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모도는 강화도에 나란히 붙은 작은 섬이다. 이른 봄날 석모도의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다. 제방길에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바위산의 아늑한 품이 따뜻한 기억이 된다.
너는 산이 좋냐, 바다가 좋냐 하고 물어보면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짠 모래가 들러붙었다가 햇살에 부스러지듯 마르는 반짝임과 마음껏 밀려오다 뒷걸음질 치는 듯한 물살, 광활하면서도 먹먹한 드넓은 바다를 떠올리다가도 마음이 바뀐다. 습기를 머금은 숲이 뿜어내는 향기와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촉감도 좋다. 걷자고 마음먹었을 때 석모도를 떠올린 이유다.
석모도는 강화군 삼산면에 속하며, 강화도에서 서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 길게 붙어 있는 작은 섬이다. 원래 배를 타고 들어가야 닿을 수 있는 비밀스러운 곳이었지만, 2017년 6월 석모대교가 생기고 난 후로는 차로도 쉽게 갈 수 있게 됐다.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석모도에는 높지 않은 산이 몇 있다. 264m의 상주산, 316.1m의 상봉산, 235m의 낙가산, 320m의 해명산이다. 가장 경치가 좋기로 유명한 곳은 상주산이다.
석모도 상주 해안길은 총 20개의 코스가 있는 강화나들길 중 19번째 코스다. 나들이 가듯 걷는 길이란 뜻의 강화나들길은 2009년 5개 코스를 시작으로 점점 늘어났다. 강화도의 선비 화남 고재형 선생이 유구한 역사와 수려한 자연을 노래하며 걸었던 강화의 끊어진 길을 잇고, 강화가 품고 길러낸 자연과 땅 위의 모든 것을 연결한 길이다. 문화재를 볼 수 있는 코스도 있지만, 자연 풍광을 즐기며 산책 하듯 걷기에는 석모도 상주 해안길이 좋다. 출발지부터 약 6km 정도 는 융단을 깐 듯 푹신한 제방길을 걸으며 바다를 만나고, 상주산 둘레를 한 바퀴 돌면 끝나는 어렵지 않은 길이다. 총 길이는 약 10km로, 3시간 30분 정도면 완주할 수 있다. 강화나들길 코스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은 하절기 9시부터 18시까지, 동절기 9시부터 17시까지다. 풍경을 감상하다 보면 걸음이 자주 느려지기 마련이니 시간을 넉넉히 잡고 여유롭게 도착하는 것이 좋다.
이제 막 따뜻해지기 시작하는 봄의 초입에 석모도로 향했다. 하늘은 구름 하나 없이 맑지만, 미세먼지 때문에 멀리 보이는 것들은 안개에 잠긴 듯 숨어있다. 석모대교를 건너면서 보이는 여러 산도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비를 예측하기도 어렵지만, 봄철 미세먼지는 더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뿌연 날은 부지런히 두 다리를 움직이는 것이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간식과 음료를 구비해둬야 한다. 19코스 중에는 작은 슈퍼는 물론 편의점도 없기 때문에 시작점으로 가기 전에 든든하게 챙겼는지 다시 한번 점검하자. 자연을 만나러 가는 만큼 이왕이면 환경을 생각해 쓰레기를 만들지 않도록 텀블러와 다회용기에 담아 가자. 석모대교 근처에는 식당도 여럿 있어 미리 배를 채우고 떠나는 것도 좋다.
석모도 상주 해안길의 시작 지점, 동촌. 이정표를 따라가니 강화나들길 도장함이 보인다. 2015년부터 배부하기 시작한 강화나들길 도보여권에 찍을 수 있는 인증 도장이다. 도보여권은 강화군청 문화관광과에 문의 후 우편으로 수령할 수도 있고, 배부처를 찾아 직접 받을 수도 있다. 도보여권이 없는 사람은 아쉬운 대로 손바닥에 살짝 찍었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본격적으로 길에 오를 차례다.
