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국립공주박물관·공산성 순례
무령왕릉·국립공주박물관·공산성 순례
  • 이두용 기자
  • 승인 2011.04.29 16: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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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령왕릉은 1971년 7월 송산리 5호·6호분 내부 보수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발견됐다.

기품이 있는 ‘시크릿 가든’  
약 700년 동안 아름다운 문화를 꽃피웠던 백제. 하지만 화려했던 백제 문화가 세상에 전해진 건 불과 40년 전. 1971년 잠들어 있던 무령왕의 무덤이 발견되면서 백제 문화의 비밀이 세상에 알려졌다. 나·당연합군에게 패한 뒤 역사 기록이 거의 없어 구전으로 내려오던 문화. 아름다운 백제를 찾아 공주로 떠났다.

무령왕릉이 밝힌 백제문화의 수수께끼 
백제 문화 유물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대부분 도굴되거나 소실됐다. 이런 뼈아픈 과거는 비단 백제만의 일은 아닐 것인데 공주에 오니 가슴 한켠이 아리다. 자료가 희귀한 탓인지 백제 문화는 소박함 정도로만 알려졌다. 그러나 무령왕릉이 열리면서 대반전이 이루어진 것.


▲ 해박한 지식으로 취재진에게 백제 문화를 설명한 문화관광해설사 조옥순씨.

“무령왕릉은 1971년 7월 송산리 5호분과 6호분의 내부에 스며드는 습기를 막기 위해 보수하던 중 우연히 발견됐어요. 훼손된 적이 없는 무령왕릉이 발견되면서 백제 문화연구는 급물살을 탔죠.”
송산리 고분군 입구에서 만난 문화관광해설사 조옥순씨는 기자를 보자 백제 문화에서 무령왕릉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백제 역사와 문화유산에 관해 <날아라 문화유산 답사 자전거>를 펴낸 수준급 해설사이다. 

조옥순씨의 안내로 고분군 모형관으로 들어갔다. 송산리 고분군에는 총 7기의 무덤이 있는데, 이중 5호분은 활석으로 쌓은 횡혈식 석실분, 6호분은 벽돌로 쌓은 전축분이다. 5호분 천장은 활모양의 궁륭식 형태이고, 6호분 벽면에는 횟가루로 그려진 청룡·백호·주작·현무의 사신도가 있다. 무령왕릉은 전축분에 해당한다.  

“왕과 왕비가 합장된 무령왕릉은 인물과 연대가 정확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왕릉입니다. 경주에 왕릉이 많다고 하지만 공주의 무령왕릉과는 비교할 수 없죠.”

▲ 왕릉 연도 입구에 있는 국보 제162호 진묘수. 상상 속의 동물로 수호신 역할을 한다.

묘지석에 따르면 사마왕(무령왕의 생존시 이름)은 523년 5월 7일에 돌아가셨고 3년째 되는 525년 8월 12일에 왕릉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왕비는 526년 12월에 돌아가셨고 529년 2월 12일에 왕릉에 안장하였다. 조옥순씨는 “당시 장례 기간이 27개월이었는데, 시신을 땅에 묻지 않고 관에 넣어 별도로 지은 빈전 안에 모시는 것을 빈장”이라고 설명했다. 백제만의 고유한 장례 풍습이다.

탄성이 절로 나는 금속공예기술
터널형 천장을 한 무령왕릉의 벽돌은 대부분 연꽃무늬가 있으며, 동·서·북 3벽에 불꽃 모양의 감(龕·신주를 모시는 곳)을 만들어 등잔을 올려놓을 수 있게 했다.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유물은 관장식·귀걸이·목걸이·팔찌 등 장신구를 포함하여 총 108종 4,600점. 이 중 국보로 지정된 것만도 12종에 달한다. 우리나라의 유적 발굴 사상 최대 학술적·역사적 가치를 지녔다.

