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계절에 함빡 젖어 Singing in the Rain~
푸른 계절에 함빡 젖어 Singing in the Rain~
  • 이슬기 기자 | 사진 김해진 기자
  • 승인 2016.05.22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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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방태산~개인산 백패킹

봄내 한 뼘 더 자란 나무 사이로 말간 하늘이 쏟아진다. 싱그러운 연초록이 그리는 계절은 그 자체로 이미 황홀하지만, 진짜 봄의 매력은 눈을 감을 때 한층 선명해진다. 뺨에 닿는 햇살의 온기와 가슴을 눅이는 계곡 물소리, 목덜미께 땀방울을 식히는 실바람의 감촉까지. 금세 지나기에 더 찬란한 계절, 마음껏 감상치 못한 봄이 못내 아쉽다. 그렇게 떠나는 계절의 옷자락을 붙들러 강원도 인제를 찾았다.

▲ 물이 오른 신록의 방태산 계곡. 여름에 꼭 다시 찾겠노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 산을 오르는 동안 한쪽에서 줄곧 계곡물소리가 들려와 고단함을 씻어준다.
속세가 지겹다면 한 번쯤은 오지로

“여기야말로 진짜 오지구나.” 인제읍내를 지난 뒤로 시간이 꽤나 흘렀는데도 아직 길이 끝날 기미가 없다. 방태산은 인제에서도 구불구불한 도로를 돌아 1시간이나 더 들어가야 한다. 서울에서 곧장 온다면 4시간을 꼬박 달려야 하는 거리. “산꾼들에게도 오지의 대명사로 통한대요.” 동행인 박지인 씨가 덧붙인다. 방태산은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은 산은 아니다. 비교적 적은 이들이 찾는 탓에 산길도 불분명한 편이다. 하지만 대신 때묻지 않은 자연과 세상과 동떨어진 한적함을 만날 수 있으리라.

방태산(1,444m)은 살둔, 달둔, 월둔의 3둔과 아침가리, 적가리, 연가리, 곁가리의 4가리를 안고 있다. 예로부터는 흉년과 전염병,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알려졌는데, 정확하게는 조선 후기 수탈과 난리를 피해 찾은 힘없는 백성들이 세상의 연을 끊고 은둔해서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우와, 푸르른 것 좀 보세요!” 강원의 짙은 신록에 지인 씨가 연이어 감탄사를 뱉어낸다. 이번에 함께 해준 박지인 씨는 아웃도어X크루에서 활약 중인 스페셜 크루. 아직은 초보 수준인 기자의 백패킹 여정에 특별 초빙한 베테랑 백패커이자 든든한 동반자다.

▲ 이번 여정의 동행인인 박지인 씨는 베테랑 백패커. 효율적으로 짐을 싸고 배낭을 몸에 맞게 조절하는 방법 등을 일러줘 도움이 됐다.

▲ 방태산 자연휴양림에서 출발해 구룡덕봉으로 올라가려면 몇 개의 계곡과 다리를 지나야 한다.

“가볍고 부피가 큰 침낭을 안쪽에 넣고 무거운 짐이 위쪽에 오도록 하는 게 좋아요.” 방태산 들머리에서 지인 씨의 도움을 받아 배낭을 꾸린다. 이제 막 발걸음을 떼려는 찰나, 하늘이 심상치 않다. 1년 치 비타민D를 뿜어주던 햇살은 어디 가고 우중충한 구름만 길게 깔렸다. 불안한 마음에 날씨를 확인하니 아뿔싸, 예상치 못한 비 소식. 덕분에 무방비 상태로 우중 백패킹을 감행하게 됐다.

계곡 따라 계절에 풍덩
초입부터 오르막이라니. 육산인 방태산의 산세는 오르기에 마냥 쉬운 편은 아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가벼운 등산이 아니라 텐트와 침낭 등 짐을 진 채 오르는 백패킹. 평소 등산에는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이거 만만치 않다. “역시 백패킹은 다르네요.” 가쁜 숨을 몰아 겨우 한 마디 뱉었더니 응원의 목소리가 돌아온다. “그만큼 정상에서의 희열도 다를 거예요.” 초입에서 5분쯤 올라가자 계곡이 등장한다. 방태산의 계곡은 수량이 풍부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상쾌해진다. 귓가에 시원하게 들리는 물소리가 무거워진 발뒤꿈치를 힘껏 밀어 올려준다.

▲ 방태산의 산세에 금세 지쳐 계곡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 차가운 계곡에 두 손을 담그니 청량함이 손끝을 타고 온몸을 식힌다.

시원한 계류가 쏟아지는 계곡을 왼쪽에 끼고 걷다 보니 어느새 갈림길 구간이다. 오른쪽으로 가면 곧장 주억봉(1,444m)으로 이어지고, 왼쪽은 구룡덕봉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왼쪽 길로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싱싱한 녹음에 대한 감탄은 끊이지 않는다. 양옆으로 뻗은 나뭇잎들이 짙은 초록을 자랑하다가 빛이 내리쬐자 막 태어난 새싹의 고운 연두색으로 변한다. 잠시 몇 발짝만 옮겨 우묵주묵한 너럭바위 사이 계곡으로 내려가 본다. 두 손을 담그니 계곡의 청량감이 머리끝까지 전달된다. 짜릿하다.

