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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던 멕시코를 떠나다
사랑했던 멕시코를 떠나다
  • 글 사진 정효진 기자
  • 승인 2016.02.2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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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여행자의 지구별 자전거 여행

멕시코시티로 출발하기 전, 과달라하라에서 본 멕시코시티의 지도는 나를 놀라게 했다. 해발 2,420m, 한국에서 제일 높은 한라산은 1,950m다. 최대한 산을 피하며 멕시코시티에 도착하는 경로를 찾아야 했다.

▲ 4,000km 주행 후 기념샷.

아이들의 크리스마스

아직은 여행초보자라 산이 무섭다. 산을 피하는 경로를 선택하다 보니 라피에다라는 중소도시를 지나가게 됐다. 라피에다 진입 전 오르막이 계속됐다. 힘들었지만 멕시코 여행이 막바지다. 페달을 밟는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라피에다에 도착해 호스트를 만났다. 호스트 라우라는 나를 레예스마고스 이브에 친척 집에 데려갔다. 레예스마고스는 아이들을 위한 멕시코만의 크리스마스 행사다. 1월 6일인 레예스마고스는 12월 24일에 태어난 아기 예수를 찾아 멀리 동방에서 떠난 3인의 왕들이 뒤늦게 마구간으로 찾아와 아기 예수에게 선물을 준 데서 유래됐다.

▲ 멕시코의 크리스마스 레예스마고스 날 현지인들과 함께 소중한 시간을 보내다.

라우라의 부모님은 라우라가 어릴 적, 동방박사가 진짜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그들이 왔다 간 흔적을 남겨놓곤 하셨단다. 멕시코만의 아름다운 축제 레예스마고스. 이브인 1월 5일, 라우라의 친척집에서 멕시코 고유의 전통을 느낄 수 있었다.

이브에는 먼저 로스까 데 레예스라는 둥근 띠처럼 생긴 빵을 나눠 먹는다. 안에는 하얀 플라스틱으로 된 작은 인형이 있는데, 빵 안에서 인형이 나온 사람은 다음 달에 따말(멕시코 전통 음식)을 사야 한다. 어떤 지역은 인형이 나온 사람이 직접 따말을 만들기도 한다. 벌칙(?)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빵을 먹는 행사는 공통이다.

한 사람씩 나와서 차례대로 빵을 잘랐다. 다행히 내 빵 안에서는 인형이 나오지 않았다. 라우라는 “신발을 트리 밑에 넣어두면 동방박사가 돈을 주기도 하니 오늘 밤은 그렇게 해보라”며 농담을 했다. 멕시칸들과 전통적인 가톨릭 의식을 함께 즐길 수 있어서 즐거웠다.

▲ 멕시코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내 기사가 실렸다.
라우라 가족과의 시간
레예스마고스 당일에도 라우라의 친척과 함께 보냈다. 친척 중 한 명이 말 농장을 갖고 있었다. 라우라의 사촌 까를로스, 그의 동생 알뚜라와 함께 말 농장에 갔다. 미국에서 한번 말을 탄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말을 탔다기보단 잠깐 말에 앉기만 했다. 이번에는 말을 타고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까를로스가 내 뒤에 앉아 말 타는 법을 알려줬다.

말이 달릴 때는 당장에라도 땅에 곤두박질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처음 타보는 말은 마치 놀이기구를 타는 것 같았다. 익숙해지자 혼자 말을 타기도 했다. 말을 세우는 방법부터 시작해서 움직이는 방법까지 배웠다. 심지어 말 타고 달리기까지. 처음에 말이 달릴 때는 엉덩이가 아파서 ‘왜 사람들이 말을 즐겨 타나’ 싶었는데, 타다 보니 매우 즐거웠다.

이후엔 모두가 시내 구경을 하러 갔다. 많은 아이가 손에 선물을 들고 다녔다. 새 장난감을 갖고 길에서 노는 아이들도 보였다. 아이들은 미리 3인의 동방박사에게 받고 싶은 선물을 적어 풍선에 매달아 놓는다. 어느 꼬마의 풍선이 전깃줄에 걸려있었다.

