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벽을 누비는 작은 거인
암벽을 누비는 작은 거인
  • 이주희 기자|사진 양계탁 기자
  • 승인 2016.08.04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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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머 천종원

선한 눈매와 해사한 미소, 단정한 느낌의 말간 얼굴. 클라이머 천종원의 첫인상은 순진무구한 소년 그 자체다. 그가 암벽화를 단단히 동여매고 하얀 초크 가루를 잔뜩 묻힌 채 벽 앞에 선다. 예리한 눈빛, 간결한 몸짓으로 홀드를 움켜쥐며 거침없이 문제를 풀어나간다. 조금 전 소년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이제야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볼더링계의 작은 거인 천종원, 그가 맞다.

암벽 좀 탄다 하는 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 천종원. 그는 지난해 아시아 최초로 볼더링 남자부문 세계 랭킹 1위를 차지한 인물이다. 고작 스무 살의 나이, 성인 무대에 나선 지 2년 만이다. 촉망 받는 신인에서 단박에 세계 챔피언 자리를 꿰차며 볼더링계를 접수했다.

“지난해 모든 월드컵 경기가 생각보다 잘 풀렸어요. 운이 좋았죠. 어린 나이에 세계 랭킹 1위라니 부담스럽지 않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있는데, 전 부담감보다 그냥 제 자신이 자랑스러워요. 열심히 훈련했던 시간들이 빛을 보는 것 같아 뿌듯해요.”

천종원 선수가 처음 스포츠클라이밍을 경험하게 된 건 열세 살 때다. 또래 아이들처럼 공부보다 노는 게 좋았던 나이인지라 한 달 정도 하다가 그다지 재미를 못 느끼고 그만 두었다. 스포츠클라이밍과의 인연은 중학교 3학년 때 다시 이어졌다. 아들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본 어머니의 권유로 클라이밍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것.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선수를 하기로 맘먹고 나선 거였다. 처음에는 리드 선수로 활동을 했는데 만족할 만한 성적을 거두진 못했다. 오히려 재미 삼아 나간 볼더링 대회에서 성적이 훨씬 잘 나왔다. 민현빈 선수도 볼더링으로 넘어가는 게 어떻겠냐고 권하면서 2014년부터 볼더링으로 아예 전향을 하게 됐다.

볼더링으로 종목을 바꾼 이후 독일 아디다스 락스타 볼더링 대회 2위, IFSC 중국·캐나다 월드컵에서 4위를 차지하며 두각을 드러냈다. 그리고 2015년. 스포츠클라이밍을 시작한 지 5년, 볼더링을 한 지 2년 차에 세계 챔피언이 됐다. 단숨에 세계 최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176cm 키에 53kg, 호리호리한 몸매에 긴 팔과 다리가 볼더링에 적합한 것 같아요. 그리고 지극히 당연한 얘기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훈련량이죠. 하루에 보통 5시간 정도 훈련을 해요. 이틀 하고 하루 쉬어요. 이 정도는 해야 스스로를 믿고 경기에 임할 수 있죠. 또 하나 중요한 것이 ‘감’이에요. 볼더링 대회는 지난주에 1등한 선수가 이번 주에 예선 탈락한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어요. 변수가 많거든요. 때문에 홀드를 잡는 감, 경기에 대한 감을 잘 찾아야 해요. 그 감을 찾기가 좀 힘들긴 한데 이것만 잡으면 자신감이 붙어서 매 경기가 술술 풀려요.”

한참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은 나이 스물 하나. 가끔은 암장에 틀어박혀 있는 게 지겹진 않을까 싶은데, 노는 것보다 운동이 더 재미있단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했던가. 즐겁게 운동에 임하다 보니 ‘최강자’라는 타이틀도 자연스레 따라왔다. 꼭 맞는 암벽화 때문에 잔뜩 굽어지고 굳은살이 배긴 발이 이제는 자랑스런 훈장이 되었다.

고된 훈련 속에 그에게 큰 힘이 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사솔 선수다. 이들이 교제한 지도 어느새 4년째.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만큼 의지하고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 서로 문제를 내고 알려주기도 하면서 훈련을 같이 하니 도움도 많이 된다. 여가 시간에는 보통의 연인처럼 영화 보고 맛있는 것도 먹으며 데이트를 즐긴다고.

올시즌 천종원 선수는 다소 부진한 성적을 냈다. IFSC 볼더링 월드컵 대회 1차와 2차에선 결승에 오르지도 못했고 3차에선 3위, 4차 대회에는 4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다행히 5차 인스부르크 대회에서 시즌 첫 우승을 따내며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인스부르크 대회는 결코 잊지 못할 경기가 될 거예요. 4차 대회까지 성적이 좋지 않아서 정말 잘하고 싶었거든요. 바람대로 압도적인 격차로 1등을 해서 기분이 무지 좋았어요. ‘할 수 있다’라는 믿음도 더 생겼고요.”

요새는 앞으로 줄줄이 이어진 대회를 위해 훈련에 더욱 몰입하고 있다. 8월 3일 아시안 챔피언십 경기가 있고, 8월 12~13일에는 IFSC 볼더링 월드컵 마지막 대회가 뮌헨에서 열린다. 뮌헨 대회를 잘 치러서 시즌 랭킹 3위 안에 드는 것이 당장의 목표다. 이어 9월 14~18일에는 2년에 한 번 개최되는 월드 챔피언십 대회에 참가한다. 11월 말에는 오랜 꿈이었던 라스포르티바 레전드 대회에 출전한다. 전 세계에서 한 해 가장 뛰어난 기량을 펼친 선수 6명을 선발하는데 여기에 당당히 뽑히게 됐다. “월드컵보다 난이도가 높고 경기 방식도 특이해서 새로운 재미가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이 한껏 들떠 보였다.

천종원 선수는 지나온 시간보다 앞으로 나아갈 시간이 더 많다. 이제 스물한 살,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 끊임없는 훈련으로 자신을 다잡으며 더 높은 곳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천종원. 지금도 그의 열정은 현재진행형이다.

“은퇴하기 전까지 세계 랭킹 1위 자리를 계속 지키는 게 제 꿈이에요. 대회마다 스타일이 다르고 문제들도 엄청 다양해서 매년 1위를 유지한다는 건 사실 힘든 일이죠. 하지만 지금처럼 꾸준히 열심히만 한다면 무리 없이 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볼더링은 노력을 배반하지 않거든요. 세계 랭킹은 2년 성적을 쌓아서 순위를 매기는데 아직까지는 2위랑 격차가 꽤 나요. 은퇴 전까지 이대로 쭉 세계 랭킹 1위이고 싶어요.”

우리나라 스포츠클라이밍 문화에 대한 아쉬운 점도 털어놓았다. 최근 볼더링을 즐기는 이들이 제법 늘긴 했지만 아직은 볼더링보다 리드를 즐기는 이들이 더 많다는 것. “외국은 볼더링 인구가 리드보다 훨씬 많고 전용 암장도 많이 있어요. 왜냐하면 별다른 장비 없이 다같이 쉽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으니까요. 그에 반해 한국에선 홀대 받는 것 같아서 조금 씁쓸해요. 앞으로는 볼더링 선수도 대회도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볼더링 선수들을 양성하고 지원하는 기반도 제대로 갖춰졌으면 해요. 이런 제도가 뒷받침된다면 볼더링 강국이 되는 건 시간문제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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