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음 고수’가 말하는 빙벽의 세계
두 ‘얼음 고수’가 말하는 빙벽의 세계
  • 문나래 기자 | 사진 양계탁 기자
  • 승인 2015.02.16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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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가래비 ‘산학폭’에서 만난 박희용과 유학재

한 손엔 피켈을 들고 양발에는 크램폰을 차고 얼음벽을 오르는 아찔한 행위, 아이스 클라이밍. 벽에 붙은 모양이 아슬아슬 위험해 보이고 꽁꽁 언 얼음은 보기만 해도 춥다. 한국은 아이스 클라이밍 후발주자임에도 국제 대회를 개최하고, 세계 랭킹 최정상 선수를 보유하고 있다. 박희용선수다. 그리고 국내외 수많은 설산과 빙벽을 등반한 최고의 알피니스트 유학재 대장. 이 두 사람이 얼음, 혹은 얼음이 아닌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어느 대낮 가래비 빙벽장에 모였다.

두 분 얼마 만에 보는 건가요?
유학재(이하 유) 얼마만이지?
박희용(이하 박) 왜 이러세요.(웃음) 고작 이틀 됐어요. 청송에서 봤으니.(청송 아이스 클라이밍 월드컵이 이틀 전에 열렸다) 같이 등반한지는 5년 됐어요. 딱 여기네요. 가래비.

오늘 가래비 얼음은 좀 어때요?
날이 따뜻하네요. 많이 녹아서 물이 줄줄 흐르더라고.
그러게요. 평일인데 사람도 많고요. 기다리는 동안 이야기 나누면 좋겠어요.

오늘은 빙벽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으면 해요. 두 분 벽에 오르게 된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저는 17살에 등반을 시작했어요. 고등학교 때 산악부였거든요. 처음엔 선배 등산화 뒤꿈치만 보고 걸었어요. 무거운 짐 짊어지고. 정말 힘들었는데 그 힘든 점이 잘 맞았어요. 재밌더라고요. 지치고 어려워도 더 잘해내고 싶고, 이루면 뿌듯하고 그런 게 좋았어요.

대장님은 북한산 토박이시죠?
5대가 우이동에서 지냈어요. 어렸을 때부터 맨날 산에서 놀고 뜀박질하니 자연히 산에 가까워졌죠. 저도 희용이랑 똑같이 17살 때부터 산악회에 다녔어요.

두 사람의 첫 산, 첫 얼음이 궁금하네요.
인수봉. 선배가 그냥 가래서 갔어요. 계속 떨어지면서 오르고 또 배우고 했죠. 선배들이 가르쳐주는 방식이 정말 험했어요. 막무가내였죠. 용어 같은 것도 몰랐어요. 지금 가르치는 용어로 멘틀링(담 넘어가는 동작)이라는 게 있는데 이런 건 담치기라 하고 그랬어요. 근데 그게 재밌더라고요. 등산은 어렸을 때 놀던 동작들이 시간이 길어지고 조금 더 강해졌을 뿐이었어요.

음, 첫 얼음이라. (한참 고민한 뒤) 처음엔 저는 사실 등반을 잘 못했어요. 스스로 실망을 많이 했죠. 속상하더라고요. 10m만 올라가도 포기하고 그랬어요. 말도 안 되게 실력이 안늘던 시절이었죠. 그래서 남들 안볼 때 숨어서 죽도록 연습했어요. 첫 얼음은 판대였던 걸로 기억해요.(원주에 있는 빙벽장) 2002년도였지 아마. 저도 처음엔 빙벽에 대한 위험하다는 선입견이 있었어요. 춥기도 하고. (인터뷰 중에도 박 선수는 계속 추워했다. 의외였다.)

원래 선수는 스포츠 클라이밍 선수였죠. 아이스 클라이밍으로 주 종목을 바꾼 계기가 있나요?
원정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부터였어요. 히말라야같은 고산에 가려면 아이스 클라이밍을 할 줄 알아야 하니까요.

두 분이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을 때가 언제인가요?
박 유 (동시에) 동료의 죽음.
북한산 인수봉, 설악산 토왕폭 등에서 많은 동료의 죽음을 목격했어요. 우리는 한 번 산에 오르면 바로 형, 동생 지간이거든요. 피를 나눈 형제나 다름없어요. 죽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이었어요.
아, 또 있어요. 선배들한테 혼났을 때.

어떻게 혼났어요?
그냥 마구 때렸어요.