▲ 빵을 잘랐을 때 하얀 인형이 나오면 다음 달에 따말을 사야 한다.

▲ 생애 처음으로 말타기를 배우다.

기쁘거나 혹은 슬프거나

라우라의 집을 떠나는 날 깜짝 놀랄 일이 생겼다. 며칠 전, 라우라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근처에서 누군가가 손을 흔들며 내 사진을 찍었다. 단순히 내가 신기해 보였나 보다, 라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한 지역 신문의 기자였다. 라우라가 내가 신기했던지 기자에게 제보한 것이었다. 나는 종일 오르막을 올라 초췌한 몰골로 인터뷰를 했다. 당시 사촌 까를로스가 미국에서 공부해 스페인어를 못하는 나를 대신해 통역했다.

떠나는 날 아침 신문이 나왔다. 촬영 카메라가 일반 소형 카메라라서 손바닥만 하게 기사가 나올 줄 알았는데 신문을 펼쳐보니 내 이야기가 한 면을 다 차지했다.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신문을 세 장 확보했다. 한 장은 나를 위해, 한 장은 나중을 위해, 한 장은 나의 꿀리아깐 친구에게 보내주기 위해서이다.

▲ 분홍색 장화를 신은 아이가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다.

라우라의 집을 떠나서 자전거를 타고 다음 도시로 이동했다. 인터넷으로 알 게 된 멕시칸 친구가 그의 친구 집을 소개해 줬다. 호스트를 집 앞에서 기다리다가 마음 아픈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남들이 보기엔 초점이 맞지 않은 평범한 사진이다. 하지만 난 그 사진을 볼 때마다 가슴 한쪽이 쓰리다.

분홍색 장화를 신은 한 아이가 수레를 끌고 오더니 커다란 쓰레기 봉지를 뒤지는 사진. 쓰레기 봉지 옆엔 커다란 빈 장난감 상자가 있었다. 뒤이어 한 할머니도 같이 쓰레기를 뒤졌다. 뭐가 잘못 되었기에 분홍색 장화를 신은 귀여운 꼬마는 쓰레기를 뒤지고 있는 걸까? 아이는 1월 6일 동방박사에게 선물을 받았을까?

▲ 테오티우아칸 피라미드.

멕시코시티가 의미하는 것

조금만 더 달리면 드디어 멕시코시티에 도착한다. 중간에 시골 마을에서 하루 머무른 다음에 멕시코시티에 가려고 했지만, 마땅히 머무를 곳이 없었다. 거기다 멕시코시티의 호스트가 픽업해줄 수 있으니 연락을 달라기에 최대한 갈 수 있는 데까지 갔다. 오후 5시쯤 이미 120km를 넘게 달렸다.

더 달리다간 어두운 고속도로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될까 봐 주유소에 들렀다. 주위에 있던 멕시칸에게 휴대전화를 빌려 멕시코시티의 호스트에 연락했지만, 전화통화가 되지 않았다. 다행히도 나에게 휴대전화를 빌려준 이가 멕시코시티까지 차를 태워줬다. 도착 후 우여곡절 끝에 호스트 집에 도착했다.

나에게 있어 멕시코시티는 큰 의미가 있다. 많은 사람이 나에게 멕시코 북부는 위험하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차라리 버스를 타고 멕시코시티까지 간 뒤 거기서부터 자전거를 타라고 충고했다. 미국에 있을 땐 멕시코가 무서워 유럽 가는 비행기 표도 알아봤다. 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이 멕시코에서 무사히 살아서 돌아왔다. 나와 주변 사람을 믿고 멕시코 국경을 건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는 멕시코 남부에 다다랐다.

▲ 멕시코의 가족들과 매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 멕시코는 스킨십이 무척 자연스럽다. 이런 연인의 모습은 흔하고 게이나 레즈비언 커플도 쉽게 만날 수 있다.

