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밍은 제 인생 그 자체니까요”
“클라이밍은 제 인생 그 자체니까요”
  • 이슬기 수습기자 | 사진 양계탁 기자
  • 승인 2015.07.06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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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하 스포츠클라이밍 코치

아웃도어와 스포츠에 인생을 건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선택한 인생을 최고로 만들어 가는 그들의 일상은 어떤 모습일까. 색다른 그들의 젊음을 들여다보려 매달 특별한 장소로 초대하기로 했다. 이번 달은 스포츠클라이밍계의 ‘암벽 여제’ 김자인 선수의 친오빠이자 코치인 더자스클라이밍짐 김자하 대표를 만났다.

오늘 특별한 장소로 고르신 곳이 한강이에요. 나와 보니 어떠세요?
굉장히 새로운데요. (웃음) 이렇게 암장 밖에서 운동복을 벗고 인터뷰를 하게 되다니 참 좋네요. 한강은 제게 늘 가까운 곳이에요. 매일 자전거로 강을 따라 출퇴근하고 있어요. 집에서 나와 정릉천을 따라 쭉 내려오면 눈 앞에 펼쳐지는 한강에 기분이 상쾌해져요. 특히 요새 날씨가 환상적이어서 라이딩하기 정말 즐거워요.

페달을 밟으며 달려오는 모습이 행복해 보이셨어요. 자전거를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개인적으로 익스트림 스포츠에 관심이 많아요. 묘기용 자전거인 BMX를 즐기기도 했죠. 하지만 본격적으로 타게 된 건 사실 얼마 안 됐어요. 집에서 암장까지 약 18km 정도인데, 그만한 거리를 자전거로 간다는 건 생각조차 못 했죠. 지금 타고 있는 자전거는 아버지께서 쓰시던 거예요. 다치신 이후로 놀리고 있어 대신 타볼까 시작한 게 이렇게 됐어요. 사실 클라이밍 외에 운동신경은 심각하게 없는 편이예요. 공이 날아오면 무조건 눈을 감아버리죠. 하지만 자전거는 누구나 쉽게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개인적으로 잠수교를 넘어 질주할 때를 좋아해요. 강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올 때 짜릿한 기분이죠.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네팔 대지진 때 부모님께서 사고를 당하셨어요.
네팔로 트레킹 여행을 떠나셨다 지진을 피하지 못하셨어요. 무엇보다 부모님과 연락이 되지 않아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어요. 여진은 계속 일어나고 있고 마음이 답답했죠. ‘한국인 부부 낙석 맞아 중상’이라는 뉴스 보도를 듣자마자 비행기 표를 끊었어요. 도저히 앉아있지 못하겠더라고요. 근데 도착해보니 평화롭게 앉아서 맥주를 들고 계시는 거예요. 기가 막혔죠. (웃음) 그래도 꽤 중상이어서 아버지는 골반과 어깨뼈 골절, 어머니는 십자인대와 손인대 절단으로 수술을 받으셨어요. 주변에서 걱정해주신 덕분에 지금은 많이 회복하셨고요. 오히려 제가 스트레스로 6킬로가량 쪘죠. (웃음)

타투(Tattoo)가 멋져요, 소개좀 해주세요.
십년 전쯤부터 몸 이곳저곳에 타투를 새기기 시작했어요. 뭔가 내게 의미 있는 것들을 더 소중하게 오래토록 기억하고 싶어서요. 팔뚝에는 락, 온, 율, 세 아이의 이름과 ‘Climbing is My Life’라는 문구를, 심장에는 ‘Live Strong, Die Legend’라고 새겨넣었어요. 이 말처럼 멋지게 살다가 이름을 날리고 죽을 수 있었으면 해요. 클라이밍은 그냥 제 인생 자체고요.

2013년에 더자스 클라이밍짐을 열었어요. 특별히 가로수길을 택한 이유라도 있나요?
처음에는 우려의 목소리가 컸어요. “김자하 3개월 안에 반드시 망한다”라고들 했죠. 클라이밍 시설은 교외에 있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하던 때니까요. 하지만 운동 종목을 떠나 하나의 문화로서 젊은이들에게 다가가고 싶었어요.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중심적인 스포츠가 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죠. 실패해도 얼마든지 괜찮다고 믿었어요. 아직 젊으니까요. 그리고 그 전략은 완전히 먹혔다고 생각해요. 반응도 좋고, 주위에 다른 암장들이 생겨나는 걸 보면 우리가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암장 내 구조나 콘셉트가 독특하다고 하던데.
“자스는 운동하는 데가 아니고 문화를 파는 데잖아요”라고 하시더라고요. 맞아요. 운동만 하는 곳은 아니에요. 대단한 것을 가르치는 곳도 아니죠. 기본적인 것들을 알려주고 코스를 준비해 둘 뿐이에요. 조금 더 다양한 문화를 제공하는 복합 공간으로서 다가가고 싶어요. 물론 클라이밍도 함께 즐기고요. 두 달에 한 번씩 회원을 대상으로 자체 대회를 열기도 해요. 대회 땐 회원 대부분이 참가해 팀 대항전을 벌이며 놀죠. 회원끼리의 관계도 돈독해요. 산악회나 스케이트보드 모임, 서핑 모임 등이 활성화되어 있어요. 볼더링 크루도 있고요. 저도 가능한 한 같이 어울리려고 하는 편이에요.

