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신’도 반한 바우여신의 꽃밭
‘바람의 신’도 반한 바우여신의 꽃밭
  • 글·곽영임 방송작가 | 사진·이두용 기자
  • 승인 2011.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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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 삼천리 | ③ 선자령 풍차길

구 대관령휴게소~새봉전망대~선자령 원점회귀…11km 5~6시간 소요

▲ ‘선자령 풍차길’은 말 그대로 눈앞에서 풍차의 위용을 볼 수 있어 걷는 재미와 함께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월금산악회 회원들은 더디게 다가온 봄날의 끄트머리에서 바우길을 찾아 떠났다. 대관령 휴게소에서 시작해 강릉과 경포호가 내려다보이는 새봉전망대를 지나 선자령에 오른 후 걷는 맛이 일품인 계곡길을 따라 풍해조림지, 양떼목장까지 이어지는 약 11km 구간(원점회귀)이다.


소문은 그랬다. 5월 중순이면 600만 평 평원이 온통 푸른 초지로 변하는데 그게 진짜 장관이라고…. 선자령을 넘어 대관령 방향으로 펼쳐지는 푸른 초원에 대한 기대 하나만으로도 발걸음이 가볍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탐방로를 따라 오르는데 기대하지 않았던 풍경이 펼쳐진다. 귀하고 귀하다는 진분홍색 얼레지밭.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선 월금산악회의 야생화 전문가 김운경 작가님의 꽃 이야기가 시작된다.

‘바람난 여인’이 살고 있는 비밀의 화원
씨앗이 싹트는 데만 5년이 걸리고 고산지대에서만 자라는 데다 제 사는 곳 떠나면 죽는 꽃이니(옮겨 심으면 이내 죽고 만다) 이렇게 지천으로 피어있다고 해서 함부로 다뤄도 좋을 흔한 꽃이 아니란다. 그런데 이 얼레지의 꽃말이 재미있다. 봄볕이 쏟아지면 치마를 활짝 들어올리고, 날이 흐려지면 금세 치마를 내린다고 해서 ‘바람 난 여인’이라고 꽃말이 붙여졌다. 꽃의 입장에서야 날이 맑으면 곤충을 불러 수정을 해야 하고, 흐리면 제 몸을 보호해야 하니 당연한 건데 바람난 여인이라니! 제 난 자리를 떠나지도 못하는데 바람났다 소리를 듣는 게 억울할 수도 있겠다만 네 자태가 그렇게 매혹적인 걸 어쩌랴!

▲ 하산로는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길이라 숲이 우거져 있어 공기가 맑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한없이 넓은 도서관을 지나는 것이다. 길 위에 놓인 사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도서관, 스쳐 지나가는 장소들의 기억을 매개하는 도서관인 동시에 기억을 간직하는 도서관이다.

-브르통의 저서 ‘걷기예찬’ 중에서

깊은 봄의 숲속을 걷다가 김 작가님의 배낭에서 나온 작은 식물도감을 들여다보며 분명 언젠가 만났을 테지만 기억에 넣어두지 못했던 꽃들과 해후한다. 꿩의 바람꽃, 괭이눈, 노루귀, 현호색, 동의나물, 양지꽃, 노랑제비꽃, 개별꽃, 산괴불주머니, 홀아비바람꽃. 그동안 동안 겨울 눈꽃산행의 명소로, 푸른 초원의 시원한 풍광으로만 알려졌던 이곳에 이런 비밀의 화원이 있는 줄은 몰랐다.

날씨가 좋을 때는 강릉시내와 경포대가 보인다는 새봉전망대를 지나 해발 1157m 백두대간 선자령 정상에 섰는데 그렇게 높은 줄은 모르겠다. 들머리인 대관령휴게소가 해발 840m, 그러니까 300m만 오르면 선자령 정상에 서는 것이다. 수직 오르기에 익숙한 산사람들에게는 하품이 나오는 코스겠지만 백두대간이라 하면 겁부터 나는 사람들에게는 걷기에 딱 좋은 길이다. 애초에 강원도 바우길을 만든 이들이 원칙으로 삼은 것이 ‘한 가지 생각을 잡고 유유자적하며 걸을 수 있는 길, 가족이 함께 걸을 수 있는 길, 경사길이 있어도 경사가 가능한 한 짧은 길’이었다니 길을 낸 그들의 속 깊음을 느낄 수 있다.

▲ ‘바람난 여인’이라는 꽃말을 가진 엘레지가 봄볕에 꽃잎을 활짝 들어 올렸다.
선자령을 지나 대관령 방향으로 하산 길에 접어드니 멀리서는 그럴듯한 장식품처럼 느껴지던 풍차(풍력발전기)가 엄청난 위용을 드러낸다. 대관령 일대에 풍차가 선 이유는 연평균 초속 6.7m의 바람이 꾸준히 불기 때문이다. 대관령 풍력발전단지의 발전 용량은 소양강 다목적댐의 절반에 해당하는 수준으로 약 5만 가구가 사용할 수 있다. 경제적 가치를 선뜻 가늠할 수는 없으나 보기에 좋은 것이 쓰임새도 크다는 게 기특하다.

고요한 듯하나 쉼 없이 돌아가는 풍차를 뒤로 하고 호젓한 계곡 길로 하산을 시작하는데 두 갈래 길이 등장했다. 아마도 오른쪽 길이리라 입을 모으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길바닥에 커다란 나뭇가지로 누군가가 화살표를 만들어 놓았다.