“우와 이건 무슨 꽃이에요?” 매봉령 근처에 다다르자 연분홍빛 꽃이 지천이다. “아직 남아있는 진달래 아닐까요?” “에이, 철쭉이겠죠.” 잠시 설전을 벌이자 보다 못한 사진기자가 철쭉이라고 결론을 지어준다. 조팝나무 꽃도 만개했다. 어느덧 도시에서 자취를 감춘 봄은 바람에 흘러 여기에 다 고여 있었다.

▲ 산행에는 얼마든지 자신 있었는데, 백패킹은 역시 달랐다. 그래도 즐거운 것만은 매한가지다.

▲ 산 중턱에서 발견한 연분홍꽃. 철쭉으로 밝혀졌다.

▲ 봄의 끝자락에 닿은 방태산의 색은 온통 초록으로 반짝인다.
거대한 자연 앞에 우뚝 서보기

8부 능선쯤 다다르자 울창한 나뭇가지에 가려있던 하늘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울룩불룩한 산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와 벌써 이만큼이나 올라왔어요!” 저쪽 언덕 절벽 위에 우뚝 선 낙락장송의 모습이 한 폭의 수묵 담채화를 보는 듯 수려하다.

출발지에서 구룡덕봉까지 직선거리는 불과 3.9km. 하지만 굽이치는듯한 산길이 구불구불 이어져 녹록지 만은 않은 코스다. 15kg쯤 되는 배낭 무게에 어깨가 욱신거리기 시작할 때쯤, 앞서가던 사진기자가 발을 우뚝 멈춰 선다. 이윽고 탁 트인 하늘이 열리며 강원의 산세로 빙 둘러싸인 구룡덕봉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른편의 헬기장을 지나 전망대에 오르자 비로봉부터 대청봉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자연의 장대함 앞에 작디작은 인간의 몸으로 서 있자니 경외감마저 밀려온다.

구룡덕봉에서 한 시간쯤 떨어진 개인산에 숙영지를 정했다. 해 질 무렵 겨우 도착하는 바람에 텐트 사이트를 급하게 구축했다. 저녁 8시쯤, 겨우 한숨 돌리고 즐겁고도 또 고단했던 하루의 감상을 나누고 있었다. 그때였다. ‘투둑! 툭!’ 걱정했던 비가 떨어지기 시작한 것은. 기대보다 일찍 텐트 안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백패킹의 진짜 묘미란 껌껌해진 밤 텐트 사이트에서 불을 피워두고 즐기는 수다와 별 감상이라고 생각했거늘.

▲ 이때까지만 해도 비가 안 올 거라 기대하고 있었다.
산 위에서 부르는 “Singing in the Rain~”
안개에 갇혔다. 아침 일찍 기상해 하산하기로 했는데 짙은 안개로 한 치 앞 분간이 안 될 정도다. “이 정도 안개면 길을 잘못들 수 있어 위험해요.” 베테랑 백패커 지인 씨가 심각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일단 안개가 가실 때까지 잠시 대기하기로 했다. 휴대전화 데이터 연결도 먹통이라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정오까지 기다렸는데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없어 결국 비를 맞으며 텐트 사이트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비에 레인커버 조차 준비하지 못한 상태. 지인 씨는 어쩔 수 없이 다운 재킷을 챙겨 입어야 했다. 인제에서 봄을 발견해 행복했는데, 때 지난 겨울까지 맛보고 말았다. 턱이 덜덜 떨려온다.

30분쯤 내려갔을까. 몸에 열이 오르며 비로소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물기를 머금은 인제의 산은 어제보다 더 싱그럽다. “어떻게 이렇게 예쁠 수가 있죠?” 지인 씨는 잔뜩 물을 먹어 무거워진 다운으로도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이름 모를 풀꽃 사진을 함께 찍으며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머리는 물론 속옷까지 온통 젖어버렸지만, 왠지 모를 희열에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싱잉 인 더 레인~ 암 싱잉 인 더 레인~” 엉터리 노래에 모두의 웃음보가 터졌다. 비로소 자연 속으로 오롯이 녹아든 기분. 원치 않았던 비로 여정의 절반쯤은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물기 어린 산에서 쫄딱 젖어 돌아오는 길, 되돌이켜보니 그것은 최고의 행운이었다.

▲ 구룡덕봉에서 바라본 강원의 경외로운 산세. 앞에는 헬기장이 자리하고 있다.

▲ 하산을 위해 텐트 정리 중. 세찬 비바람은 결국 피할 수 없었다.

▲ 짙은 안개를 뚫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 본격 우중 트레킹중.

▲ 밤새 내린 비로 불어난 계곡 물에 발을 빠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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