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에서 자전거를 탄 지 어느덧 한 달이 되어 간다. 한참 가던 중 물이 떨어졌다. 저 멀리 보이는 사람에게 “아구아 뽈빠볼(물 좀 주세요)”을 외쳤다. 내 물병을 받아 어디론가 간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타코를 건네줬다. 마을 축제가 한창인 곳이었다. 어느새 한 아저씨는 뱀을 들어 올리며 포즈를 취하기까지 했다. 물만 얻을 생각이었는데 어떨결에 타코도 먹고 서커스까지 봤다. 멕시코는 알면 알수록 매력 있는 곳이다.
▲ 차빨라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
점점 괴물이 되어 가나?
드디어 새로운 주에 들어갔다. 씨나로아주다. 씨나로아주의 큰 도시 꿀리아깐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그런데 아뿔싸, 실수했다. 내가 선택한 길은 산이었다. ‘아… 산으로 왔어.’ 이날 이동해야 했던 거리는 150km. 하루 만에, 산을 가로질러 가야 했다. 자칫 잘못하면 산 속에서 자야 한다. 새로운 주에 들어와 더 긴장했나 보다. 다시 돌아가기는 늦었다. 머릿속엔 히치하이크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끝없이 반복됐다. 고개 하나를 넘으면 또 고개가, 그 고개를 넘으면 저기 또 고개가 있었다. 스무고개가 아니라 수십 만 고개 같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뭔가 잘못돼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직 12시밖에 안 되었는데 난 너무 일찍 포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달릴 수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달리자.
▲ 끝없는 언덕을 넘어 신기록 150km를 세웠다. |
▲ 물 얻어먹으러 갔다가 타코까지 얻어먹었다. |
갓길이 없어서 차도를 달렸다. 오르막을 한참 오르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반대편 차들 때문에 추월하지 못한 차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빵빵거리지 않아 전혀 몰랐다. 울컥했다. 스쳐 지나가는 고마운 이들이 참 많다.
결국, 150km를 달렸다. 산을 넘었다. 대단하다, 대단해. 여행을 시작할 땐 오르막마다 자전거를 끌었다. 오늘은 자전거를 한 번도 끌지 않았다. 점점 괴물이 되어가나 보다. 자전거 여행을 시작한 이래, 최대 이동 거리 150km를 산에서 이뤄냈다!
▲ 타코를 먹고 있는데 옆에 있던 아저씨가 갑자기 뱀을 들더니 포즈를 취했다.
▲ 매주 주말이면 함께 모여 바비큐 파티를 하는 까렌 가족.
크리스마스에 기적이?
150km 넘게 달려 도착한 도시 꿀리아깐에는 머물 곳이 있었다. 예전에 내게 머물 곳을 제공해준 현지인이 또 다른 지인을 소개해줬고, 그 지인이 다른 지인을 소개해줬다. 한 사람을 알게 되니 몇 곳이나 지낼 곳이 생기게 된다.
멕시코는 시골에도 무선인터넷이 잘 되어있지만, 비밀번호 때문에 인터넷 접속이 쉽지 않다. 전날 우연히 꿀리아깐의 호스트가 보낸 메일을 확인했다. 때문에 꿀리아깐으로 150km를 달려갔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보냈던 메일이라 서로 소통이 되지 않았나 보다. 내가 도착하는 걸 그쪽에서 모르고 있었다. 150km를 달려서 온 몸이 지쳐 있는 상태에서 4시간을 기다렸다.
알고 보니 그날은 호스트 가족의 파티가 있는 날. 그곳엔 22살의 까렌, 16살의 알렉시스, 부모님이 함께 살고 있었다. 제일 먼저 도착한 까렌이 환하게 문을 열어주며 얼마나 머물 거냐고 물었다. 우물쭈물하다 미안한 마음에 하루라고 대답했다. 깔끔히 샤워하고 이것저것 얘기하던 도중, 까렌이 또다시 얼마나 머물 거냐고 물었다. 망설이다 “이틀?” 이라고 말하자 웃으며 내가 머물고 싶을 만큼 머물러도 된다고 했다.
정말로 이틀만 머물고 떠나려 했는데 알렉시스, 까렌, 부모님, 친척들까지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자고 제안했다. 누군가가 이렇게 환하게 손을 내밀어 주는 것이 얼마 만인지. 참 고마웠다. 그들의 친절함에 마음이 흔들렸다. 알렉시스가 내게 스페인어를 알려주기로 했고, 결국 나는 크리스마스를 이곳에서 보내기로 했다.
▲ 멕시코에서 생애 처음으로 야구장에 갔다.