▲ 선자령은 오르기도 수월하고 풍광도 훌륭해 평일임에도 가족·단체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어 단어 중 하나가 ‘trailblazer’다. 흔히들 ‘개척자’ 정도로 알고 있지만 그 속뜻 중 하나가 ‘뒤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새로 길을 내고 그 길에 표시를 해 두는 사람’이라 뜻이 담긴, 아주 품격 있는 낱말이다. 그러니까 강원도 바우길을 만든 이들, 그리고 사소해 보이지만 이렇게 누군가 다리품을 팔지 않도록 나뭇가지를 주워 표식을 해 둔 사람들을 말하는 거다. 나 역시 그런 마음으로 살겠다며 이메일 아이디로 등록해 써먹은 지가 십 수 년이 돼 가는데 작은 일이나마 단 한 번이라도, 단 한 사람에게라도 그런 존재였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바우여신의 순박함과 염원이 담긴 길
잘 삶아진 강원도 감자가 포실포실 부서져 내린 듯한 부드러운 흙길을 따라 계곡이 이어진다. 순도 높은 맑은 공기 덕분일까? 함께 걷는 이들의 표정이 맑아진다. 폐부의 한숨과 피로가 덜어지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바우길의 바우는 감자바우로 불리며 순박한 강원도 사람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고대 그리스 신화보다 2000년 이상 앞선 바빌로니아 신화에 나오는 건강의 여신 ‘바우(Bau)’의 이름을 상징하기도 한다. 손으로 한번 어루만지는 것만으로도 죽을병을 낫게 한다는 바우여신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누구나 이 길을 걷기만 해도 몸과 마음이 건강해질 거라는 주술적 의미까지 담은 것이다. 그러니 4시간을 걸었는데도 표정이 맑아질 수밖에.

▲ 회원들의 단합을 확인하며 새봉전망대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하산을 거의 마칠 무렵 한참이나 뒤떨어진 후미와의 간격을 줄이기 위해 먼저 내려온 일행이 옹기종기 모여 요즘 화제를 모으고 있는 ‘스마트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휴대폰으로 자신의 현재 위치를 알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산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그 자리에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월금산악회 대표 ‘어얼리 어답터’의 스마트폰에 관한 설명에 듣고 있던 이들의 칭송이 이어졌다. 주의 깊게 듣다가 보니 ‘어얼리 어답팅’ 하지 못한 것이 어쩐지 손해를 보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데 스마트폰이야 뭐 시대의 속도에 너무 늦지 않게 적당히 눈치껏 장만하면 될 터이고, 그보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무엇을 ‘어얼리 어답팅’ 할 것인지 고민할 일이다. 너무 늦지 않도록 말이다.


바우길의 ‘선자령 풍차길’ 정보
바우길은 2009년 강원도가 고향인 소설가 이순원, 산악인 이기호 씨와 지역주민들이 뜻을 모아 만든 강원도의 명품 길이다. 백두대간 대관령을 넘어 경포대와 정동진 바닷가로 이어지는 150km의 바우길은 총 10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개척 당시 가능하면 손을 대지 않아 투박하면서도 깊은 강원도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이 중에 길이 끊긴 듯 자연 그대로 이어져 있어 걷기에 좋은 제1코스 ‘선자령 풍차길’은 강원 바우길의 대표 명품길이라 할 수 있다.

▶ 코스 : 등산로입구~1.2km~국사성황사~1.3km~전망대~2.5km~선자령~3.2km~샘터~1km~풍해조림지~0.8km~양떼목장~0.8km~원점회귀<11km 5~6시간 소요>

▶ 교통 : 영동고속도로→횡계IC→삼거리(우회전)→약 500m(좌회전)→(구)대관령휴게소 주차장<수도권 기준 4시간 소요>

▶ 문의 : 산악인 이기호 010-9244-5995 www.baugil.org 

드라마작가 이기원
“산에 오르면 몸과 마음이 새로워요”

일본 소설 <하얀거탑>을 드라마로 각색하면서 한국과 일본의 의료체계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그 근원을 연구하다가 제중원을 알게 됐어요. 이후에 양의학이 국내에 들어온 시기의 이야기를 써 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에 소설 <제중원>을 쓰게 됐지요. 소설 <제중원>은 드라마로 만들어져 5월까지 방영했어요. 산행은 문성근 대장의 권유로 시작해 5년째 해오고 있어요. 산을 오르면 몸과 마음이 맑아지고 새로워지는 것 같아 즐겨하고 있습니다. 다음 작품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휴식을 겸해서 오는 6월 초에 친구인 변정식 작가와 산티아고를 40여일 다녀올 계획이에요.

책 <산띠아고 가는 길> 작가 변정식
“걷고 있을 때 행복을 느껴요”

첫 직장인 워너뮤직코리아에서 오랫동안 음반라이선스와 저작권에 관련된 일을 했어요. 그 경력을 발판삼아 현재는 해외음반의 라이선스와 저작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음반사를 직접 운영하고 있지요. 저도 등산과 트레킹을 좋아해서 친구 이기원 작가의 권유로 3년째 월금산악회에 참가하고 있어요. 몇 번의 산티아고 순례 경험과 3년간의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최근 산티아고에 대한 정보를 모두 담은 가이드북 <산띠아고 가는 길>을 썼어요. 오는 6월 초에는 친구인 변정식 작가와 동행하며 새로운 정보와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산티아고에 다시 한 번 다녀올 계획입니다. <글 사진 | 이두용 기자>


곽영임 | 1996년 SBS FM ‘아름다운 이 아침’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왕성하게 활동중인 방송작가다. 2004~2006년 문화관광부 문화공간조성사업 홍보를 총괄했다. 저서로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현재 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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