잔치가 벌어졌어. 시장 골목의 알 만한 아저씨들이 다 모였어. 개에 물린 상처가 나으려면 먹어야 한다는 말에 나도 한입을 떠넣었지. 아니, 사실은 밥을 말아 한그릇을 다 먹었어. 들깨냄새가 다 덮지 못한 누린내가 코를 찔렀어. 국밥 위로 어른거리던 눈, 녀석이 달리며, 거품 섞인 피를 토하며 나를 보던 눈을 기억해. 아무렇지도 않더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어.

저 여자가 왜 우는지 나는 몰라. 왜 내 얼굴을 삼킬 듯이 들여다보는지도 몰라. 왜 떨리는 손으로 내 손목의 붕대를 쓰다듬는지도 몰라.
손목은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아픈 건 가슴이야. 뭔가가 명치에 걸려 있어. 그게 뭔지 몰라. 언제나 그게 거기 멈춰 있어. 이젠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도 덩어리가 느껴져. 아무리 길게 숨을 내쉬어도 가슴이 시원하지 않아.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한번만, 단 한번만 크게 소리치고 싶어. 캄캄한 창밖으로 달려 나가고 싶어. 그러면 이 덩어리가 몸 밖으로 뛰쳐나갈까. 그럴 수 있을까.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아무도 날 살릴 수 없어.
아무도 날 숨쉬게 할 수 없어.

<채식주의자> 49~50, 52~53, 60~61쪽에서 발췌

▲ 채식주의자 한강 지음(2007.10, 창비)
기분이 급격히 침울해지고 고독해졌다. 사실적인 묘사와 표현, 상황전개에 분노가 치밀었고 소통 없는 가족의 모습에 가슴의 응어리만 커져갔다. <채식주의자>는 어린 시절 각인된 기억 때문에 육식을 거부하는, 그런 영혜를 바라보는 그의 남편 ‘나’의 이야기이다. 표제작인 <채식주의자>와 2부 <몽고반점>, 3부 <나무 불꽃>으로 구성된 연작소설로, 각 이야기는 다른 인물의 시선으로 그려지지만 하나의 내용으로 이어진다.

작가 한강은 겉으로 비춰지는 모습보다 더 깊고 진한 분위기로 독자와 만난다. 늦가을, 쓸쓸한 낙엽길을 걷는 듯한 그의 이야기 풍경이지만 결코 침울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서정적이다.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그의 이름을 환히 밝혔다. 그리고, ‘한강’과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의 권위를 드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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