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을 만나고 천사들도 만나고
천국을 만나고 천사들도 만나고
  • 글 사진 길바울 기자
  • 승인 2015.03.20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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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타는 유럽 횡단 ‘오늘을 산다’ 세 번째 이야기

아직 오흐리드Ohrid이다. 잊지 못할 밤이 지나고 기억 속에 선명한 그림으로 새겨졌다. 텐트 문을 열어보니 여전히 천국이었다. ‘이런 아침을 맞아 보았던 기억이 있기는 했을까?’ 저 앞 맑은 호수 위에 백조가 가족을 이루어 유유히 소풍을 나왔다. ‘아! 이곳은 천국이로다!’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흥분의 소리를 삼킨다. 백조 가족 놀래 달아날까. 평생 처음 맞이하는 아침이다.

▲ 코토르는 연신 카메라를 들어 올리게 만들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하늘, 금방이라도 마실 수 있을 것 같은 투명한 호수와 오름직한 언덕과 진한 나무들. 한 번도 느껴 볼 수 없었던 낯설기만 한 아침인데 어색하지도 않다. 그 잔잔한 아침을 글로 적고 눈으로 담아내는 동안 아주 작게 보이던 백조 가족은 어느새 내 앞까지 와있었다. 꽤나 오래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자유롭고 평화로움 속에 파묻혀 텐트를 정리하려고 할 무렵, 어디선가 큰 외침이 있었는데, 분명 내 이름이었다. “어? 신이 날 부르시는 것인가? 천국이 확실한가?” 당연히 아니었다. 저 끝 모터를 단 작은 배에서 불규칙하고 몹시 흥분되어 보이는 손짓과 함께 큰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헤이!!! 폴!!! 굿모닝!!!” 세상에 어제 나에게 비밀의 장소를 공개해준 아이들이다. 그 반가움은 마치 조난당한 긴급함 속에 구조대를 만났을 때 나올 법한 반가움 정도일까. 고향 땅에선 저 친구들 또래는 제자인데, 이곳에서는 친구가 되었다. 무슨 일인지 신이 나서 아이들에게 손짓을 하며 소리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굿!!모!!닝!!” 아이들을 의지하고 있는 순수한 동네 바보 형처럼. 나는 아이들보다 더 정신없이 한참 떨어져 있는 배에 손을 흔들고 있었다.

▲ 아침 일찍 나를 데리러 온 아이들과 함께

“폴 잘 잤어? 어제 약속했지, 우리가 데리러 오겠다고, 우리가 정리하는 거 도와줄게. 배를 타고 동네로 가서 우리와 놀자.” “응 고마워!” 26세와 12세의 나이와 상관없는 우정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아이들과 함께 수영도 하고 축구도 하던 그 하루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친절한 아이들과 사람들에게 받은 배려를 통해 나는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아이들의 배려가 너무나 깊어서 왠지 모르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난 도대체 무엇을 배우며 살아온 것일까? 그렇게 오흐리드에서의 또 다른 하루를 살았고, 다음 날 나는 알바니아를 향해 다시 도로 위로 올라섰다.

몸을 더듬는 호스트의 손길
보통 여행에서는 정보를 검색하고 이야기를 검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겠지만, 나는 지도와 간간히 하게 되는 카우치 서핑이 가장 중요하다. 지도를 보고 국도의 번호를 찾으면 이제 그 도로 위를 하염없이 걷기만 하면 된다. 낯설기만 한 알바니아의 수도에 도착했다. 알바니아 티라나의 첫 느낌이란 도시에 칙칙한 날씨, 모래먼지가 도시를 가득 메우고 눈으로 들어오는 이물질을 막느라 정신이 없다. 큰 배낭을 맨 내게 사춘기 학생처럼 눈에 독기를 품은 중2병(?)을 앓고 있는 듯한 친구들은 서슴없이 “칭챙총칭챙총” 거리며 동양인을 향해 비아냥거리는 장난을 연발하고, 거리에서 자주 거지들을 만나기도 한다.

‘후.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다행히도, 카우치 서핑을 통해 한 호스트에게 초대장이 왔기에, 안전한 잠자리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를 얻으며 초대장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없는 번호라는 안내에 당황스럽지만 당황하지 않으며, 하염없이 거리를 걸었다. 맘으로 드리워진 두려움을 침착하게 대응한 지 몇 시간 후, 날이 어두워지고 내 얼굴도 어두워졌다. 번호를 잘못 알려준 호스트는 더 어두운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나 미안해하며 포옹을 했다. 그 때까지는 일사천리였다.

▲ 알바니아 수도 티라나의 아름다운 야경을 바라본 공포의 밤

친구의 집에 도착해 샤워를 한 후 함께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며 서로의 문화에 대해 묻고 대답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이상하게 그 친구가 내 몸을 더듬는다. 몸에 바짝 달라붙는 티셔츠를 입고 있던 내 몸과 아직 채 마르지도 않은 젖은 머릿결이 섹시한가? 내 어깨와 가슴을 만지며, “Oh! nice body.”를 서슴없이 내뱉던 그의 손길이 내게 준 두려움은 또 다른 두려움이었는데.