스페인어 선생님들
알렉시스와 까렌은 약속대로 내게 스페인어를 가르쳐줬다. 알록달록한 펜과 A4용지를 들고 있는 알렉시스는 나의 스페인어 선생님이었고 까렌은 알렉시스의 보조 선생님이었다. 문법부터 시작해 많은 단어를 배웠다. 매 수업시간이 놀이였다. 우리는 정말 많이 웃었다.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까지 그들과 많은 추억을 만들었다. 한국 백화점만큼 크고 세련된 쇼핑몰에서 영화도 보고 아이쇼핑도 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야구장도 갔다. 받은 게 워낙 많았기에 한국 요리를 해주기로 했다. 뜻밖에 꼬치전이 참 쉽고 간편하다. 불고기는 실수로 양념을 잘못 했다. 더 맛있게 해줄 수 있었는데. 파를 넣은 오징어전도 괜찮았다.
▲ 최고의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냈다. |
드디어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가 왔다. 나는 종교가 없다. 다행히도 그들은 그것을 크게 상관하지 않았고, 내게 종교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크리스마스는 단지 빨간 날 혹은 좀 더 외로운 날이라고만 생각해왔는데, 이번 크리스마스는 특별하다.
24일 밤 11시 59분 50초가 넘어가자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25일 00시 00분 00초가 되자 모두 “펠리스나비다(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며 서로를 안아주고 그들의 독특한 인사법(볼을 마주치며 ‘쪽’ 소리를 내는 것)을 해주었다. 큰 사랑을 받은 크리스마스였다. 새벽, 조그마한 선물을 그들의 방문 앞에 놨다. 받은 것에 비해 내 선물은 조그마했다. 마음만큼은 듬뿍 담았다.
크리스마스에 기적이 일어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사람마다 각자의 기적이 다르다. 처음으로 나에게 찾아온 크리스마스 기적, 그 기적은 바로 사랑이었다. 좋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에게 기적 같은 사랑을 받았다. 그들과 헤어지며 참 많이 울었다. 여행이 끝나면 꼭 꿀리아깐에 돌아오겠다고 까렌과 약속했다. 언젠간 다시 그들을 볼 수 있을 거다.
▲ 북미 사람들이 좋아하는 마사틀란 해안가.
실패와 성공의 차이
까렌 가족과 헤어지고 며칠간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해는 나의 감정과 상관없이 매일 뜬다. 페달을 밟아야 했다. 지나는 길목에 있던 해안 도시 마사틀란은 북미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아서 관광객이 많았다. 아름다운 바다 앞에서도 슬프고 외로운 감정이 가시질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길 위에서 자전거여행자를 만났다. 여행을 시작하고 처음이었다. 나는 이전부터 ‘크레이지 가이 온 어 바이크crazyguyonabike.com’라는 미국 웹사이트에 여행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었다. 자전거 여행자 앤디가 내 에세이를 본 적이 있었나 보다. 앤디는 나를 보자마자 이름을 부르길래 깜짝 놀랐다. 앤디는 주변에서 호텔을 잡아 쉰다고 했고 나는 20km 정도를 더 가기로 했다. 이메일 주소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다음날 우연히 앤디를 다시 만났다. 우리는 함께 자전거를 탔다. 그런데 전날 저녁부터 조금씩 아프던 배가 내리막길에서 심해졌다. 도저히 자전거를 탈 수 없어 앤디를 먼저 보냈다. 그리고 길에서 토했다. ‘아플 때는 침대에 누워서 자야 하는데….’ 길 위에서 아프니 서러웠다. 다 토한 뒤 한참 앉아 있다가 히치하이크을 시도했다. 앤젤스 버즈Angeles Verdes라는 차를 얻어탔다. 앤젤스 버즈는 차들이 길 위에서 문제가 있을 때 그들을 무료로 도와주는 정부단체다. 이날 밤 그들의 사무실에 텐트를 치고 잤다.
▲ 500원을 주고 휜 체인을 고쳤다. |
200km 떨어진 과달라하라라는 도시에서 새해를 보내기로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하루에 갈 수 없는 거리다. 가는 길목에 높은 산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몸도 좋지 않았다. 앤젤스 버즈의 직원이 150km 정도 태워줬다.
과달라하라를 50km 남겨두고 히치하이크를 시도했다. 20분이 넘었을 때 큰 트럭 한 대가 섰는데 도저히 믿음직스럽지 않아서 거절했다. 그런데 아뿔싸, 30분, 1시간이 지나도 차가 안 섰다. 꿀리아깐이 그리워지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해는 점점 지는데 한 해의 마지막을 이렇게 보내야 하나. 울지 마, 제발 좀 그만 울자. 2시간이 지나자 차가 한 대 섰다. 난 오늘 울지 않았다.
▲ 내 옆은 알렉시스, 오른쪽 위는 까렌과 그녀의 남자친구.
다시 가족이 생겼다
까렌 가족은 내게 과달라하라라는 도시에 사는 또 다른 가족을 소개해줬다. 따뜻하게 샤워하고 내려와서 새로운 가족과 얘기하며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감사했던 2011년 마지막 날. 그들과 함께 있는 자신을 보니, 알지도 못하는 도로 한복판에서 초라해 했던 시간이 잊혀졌다.
