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YOND SILKROAD | 시리아 팔미라
BEYOND SILKROAD | 시리아 팔미라
  • 글 사진 박하선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 승인 2013.10.21 17: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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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권은 왜 제노비아를 추앙하는가

사막 위에 솟아오른 환상의 도시 팔미라(Palmyra). 지금은 내전으로 대부분의 국토가 초토화 됐지만, 시리아의 동부 사막지대 한복판에 세워진 대도시 팔미라는 흔히 ‘사막의 궁전’으로 불리며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과 경이로 채워준다. 팔미라는 동서를 잇는 교역도시였다. 사방에서 유입되는 다양한 문화를 접하면서 특유의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 팔미라 왕국의 궁전 돌기둥.

팔미라가 있는 곳은 유프라테스 강과 다마스쿠스 사이의 광활한 사막지대 안에 있는 오아시스 지역이다. 오늘도 이곳의 에프카(Efqa)샘에서는 맑은 물이 솟아 일대를 풍요롭게 적셔주고 있다. 이곳은 10m 이상 되는 팜트리(Palm tree)들이 큰 숲을 이뤄 주변의 사막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원래 이곳 지명의 이름도 타드몰(Tadmor 고대 셈족어로 야자수)이었고, 팔미라 어원도 ‘팜트리의 도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 과거의 화려했던 영화를 뒤로 하고 적막이 흐르고 있는 유허지 풍경.

팔미라는 동쪽의 페르시아 만과 이란, 서쪽의 지중해를 잇는 동서무역의 중요한 중계지로 번성했다. 팔미라에는 많은 상인이 살았고, 페르시아 제국에서 온 인도와 아라비아 산물을 로마제국으로 운반했다. 또한 사막을 왕래하며 장사를 하던 카라반들이 피곤한 몸을 쉬고 물을 공급받던 사막의 경유지였다. 셀레우스코 왕조 때부터 중개무역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던 팔미라는 로마가 점령했던 기원전후 약 300년간 전성기를 누렸다.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이 한때 이곳까지 영향을 미친 적도 있었지만, 팔미라는 역사의 대부분을 정치적 독립국가를 유지했다. 이곳을 지나는 대상들에게 세금을 거둬들였으며 사막 교역로를 지켜주는 대가로 통과세를 받기도 했다. 그 결과 팔미라는 부유한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희랍과 로마시대가 전성기였으며, 이때 타드몰에서 팔미라로 이름을 바꾸고 독자적인 군대를 가진 강력한 도시국가로 발전하였다.

▲ 고대 무덤들이 보이는 해질녘 풍경.

▲ 유적지 근처에서 유목 생활을 하고 있는 베두인 원주민.

오늘날 팔미라에 남아 있는, 거친 표면이지만 세련미가 돋보이는 유적들 대부분은 1~3세기의 로마시대에 세워진 것이다. 팔미라를 대표하는 태양신을 모시던 벨 신전,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당시의 석조기술을 알 수 있는 원형극장, 벨 신전 맞은편에 있는 나부 신전과 개선문, 정치집회장 혹은 시장으로 이용된 아고라와 그 밖의 많은 석주들. 이 모든 유적들을 보면 눈부시고 황홀한 팔미라가 계획도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자성을 유지한 팔미라의 문화는 미술, 특히 조각에서 확실히 엿볼 수 있다. 주변의 구릉에 석회암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팔미라의 조각 대부분은 양식화된 정적인 미술이고 서아시아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팔미라 서쪽 시외에 북시리아의 황야가 펼쳐지고 ‘묘지의 계곡’이라는 장소에 팔미라 시민의 묘가 있다. 묘는 ‘영원의 집’이라 불리며 팔미라 사람들에게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공동묘지도 있었으나 유력한 가족은 일족의 묘를 가지고 있다. 묘의 형식에는 탑묘(塔墓), 가형묘(家形墓), 지하분묘(地下墳墓) 등이 있으며 탑묘의 형식은 팔미라 독자의 양식에 근거하고 있다.

▲ 낙타를 타고 관광객을 유혹하고 있는 원주민.

▲ 타드모르 시가의 기념품 가게.

서기 260년대에 아데나투스 2세가 팔미라의 왕이 되었다. 그는 정치적·군사적으로 유능해 팔미라의 융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그는 의문의 암살을 당했고 272년 그의 왕비 제노비아는 어린 아들에게 황제의 칭호를 수여하고 황제의 어머니로 팔미라를 다스려 나갔다. 로마의 황제가 이를 묵과할 리 없었다. 아무렐리안 황제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팔미라로 진군해 성을 포위했다. 절세미인의 여장부 제노비아는 끝까지 대항하고 싸웠다.

하지만 결국 수세에 몰려 성이 함락되자 포위망을 뚫고 팔미라를 빠져 나왔으나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려는 순간 로마기병대에 붙잡히고 말았다. 제노비아의 최후는 비참했다.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도 끝까지 로마 제국에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죽음의 길을 택했다. 이로써 실질적 팔미라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되었지만, 오늘날까지도 제노비아의 정신은 아랍권의 자존심으로 추앙받고 있다.

▲ 지하 무덤에 남아있는 벽화.

▲ 아랍 성채에서 내려다 본 팔미라 유적지.

그 후 팔미라는 로마 제국에서 이슬람 왕조로 지배권이 넘어갈 때까지 교통과 군사상 요지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였으나 오스만 제국 시대가 되자 급속히 쇠퇴하고 만다. 더욱이 11세기에 이 지역을 강타한 지진으로 팔미라는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그 후 몰아치는 사막의 모래바람으로 팔미라의 유적들은 모조리 모랫더미 속에 파묻혀 버렸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1930년대에 와서야 팔미라의 발굴과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다. 16만평에 달하는 팔미라를 발굴하는 작업을 언제쯤 끝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조금씩 발굴되고 있는 팔미라의 신전과 석주들이 화려했던 옛 모습을 후손에게 전해주고 있다. 하지만 장기화되는 내전 때문에 이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파손되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기 그지없다.

▲ 조명을 받아 신비롭게 보이는 아랍 성채.

▲ 아파트식으로 된 고대 귀족들의 묘탑들.

▲ 석양에 빛나는 폐허가 화려했던 과거의 영화를 그립게 하고 있다.

▲ 유적지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 타드모르 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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