‘침착하자. 오늘 싸워야 하는 것인가? 아닐거야.’ 그 후 앉아서 이야기 할 때는 허벅지 안으로 손을 얹어놓는다. 정신이 없는 마음과 공포는 더해간다. “친구여, 나는 자야 할 것 같아. 오늘 아주 정신없는 하루였어.” “폴, 벌써?” “응 벌써^^;” 그렇게 의심스럽고 묘한 상황을 나는 침착하게 빠져 나와 방문을 조용히 걸어 잠그는 순간, 이상한 성취감이 느껴졌다. ‘잘했어, 아주 침착하게 성공했어’라는 칭찬을 자신에게 던지며, 색다르고 신선한 두려움을 극복했다.

그렇게 졸리지도 않은데 들어와 있던 그 밤은 무척이나 길었다. 긴 밤을 별 탈 없이 잘 보내고서 아침 일찍 그 친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 밤, 무방비 상태로 노출 되었던 내 몸으로 전해져 온 낯선 남자의 터치는 다시는 있어선 안 될 일이다. 다시 국도 위로 걸어 올라갔다. 그 날 그 남자의 손길은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다.

나눔은 나눔을 낳는다
알바니아를 통과해서 몬테네그로를 향한 후 바다를 만나서 따라 올라가 크로아티아 최남단으로 들어갈 계획을 갖고 걸었다. 선글라스를 썼지만 햇볕은 눈 부셨고, 몹시 더웠다. 견뎌내는 것 말고는 답이 없는 여행이다. 자유를 만끽할 줄 알았는데 잘못 알고 있었다. 상상과는 다른 여행을 하는 중이다. 이 사실은 매 순간 찾아오고 견뎌내기도 벅찬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 걸으며 지금 이 순간의 것들을 기록하고 느끼는 것뿐이다.

▲ 나에게 귀한 잠자리를 내어준 미자르노비치

몬테네그로로 넘어가는 국경까지 열심히 걷고 때로는 차도 얻어 타며 왔고, 마지막 차를 태워준 아저씨와 지미와 알바니아의 마지막 카페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왔다. 국경 바로 앞에서 남은 돈이 있어 빵이라도 몇 개 더 사갈까 고민하던 중 아주 예쁘고 잘생기고 해맑은 아이들이 내게 다가서 무엇이라도 달라는 손짓을 한다. 가만히 보니 얼굴에 땟국물이 가득한 아이들은 집시였다. 생각 같아선 나눌 수 있는 돈을 주어야 하는데, 그 아이들 앞에서 순간 계산과 갈등을 하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부끄러움을 느낀다. 얼마 되지 않던 돈을 전부 건네고, 지미아저씨가 사주신 물까지 주니, 그 자리에서 전부 마셔버리는 아이들. 서로가 조심스레 만지던 내 배낭 옆 주머니에서 몰래 피자 한 조각을 뒤로 숨겼다가 다시 넣어놓는 아이들과 가방을 만지지 말고 기다리자는 아이들 속에 엉켜있던 나는, 내 여행이 사치스러움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저 도움을 바라는 아이들이다. 악수 한 번씩 할 뿐인데, 그 더러운 손이 내 손보다 깨끗한 것 같고, 그 악수에 욕심만 배워온 내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이 날의 나눔은 잠깐이었지만, 그 기억은 횡단의 여정 내내 불만과 불평을 멈추게 하는 사건이었다. 그들이 내 악수를 기억해 주었으면. 아니 내가 그 악수를 잊지 않기를 바라본다. 그렇게 난 또 몬테네그로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코토르의 야경을 선물 받다
몬테네그로다. 아이들과 헤어지고, 차분해진 마음으로 몇 걸음 걸었을까? 걷고 있는 내게로 자동차 소리가 들려오면 엄지손가락을 번쩍 들어 올리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별 생각 없이 국경을 통과해 속도를 붙이기 시작하는 차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충 손을 들어 올렸을 뿐인데, 큰 밴 한대가 내 앞으로 멈추어 섰다. 열리는 문 안을 바라보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는데, 안에는 동양인 2명이 있었다. 나와 비슷하게 생긴 동양인이 타 있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와우!!!” 그 차에서 타투야와 아이야 일본 친구를 만나게 된다.

▲ 코토르의 야경

여기서 동양인을 만나게 되리라곤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이처럼 동양인이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나와 다르게 생긴 사람들 사이에서 꽤나 외로웠던 모양이다. 게다가 그들의 목적지는 내 다음 목적지와도 같은 곳, 몬테네그로의 아름다운 도시 ‘코토르Kotor’로 향하고 있었다. 차를 타고도 2시간 거리에 있는 코토르, 3일은 걸어갈 각오를 했던 코토르로 한방에 갈수 있게 된 것이다. 순간, 마음속에 몇 분 전에 있었던 아이들과의 만남과 작은 나눔이 떠올랐다.