▲ 국보 제154호와 제155호인 왕의 금제관장식과 왕비의 금제관장식(좌) 그리고 국보 제159호 금제뒤꽂이(우)<사진제공 공주시청>

국보 제154호와 제155호인 왕의 금제관장식과 왕비의 금제관장식은 백제 문화의 정수로 꼽힌다. 번영을 기원하듯 타오르는 불꽃 모양에 연꽃을 수놓은 관장식은 얇은 금판으로 만든 영락을 127개나 달아 화려함을 뽐내고 있다. 당시 백제의 금속공예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 수 있다. 

“국보 제159호인 금제뒤꽂이는 날개를 편 새의 날렵한 모습을 닮았는데, 일본 관광객들이오면 전시대 앞에서 떠날 줄 모르고 탄성을 지릅니다.”    

왕릉 연도 입구에 있는 짐승 모양의 석상이 눈길을 끈다. 무덤에 들어오는 나쁜 것들을 막아주는 수호신 역할을 하는 국보 제162호 진묘수다.

“중국 남조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것들은 돼지나 악어, 물소 등 모양이 확실하지만 이 진묘수는 현실의 동물이 아닌 상상 속의 동물입니다. 이점을 높게 평가받아 국보로 지정된 것이죠.” 
   
이밖에 외국에서 보낸 다양한 부장품들을 보면 당시 활발했던 백제의 해외 교류를 짐작할 수 있다. 송산리 고분군 모형관에 있는 석실과 유물은 모두 모형이다. 진품 유물들은 국립공주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64년 동안 백제를 지켰던 공산성
공산성으로 걸음을 옮겼다. 공산성은 고구려한테 한성을 빼앗기고 천도한 곳으로 당시 웅진성으로 불렸다. 제22대 문주왕부터 제26대 성왕 16년까지 64년 동안 왕도를 지킨 공산성은 석성 구간 1930m, 토성 구간 730m로 이어진 총 길이 2660m에 이르는 포곡형 산성이다. 원래 토성이었다가 조선시대 선조와 인조 때 석성으로 개축했다.

▲ 공산성은 고구려한테 한성을 빼앗기고 천도한 곳으로 당시엔 웅진성으로 불렸다.

공산성에는 금서루를 비롯 쌍수정·진남루·동문루·광복루·임류각·만하루·공북루 등 8개의 누각과 정자가 있다. 또 성 안에는 영은사와 인공연못 연지(蓮池)도 있어 왕궁의 구색을 갖췄다.

“서문인 금서루는 공산성의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누각입니다. 금서루에 오르면 서쪽 방향으로 터널을 찾아보세요. 터널 위의 산이 무령왕과 왕비의 장례를 치른 정지산입니다.”

눈길이 미끄러워 등산화로 갈아 신은 조옥순씨가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성곽 트레일은 정지산을 보면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된다. 조금만 가면 쌍수정 광장이 나온다. 광장 가운데는 백제의 궁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왕궁 추정지가 있다. 실제 이곳에 큰 기둥 자리와 기와 등이 나왔다고 한다. 연못도 왕궁 추정지 바로 옆에 있다. 이 연못은 물이 솟는 못이 아닌 물을 길어다 저장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곽을 걷다 보니 경복궁의 경회루를 닮은 웅장한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공산성에 남은 건축물 중 가장 큰 임류각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 동성왕이 말년에 세운 누각으로 신하들의 연회 장소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기둥만 42개에 달할 만큼 규모가 크죠. 이곳 단청은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물을 본떠 그려서 아름답습니다.”
만하루에 오르면 금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곳에 깊이 10m에 달하는 연지가 있다. 여기서 계속 성곽을 따라 가면 공북루가 나온다. 남쪽의 진남루와 함께 전라도와 경상도 일부, 충청도 사람들이 한양을 오갈 때 통과하는 중요한 문이다. 현대식 다리가 없었던 1920년대 25척의 배를 연결해 만들었다는 배다리 터가 보인다. 성곽 트레일은 공북루에서 끝난다. 공산성을 크게 한 바퀴 돌면 2시간 남짓 걸린다.

칼바람에도 친절한 설명과 웃음을 잃지 않은 조옥순씨.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나서 그는 기자에게 시간이 나면 동학농민군이 마지막 전투를 벌였던 우금티를 꼭 가보라며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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