암장 운영과 동시에 김자인 선수의 전속 코치로 지도자의 길을 걷고 계세요. 예전 선수 생활이 그립지는 않으세요?
안 그립다고 하면 거짓말일 거예요. 경기를 보다 보면 ‘나도 저기에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선수 대신 암벽을 오르고 싶을 때도 있어요. 2011년 스포츠클라이밍 선수권대회 볼더링 1위를 마지막으로 은퇴했어요. 입대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아요.

부모님께서 산을 좋아하시기로 유명해요. 삼 남매 이름에 돌림자인 ‘자’도 ‘자일(Seil)’에서 따왔다 들었어요.
유명하시죠. (웃음) 처음에 클라이밍을 시작한 것도 아버지를 따라서였어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종목인데 꼬맹이가 높이 잘 올라간다고 칭찬을 받는 게 마냥 좋았어요. 1998년도에 첫 대회에 출전하고, 이듬해에 중등부가 생기면서 제1회 아시아 청소년 대회가 열렸죠. 합숙 훈련에서 김종곤 선생님(현 K2 클라이밍센터장)을 처음 뵙게 되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선수생활을 시작했어요. 그땐 프로그램이나 이론이 체계적으로 정립되어 있지 않았죠. 온몸으로 부딪혀가면서 배워야 했는데, 좋은 선생님들을 계속 만날 수 있었던 게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선생님이 다 기억에 남고 항상 감사해요.

가족과 함께 일을 하는 건 어떤가요?
안 부딪힐 수는 없는 것 같아요. 특히 자비와는 함께 암장을 꾸려가고 있기 때문에 종종 충돌하곤 해요. 대신 가족이기 때문에 더 쉽게 풀 수도 있어요. 어쨌건 평생 같이 갈 사이니까요. 훈련 중에는 아내보다 자인이와 있는 시간이 더 길어요. 인터넷에 떠도는 현실 남매 이야기처럼 서로 심하게 괴롭히는 타입은 아니라 다행이에요. 가끔 다투기도 하지만 어른스럽게 토닥이는 편이에요. 자인이가 훈련을 하면서 힘들어할 때는 오빠로서 가슴이 아플 때도 있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코치니까 어쩔 수 없이 혹독해 져야 해요. 그래도 가족의 힘으로 해내야죠.

2008년 인터뷰에서 김자인 선수의 월드컵 우승이 꿈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렇다면 목표를 이미 다 이루신 건가요?
이제 다른 꿈을 찾아서 나아가야죠. 자인이는 그 이후로 2년 연속 월드컵 우승을 달성했어요. 앞으로 세 번 더 우승하게 되면 클라이밍 월드컵 최다 우승 기록을 세우는 거예요. 그건 올해 안에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2018년 아시안게임 준비에 박차를 가해야죠.

많이 바쁘시겠네요.
자인이가 바쁘죠, 뭐.(웃음)

지도자로서 스포츠 클라이밍을 처음 접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가, “그거 떨어지면 죽는 거 아냐?” 였어요.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고 조금만 신경 쓴다면 축구보다 훨씬 더 안전한 운동이에요. 두려움은 일단 지우고 편한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주변 실내 암장을 찾아가세요. 분명히 재미를 느껴 빠져들게 될 거예요.

앞으로의 계획이나 개인적인 꿈이 있다면.
더자스 2호점 오픈을 구체화 시키고 있어요. 가로수길처럼 젊은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홍대나 신촌을 생각 중이죠. 저희 분위기와도 잘 맞고요. 코치로서는 자인이가 부상 없이 시즌을 잘 보낼 수 있도록 돕는 게 목표예요. 두 동생에게는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 다른 이들 말에 휘둘리지 말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개인적으로는 클라이밍씬이 조금 더 대중화되는 데 이바지할 수 있었으면 해요. 좀 더 많은 사람이 재밌게 클라이밍을 즐길 수 있도록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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