또, 오래 전 불가리아에서도 작은 나눔 바로 뒤에 뜻밖의 선물을 받은 적이 기억도 함께 떠올랐다. 신기했다. 늘 나눔 뒤에는 그 나눔의 정도가 무색할 만큼의 선물이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나눔이라는 것은, 당연한 일에 의미를 만들어 주고, 감사하게 만드는 묘약이 숨겨진 모양이다.

그 날, 히치하이킹으로 만난 아이야와 타우야와 함께 아름다운 올드 타운 코토르를 거닐며 외로움을 잊었고, 평생 간직될 소중한 추억의 그림 한 장의 그려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날 밤은 환상적인 코토르 야경이 보이는 한적한 언덕배기에서 조용히 밤을 보낼 수도 있었다. 그 날 내 마음에 새겨진 잔잔한 이야기는 아직도 아련히 내 맘에 행복을 떠올리게 한다.

▲ 아이야, 타투야와 함께 코토르성 앞에서

여행은 내 생각 밖에 것들과의 만남이다

다시 몬테네그로의 뜨거운 국도 위이다. 저 머나먼 스페인까지 언제 도착할 수 있을까? 불안과 분주함을 가득함을 떠안고 몬테네그로 해안도로를 걷는다. 석회산으로 둘러 쌓인 곳 아래로 잔잔한 바다가 강렬한 태양 아래 속살을 전부 내 비쳤다. 떠날 줄 모르는 불안함과 외로움을 잊어보고자 느닷없이 배낭을 풀고 바다에 뛰어 들어가 보기도 하지만, 몸만 시원할 뿐 마음의 불안과 막막함과 두려움은 지워지지도 사라지지도 잊히지도 않는다. 발악으로 더 묘해진 맘을 얻고선 다시 걷는다.

젖은 옷이 다 말라갈 즈음 앞으로 펼쳐진 마지막 마을이 보인다. 아름답고 소박한 마을에 발길이 붙잡혀 멈추었다. 사실 격하게 요동하는 맘을 갖고 걷는 것이 무의미해 보였기 때문이다.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여행을 하고 있지만, 어디서도 느낄 수 없었던 감정들도 마주하게 되는 것은 마침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서둘러 앉아야 했다. 포기할 생각을 할 정도라니 도대체 이 마음은 무엇이고 용기는 어디서 얻어야 하는 것일까?

무너지는 마음을 대변하듯 하늘에서는 폭우가 쏟아지고 귀가 멍멍해질 만큼 큰 천둥과 번개로 뒤덮였다. 그렇게 하루 종일 거침없이 요동치는 마음을 정리해보고자 애를 썼다. 와이파이를 이용해 부모님께 전화를 해보기도 하고 글을 써보기도 하고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기도 해봤지만 별다른 처방이 나오지 않는다. 어느새 날은 저물어 온다.

▲ 해안 국도를 걷다가 만난 우크라이나 친구와 함께 바다를 향해 뛰어들고 있다.

오늘은 비가 오기에 텐트 위에 지붕이 있는 잠자리가 필요했다. 지붕을 가진 집들을 찾아가 다짜고짜 문을 두드려 텐트를 칠 수 있느냐 물어봤지만, 쉽지 않고 그 상황들이 나의 외로움을 더 몰아세운다. 날이 어두워 하나둘씩 가로등이 켜진다. 다시 해안가로 내려와 정처 없이 걷고 있는데 한 레스토랑에서 자리를 내어 주었다. “폴, 이곳은 정말 안전한 곳이야 나를 믿어.” 그렇게 밝아오는 달은 내 어두운 얼굴을 비췄다. 혹독한 날의 밤을 맞아 힘들게 잠이 들었는데, 생생한 꿈 하나를 꾸게 된다.

꿈속에서 나는 한국에 돌아갔다. 포기하고 돌아간 나를 친구들은 만나주지도 않았고, 포기가 있던 그 자리에는 후회와 절망이 있었는데 그 꿈에서의 후회스러움은 이곳에서의 두려움보다 훨씬 더 혹독하고 괴로웠다. 그 다음날 아침, 꿈의 기억이 생생하던 그 아침은 이상하게 용기로 가득했다.

‘그래 과감하게 하지 않으면 후회한다.’ 드디어 여행을 조금 더 제대로 느낄 수 있게 되는 순간이었다. 보물을 발견한 듯한 기쁨으로 나는 다시 크로아티아를 향해 힘차게 걸어 나갔다. 여행은 내 삶 밖의 것들과의 만남이다. 여행은 내 생각 밖에 있는 것과의 낯선 만남인 것이다. 발걸음이 가볍고 노래도 나온다. 세상을 누비는 내 걸음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힘찬 걸음으로 다시 걸었고, 드디어 잊을 수 없던 크로아티아의 땅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여행을 통해 만들어지고 있었다.

▲ 아주 편안한 보금자리를 얻은 그날 이 곳에서 나는 꿈을 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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