내 세계여행에 큰 계획은 없다. 다만 다음 목적지 정도는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할 때 LA에 도착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LA에 있을 때는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렇게 미국의 대도시를 다 거쳤다.

멕시코 국경을 넘어선 내가 과연 로스모치스에 갈 수 있을까 궁금했고, 로스모치스에서는 과달라하라가 큰 산처럼 보였다. 그리고 과달라하라에 있을 땐 멕시코시티가 가장 큰 산처럼 보였다. 여행은 계속 산 넘어 산이다. 작고 큰 산들을 넘어 멕시코시티까지 왔다.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은 다음 대도시인 베라크르주, 그다음 과테말라, 중미, 남미,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오세아니아, 집이다. 멕시코시티는 내가 넘어야 할 수만은 산 중의 하나지만 지금 당장 나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산이었다. 산 넘어 산, 아니 꿈 넘어 꿈이다. 지금은 달콤한 꿈을 만끽할 시간이다.

▲ 내가 자전거로 이동한 경로를 팬으로 표시해달라고 하기에 선을 그어보니 얼마 안 된다. 역시 갈 길이 한참이나 멀다. 까를로스는 우리가 현재 있는 곳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인터넷에 올린 글을 보고 멕시코시티에 사시는 한국 분이 연락을 해왔다. 부담 갖지 말고 편히 쉬다 가라는 자상한 내용이 담겨있었다. 드디어 그분을 만나게 되었다. 메시지를 주신 분은 멕시코에서 6년 넘게 가족과 살고 있었다. 처음엔 그분에겐 언니, 그리고 그분 남편에겐 오빠라고 불렀으나 그냥 엄마, 아빠라고 부르라며 친절히 대해주셨다.

덕분에 정말로 엄마 아빠라고 부르게 되었다. 17살짜리 쌍둥이 남동생들도 생겼다. 멕시코에는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지만 이렇게 자상하게 연락을 주신 분은 멕시코 엄마가 처음이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한국 밥상을 보게 되었다. 밥상이 감동적이어서 한참을 쳐다봤다.

멕시코 가족과 이웃집 언니, 오빠들과 삼겹살을 먹으러 가기도 했다. 멕시코시티에 있는 한국식당은 물가가 비싸다. 한국 돈으로 소주 한 병에 만원이다. 김치찌개도 만 원이다. 수입품(?)이라 그렇겠지만 얻어먹기 죄송스러웠다.

처음엔 멕시코시티에 10일 정도만 머물려고 했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엄마와 가족들이 있어 한 달을 넘게 머물게 되었다. 엄마는 내게 스페인어 학원비를 내 줄 테니 배우는 대신, 쌍둥이 동생들의 영어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

멕시코 돈으로 화투도 치고 한국 음식점도 몇 번을 가고 계곡에 놀러 가서 고기도 구워 먹었다. 행복한 시간이 많았다. 한국 설날을 함께 지낼 수 있어서 덕분에 떡국도 먹고 정말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멕시코의 유명한 테오티우아칸 피라미드도 구경했다. 테오티우아칸은 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피라미드 유적지다. 2000년 전에 만들어진 이 피라미드의 크기에 감탄하며 역사를 느꼈다.

▲ 멕시코시티를 떠나기 전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앨범으로 만들었다.

멕시코라는 매력적인 나라

멕시코시티에 지내면서 멕시코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됐다. 멕시코시티는 서울보다 교통체증이 심하고 운전 매너들도 좋지 않았다. 신기한 점은 일요일 아침 8시부터 오후 2시까지 중앙도로를 막고 전체가 자전거 도로로 변한다. 그러니까 종로 한복판을 막는 것과 똑같다고 보면 된다.