이곳 가족의 이름은 엄마 로레나, 그의 남편 마누엘, 그리고 그의 딸 히메나, 그리고 그들의 아들 마누엘. 멕시코에는 이름을 지을 때 가끔 아들이 아빠의 이름을 그대로 쓰거나 딸이 엄마의 이름을 물려받는 경우가 있다. 이 가족도 마찬가지다.
▲ 과달라하라 시내를 구경했다. |
2011년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2011년의 마지막 날은 특별했고 2012년의 새해는 소중했다. 멕시코에서 보내는 새해는 조금 특별했다. 멕시코에서는 새해 카운트다운을 한 뒤 테이블 위에 있는 포도알을 한 개씩 먹으면서 속으로 소원을 비는 풍습이 있다. 포도알을 하나씩 삼키며 열심히 소원을 빌었다.
신발장에는 여행 가방과 빗자루가 있었다. 여행 가방을 들고 밖에서 왔다 갔다 하면 한 해 동안 여행을 많이 갈 수 있다고 한다. 집 앞에서 빗질을 12번 하면 악운을 물리칠 수도 있다. 새로운 문화를 경험했다.
로레나가 도시에서 50km나 떨어진 차빨라를 구경시켜줬다. 호스트가 이렇게 멀리까지 구경시켜 준 경우는 처음이라서 너무 신났다. 멕시칸들은 콜라를 좋아한다. 덕분에 나도 콜라를 즐겨 먹기 시작했는데, 내가 마셨던 코카콜라는 좀 신기했다. 플라스틱이 아니라 유리병이다! 호스트 가족들과 함께 과자도 먹고 주변 산책을 하다 보니 해가 지고 있었다. 평화롭고 조용했던 차빨라 호수. 돌아오는 길 부리또를 사 먹었다. 마치 오랜만에 가족들과 나들이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 같다.
▲ 앤젤스 버즈의 친절한 직원.
▲ 극적으로 새해 전날 도착해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울지마, 로레나
다들 내가 원하면 더 머물러도 된다고 했지만, 갈 길이 멀어 마음만 감사히 받겠다며 거절했다. 멕시코의 학교는 대부분 7시에 시작한다. 이른 아침부터 딸 히메나와 아빠 마뉴엘과 작별했다. 그들과 인사할 때는 가벼운 마음이었는데 아들 마뉴엘과 엄마 로레나와 인사할 때 갑자기 마음이 뭉클해졌다. 또 눈물이 아른거린다. 그냥 며칠 더 있을 걸 그랬나.
여행하면서 참 많이 울었다. 초반에는 힘들어서 울었고 여행이 안정기에 접어든 후엔 사람과 작별 할 때 울었다. 어떨 땐 작별 후 혼자 편하게 울기도 하고, 작별 전 미리 울어두기도 했다. 가끔 참을 수 없을 만큼 슬프면 그들 앞에서 울기도 했다. 상대방이 내 앞에서 우는 건 한 번도 못 봤다.
▲ 길에서 날 알아보고 내 이름을 부르던 여행자 앤디. |
갑자기 엄마 로레나가 울먹거렸다. 영어로 통역해주던 마뉴엘의 목소리도 떨린다. 꿀리아깐에서 까렌 가족과의 헤어짐, 그리고 과달라하라에서 로레나 가족과의 헤어짐. 갑자기 슬픔이 더 해져서 눈물이 시작됐다.
집을 나서자마자 울기 시작했다. 자전거 페달 밟으며 시작된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잠시 쉬어 로레나가 나를 위해 싸준 간식거리들을 먹는데 또 눈물이 왈칵했다. 오후가 되도록 슬픔을 자제할 수가 없었다. 인가 없는 도로 한복판에 자전거 세워놓고 서럽게 펑펑 울었다.
▲ 마이크로폰으로 내 이름을 부르며 장난치던 경찰. |
내가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건, 그만큼 많은 작별 인사를 했기 때문일 거다. 여기서 멈추면 좋은 사람들을 더는 만날 수 없을 거다. 그러기에 작별인사는 또 다른 만남의 인사다. 알고 있지만 슬픔을 감당할 수 없었다.
사실 꿀리아깐 이후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려웠다. 헤어지는 게 슬퍼서다. 더 이상은 누구와도 헤어지고 싶지 않다. 하지만 잘 안다. 나는 여행자다. 헤어져야 만날 수 있다. 스쳐 지나온 모든 사람과 헤어졌지만 내 마음이 그들과 헤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들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다. 그래. 다시 가자. 전진하자. 더 많은 사람을 만나러 자전거 페달을 밟자.
▲ 현지인 집에서 텐트를 치고 하루를 묵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