보통 뭐 때문에 혼났나요?
비상식량 일찍 먹었다고요. 지금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이유예요. 그냥 때리는 거죠.

요즘은 어때요?
이젠 제가 그래요. 똑같아지더라고요.
옛날엔 더 심했지. 이게 나쁜 관습이에요. 일제시대부터 이어진 군국주의의 잔재거든. 산에 가는 문화 중에 선배들이 해놓은 잘못된 문화가 많은 데 그 중에 하나예요. 바뀌어야 해요.

경기에 최적화된 선수와 산만 오르는 등반가의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요?
스포츠에는 철학이라는 말은 쓰지 않아요. 그건 그냥 경기거든. 선수가 있으면 룰, 감독, 관객이 있죠. 반면, 등산은 관객도 없고 감독도 없고 혼자 해요. 스스로 룰을 만들어 가죠. 내가 잘해냈는지 스스로가 감독이 되고 관중이 돼서 평가해야 해요. 그러한 과정에서 생각을 하다 보니 자기만의 철학이 생기는 거예요. 스포츠는 오로지 승부. 그 안에 사상이나 생각이 있진 않아요.

저는 사실 그 두 영역에 껴있어요. 스포츠만 하는 어린 친구들과 산을 정통으로 오르는 선배들 사이에 있는 거죠. 그런데 결국은 저도 정통 등반이 좋아요. 시합에서 승리했을 때 희열은 잠깐이지만 힘들고 두려웠던 그런 등반은 가슴 속에 뭉클하게 남아있어요. 또 하고 싶고요. 그리고 대원들이 함께하니 인간미가 넘치죠. 한편의 휴머니즘 드라마 같답니다.

대장님이 지금 세대였더라면 선수가 되셨을까요?
안했을 거예요. 등산을 좋아하지 등수 매기는 건 싫거든요. 그것도 친구들이랑. 만약 옛날에 지금 같은 대회가 있었더라면 저도 순위권에 좀 들었겠죠.(웃음) 선수는 시기가 지나면 은퇴해야 하잖아요. 등산은 힘들면 쉬엄쉬엄 걸어가면 돼요. 남산 가면 되지. 남산 못가면 일산이라도 갈게요.(아웃도어 사무실이 일산에 있다) (전원 웃음)
아 추워. 이거 인터뷰지 한 장도 안 넘어갔어요.
그러게. 그냥 얼음하고 나서 카페로 가자고.

빙벽 하시는 분들 맞으시죠? (웃음)
(카페로 이동)

등반하며 포기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나요?
포기라기보다 주춤했던 적은 있어요. 산에 갔다와보니 가족이 굶고 있더라고요. 95일 원정을 다녀왔는데 3달 동안 월급이 안 나왔어요. 그래서 잠시 산을 덜 다녔죠.
저도 딱히 없어요. 한 가지 있었다면 회사생활을 했었는데 운동과 병행하는 게 힘들었어요. 그 때 한번 고민해본 적은 있어도 훈련이 안 되거나 괴로워서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최고의 아이스 클라이머, 최고의 알피니스트이시죠.
그렇게 나누면 안 돼죠. 나는 지는 똥별, 얜 떠오르는 샛별. 이렇게 나눠야죠.(웃음)

대장님은 국내 알피니스트의 대선배시잖아요. 유혁재대장 하면 파키스탄 가셔브룸 4봉(7925m) 서벽 등반(가장 어렵기로 알려진 등반)을 빼놓을 수 없고요. 각 필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요?
가장 중요한 거라면 저는 정신력이라고 생각해요.
긍정적 마인드. 똑같이 에베레스트를 가도 써미터(등정가)가 못되면 실망하는 사람도 있는데 등정 못하더라도 후회 없이 돌아오는 사람도 있어요. 스스로를 위해, 팀을 위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가 없어 즐거운 거예요. 그런 사람이 정말 멋있어요. 저도 산에서는 늘 긍정적인 사고를 합니다. 등정의 원동력이 되지요.

훈련하거나 필드에 있을 때 무슨 생각하시나요?
훈련 때는 이걸 못해내면 경기에서도 못하리라 생각해요. 빡세게 훈련하죠. 저 같은 경우에는 아이스클라이밍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코치나 감독이 없어요. 스스로 코칭을 해야 하는데 단순히 과제를 만드는 일보다 의식이 더 중요해요.

어떤 의식이요?
스스로 끝까지 밀어붙이는 거. 견뎌내야지 시합에서 잘할 수 있다는 단순한 믿음. 스스로에게 압력을 가하는 거죠.