오른쪽에는 바다와 갯벌이, 왼쪽에는 밭과 농수로가 있는 19코스의 평화로운 제방길은 6km 정도 이어진다. 군데군데 억새와 갈대가 감싸 안듯 길을 품고 있으며, 우뚝 솟아 주변 풍경을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어 경치도 일품이다. 19코스 전체를 걷지 않더라도 이 제방길만 산책 겸 걷는 이가 많다. 강화나들길 중 가장 난도가 낮은 길이라 반려견과 동행하기에도 무리가 없다.
인적이 드문 이곳에서 가장 먼저 마주치는 사람은 낚시꾼이다. 그런데 바다 쪽이 아니라 밭 방향에 있다. 알고 보니 농수로에 배수를 시작하기 전에 낚시꾼들이 붕어를 낚으러 온다고. 아버지를 따라 낚시를 다녔던 유년 시절을 떠올렸다. 그러다 짠 바람이 불어오면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썰물 때라 갯벌이 많이 드러나 있다. 질척한 갯벌 사이로 추운 계절을 지나 색을 잃은 칠면초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실 이곳은 칠면초 군락지다. 바다의 단풍이라 불리는 칠면초는 가을이 한창인 11월이면 빨갛게 물들어 석모도의 갯벌을 수놓는데, 겨울이 지나면 색이 빠진 잔디처럼 보인다.
제방길 옆에 비죽 튀어나와 그로인 역할을 하는 석축 위로 갈매기 한쌍이 오붓하다. 석모대교와 나란히 걷고 싶어 그 위로 걸어본다. 바다는 잠시 자리를 빌려주려는 듯 뒤로 흘러가고 있다. 석모나루 쯤부터 계속 곁에 떠 있는 섬은 섬돌모루다. 무인도나 다름없는 섬으로, 1992년 전두환 정권 당시 허가 없이 휴양관광지로 개발하다가 중단되어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사기 사건도 얽혀 있고, 무력 충돌도 있었던 복잡한 섬. 갈매기들의 휴식처가 된듯하다.
제방길의 끝에는 쉬어갈 수 있는 정자와 포토존이 있다. 가릴 것 없는 경치가 낭만적인 곳. 잠시 앉아 목을 축이고, 상주산을 한번 올려다봤다. 이 지점이 제방길의 끝이자, 상주산 둘레길의 시작이다. 좀 더 걸어 나가면 버스 종점이 있다. 둘레길은 버스 종점에서 시작해 다시 버스 종점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그래서 19코스를 그려보면 휘어진 막대사탕처럼 생겼다. 보통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19코스 시작지점인 동촌으로 돌아가는데, 버스가 자주 오지 않기 때문에 시간을 잘 확인해야 하염없이 기다리는 불상사가 없다.
상주산은 봉우리가 두 개인 산이며 오른쪽 봉우리에 정상이 있다. 희끗희끗 벗겨진 바위산으로, 나무가 경치를 가리지 않고 조망이 좋아 백패킹 명소로 소문났다. 정상은 이번 코스에 없지만, 숲길은 걸을 수 있다. 길을 잃을 걱정은 없다. 곳곳에 강화나들길 리본이 묶여 있어 조금만 살펴보면 다시 방향을 찾을 수 있기 때문. 상주산 둘레길에서 1km가 채 안 되는 구간만 숲길이고 나머지는 포장도로거나, 흙길이다. 숲길에 들어서자 땅을 빼곡히 덮은 낙엽 더미가 한가득이다. 제방길 못지않은 푹신함이다. 3월 중순은 싹들에게 아직 춥다. 초록빛은 바위를 덮은 이끼와 노간주나무, 리기다소나무뿐이다. 나무다리를 건너고, 찰나 같은 숲길을 지나면 다시 포장도로다. 내려가다 오르길 반복하고 동네 개들의 우렁찬 짖음을 응원 삼아 종점에 닿았다.
갯벌의 진득한 흙이 묻은 신발에, 낙엽 하나가 붙었다. 이게 석모도 상주 해안길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장면이 아닐까. 바다 조금과 산 조금. 이 길은 가을에 더 아름다울 테지만, 아쉽진 않다. 꼭 최고의 시절만 좋은 기억으로 남는 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