또 멕시코시티는 한국보다 훨씬 자유롭다. 길거리에 키스하는 연인을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많은 게이 연인을 볼 수 있다. 멕시코시티에는 게이 거리가 있다는데, 내 생각엔 게이 거리가 특별히 존재하진 않는다. 어디서든 키스하고 있는 게이, 레즈비언 연인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거리를 걷다 보면 구걸하는 이들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아무래도 빈부 격차가 너무 심한 거 같다. 분배만 잘 되었어도 이렇지 않을 텐데. 멕시코 물가는 한국과 비슷하지만, 임금은 터무니없이 낮다. 참 슬프다.
멕시코를 여행한 지 어느덧 두 달이 넘어간다. 이 매력적인 곳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니. 벌써 슬픔이 밀려왔다.

▲ 매주 일요일 오전, 주요 거리에 차량을 완전히 통제하고 오로지 자전거만 다닐 수 있게 하는 모습.

또다시 아름다운 이별

한국의 설을 이곳 가족과 함께 보낸 후, 엄마가 병원 치료를 위해 한국으로 떠났다. 2주 뒤에 다시 돌아오기로 약속했다. 내가 머물기로 한 시간이 끝나기 전 엄마와 함께 보낼 수 있는 날은 약 10일 정도. 엄마가 한국으로 가 있는 동안 멕시코 가족과 많은 음식을 해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결국 엄마는 볼 수 없었다. 슬프게도 엄마는 건강상의 문제로 치료를 위해 한국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엄마가 돌아오지 못한다는 소식은 슬펐다. 철이 없는 나는 엄마의 건강보다는 엄마를 못 보고 떠나야 하는 슬픔이 먼저였다. 무심한 시간은 뚜벅뚜벅 우리를 지나갔고, 떠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끝나고 있었다.

엄마가 멕시코에 온 뒤로 가족 앨범이 없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떠나기 전 그동안 찍은 사진으로 가족앨범을 만들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여기까지다. 짧으면 짧고 길면 긴 5주 동안 나는 참 행복했다. 낯선 이를 초대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한 달은 넘게 머물 곳을 제공해준 가족들이 있었다.

막내로 자라온 나는 엄마, 아빠를 부를 수 있던 순간부터 자꾸 개구쟁이가 되어 앙탈을 부려왔다. 비록 엄마와는 인사도 못 하고 떠나지만 우리는 꼭 다시 볼 거다. 그때까지 우리 잠시 안녕해요. 안녕, 사랑하는 나의 멕시코 가족들.

▲ 빈부 격차가 너무 심한 멕시코.

안녕, 다시 돌아올게

멕시코시티를 떠나 해안가 베라크루즈에 가까워지자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 날 미치게 했다. 바로 날씨. 날씨가 무덥다 못해 푹푹 쪘다. 모기도 기승을 부려 잠을 제대로 못 자는 날이 많았다. 한 번은 모기 물린 곳을 세어봤는데 60방이 넘었다. 습한 찜통더위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어쨌든 어느덧 멕시코 여행이 끝나갔다. 멕시코를 여행하며 가장 좋았던 점은 음식 종류가 다양했던 것, 라틴 문화를 접할 수 있었던 것, 멕시칸 팝 음악이 아주 좋았던 것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는 것이다. 멕시코에서 109일을 있었다.

▲ 초코파이 한 상자를 싣고 나니 마치 지구 끝까지 갈 수 있을 거 같다.

인생을 살면서 용기가 필요할 때는 많았다. 하지만 멕시코 국경 넘기는 내가 그동안 인생을 살면서 가장 크게 내었던 용기였다. 그 무섭다던 멕시코, 미국에 있을 당시 90%가 무시무시한 실화를 들려주며 뜯어말렸던 멕시코 자전거여행. 다행히 좋은 사람들 덕분에 무사히 멕시코에서 자전거여행을 끝마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꿀리아깐 친구에게 했던 약속이 생각난다.

“세계여행 무사히 끝마치고 반드시 다시 돌아올게. 그때 또 보자.”
언젠가는 다시 꼭 돌아올 것이다.
그럼 이제, 새로운 대륙 중미로 달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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