계속 텐션이 유지되면 일상생활에서 힘들 텐데요.
스트레스가 많아요. 표현 안하려는데 주위에서는 ‘얘가 긴장하고 있네’ 알아보더라고요.

그때 뭐하세요?
술 마셔요.

유 대장님은?
얜 술퍼클라이머. 난 알콜리스트. (전원 웃음)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혼자서 심리적 부담을 많이 가져요. 대회 기간엔 불면증도 찾아오고요. 클라이밍은 집중력이 가장 중요한데 잠을 못자면 집중이 안돼요. 그럴 때 한두 잔 하는 정도.
변명이야. 그게 바로 알코올 의존증이야. (웃음)

경기 전 도핑테스트 했어요?
했어요. 그런데 알코올은 상관없어요.

그렇다고 마셔도 되나요?
이거 보세요.(웃음) 그렇게 미친 듯이 마시진 않는다고요. 경기 전엔.
(딸 서아가 웃는다.)

몇 살이야?
서아 세 살.
너 두 살이잖아. 아 새해가 됐구나.

아이가 생기니까 달라지지 않았나요?
많이 다르죠.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어요. 더 건강해야하고 죽으면 안 되고.(웃음) 이전엔 불확실한 도전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무언의 동의를 얻어야하는, 타협을 해야 하는 부분이 있어요. 결혼 전엔 매해 원정을 갔는데 결혼하고 나서는 두해를 못 갔어요.
나는 아이가 3개월때 원정을 떠났는데 6개월째 돌아오니 못 알아보더라고.
지금도 그래요. 아빠를 별로 안 찾아요. 시합 나가거나 주말에는 필드에서 연습하고 그러니까요. 자주 함께 못해서 아쉬워요.

이런 삶을 안 살았더라면 어떤 삶을 살았을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 너무 어릴 때 산에 입문했어요. 저는 당구도 못치고 스키도 못 타요.
가정형편이 안 좋았던 편이에요. 생업을 근근이 이어갔을 것 같아요. 샐러리맨을 하면서. 이런 꿈은 있어요. 정원 있는 집을 스스로 만들고 싶어요. 목수가 되는 거죠. 나무도 심고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그런 집.

각자 위치에서 정상에 올랐을 때는 무슨 생각을 하나요?
경기에서는 살아있다는 느낌. 산에서는 아무 느낌 안나요. 사람들은 정상에 올랐을 때 그 느낌 때문에 가는 줄 아는데 과정 때문에 재밌어서 가는 거예요. 만세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죠.

유 대장님은?
희용이 말에 공감해요. 그냥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웃음)

유 대장님은 에코락프로젝트(인분으로 인한 산의 오염을 막기 위해 에코삽, 에코백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활동)를 하고 계시잖아요. 어떤 취지인가요?
자연을 무분별하게 사용한 건 사실이에요. 그래서 환경과 다음 사람을 생각해 에코락프로젝트를 해요. 환경 운동은 1~2년 하고 효과가 없다고 해서 그만 두면 안돼요. 한 세대를 거슬러 생각해야하죠. 아이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자연을 잘 이용해서 멋있게 캠핑하는 문화를 알려줘야 해요.

작년 설악산 암장, 올해는 북한산 인수야영장 등의 폐쇄계획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산에는 물론 자연이 주는 위험이 있어요. 그런데 낙석이 떨어지는 것도 등산의 과정이에요. 비 온다고, 돌 떨어진다고, 위험하다고 해서 산에 못 가게 하는 건 말이 안돼요. 산에서 계속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고 도전하는 과정을 막는 거죠.

선진국은 달라요. 사고가 나도 산에 가는 것을 막지는 않아요. 그건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해치는 거라고 생각해요. 산악인들은 산에서 밥도 먹고 잠도 자거든요. 산에서 작은 사회가 형성되는 거죠. 그런데 대한민국의 모든 산에서는 취사도, 야영도 못해요.

두 사람이 함께 자일파티를 한다면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어디든지요. 그곳이 어디일지라도.
같이 안가요. 지는 똥별 떠오르는 샛별이라니까.(웃음)
등반은 체력만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산을 많이 바라본 사람만이 산을 정확하고 안전하게 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아요. 제가 봤을 때 저건 눈인데 선배들은 얼음이라고 해요. 그런데 그게 진짜 얼음이거든요. 혈기왕성한 것만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선배들이 있어야 해요.
야 그래, 그래. 넌 그럼 한국산악회 회비 좀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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