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물이 휘도는 태극의 산, 계룡산 트레킹
산과 물이 휘도는 태극의 산, 계룡산 트레킹
  • 글 김경선 기자|사진 이소원 기자
  • 승인 2011.04.29 16: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라푸마와 함께하는 KOREA TRAVEL 공주

▲ 산과 물이 태극 형상을 이룬다는 계룡산의 산세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학사~관음봉~동학사…약 9km 4시간

온 산하에 새하얀 카펫이 깔렸다. 지구온난화 때문인지, 이제 ‘기상이변’이라는 단어가 생소하지가 않다. 지난해에도 한반도에 이례적인 혹한과 폭설이 잦더니 올해도 눈이 흔하다. 숙소를 출발하기 전 뉴스를 보니 아침 기온이 영하 13도란다. 게다가 오전에 눈 소식까지 있다니 평소보다 옷을 더욱 단단히 껴입게 된다.
공주 시내에서 차로 30분을 달려 동학사 입구에 도착했다. 탐방안내소부터 차량 통행이 금지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행을 시작했다. 탐방안내소를 지나자 산자락 음식점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평일 오전이라 인적이 뜸하지만 주말이면 왁자지껄 사람 냄새가 가득한 곳이다.

상가지구를 지나자 왼쪽에 계룡산 국립공원사무소가 보였다. 산행을 함께할 국립공원사무소의 조성열씨가 근무하는 곳이다.
“평생을 국립공원에서 일하다 얼마 전 정년퇴임을 했어요. 평생 어딘가에 소속돼 있다가 무소속이 되니 견딜 수가 있어야죠. 그래서 지금은 계룡산 국립공원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계약직’이 사회 부조리의 산물처럼 느껴지겠지만, 조성열 씨의 계약은 어딘지 모르게 숭고해 보였다. 그저 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행복해 보였기 때문일까.

▲ 비구니 스님들이 머무는 사찰이라 그런지 동학사는 정갈하고 깔끔한 모습이다.

사무소를 나와 동학사로 향하는 길은 계곡을 따라 잘 닦인 시멘트길이 이어졌다. 밋밋한 길이 지겨워질 무렵 그가 계룡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계룡산은 산중에 왕이에요.”
백두산도 있고 지리산도 있고 설악산도 있는데 덩치 작은 계룡산이 왠 왕?
“계룡산은 닭벼슬을 쓴 용의 형상이에요. 닭벼슬은 왕관을 가리키고 용은 임금을 가리키죠. 임금이 왕관을 쓰고 앉아 있는 형상이에요.”

금빛 닭이 알을 품은 형상
계룡산은 조선왕조의 새 수도 1순위였을 만큼 산세가 예사롭지 않은 산이다. 1393년 태조 이성계는 계룡산 천도를 염두에 두고 풍수지리에 밝은 무학대사와 함께 계룡산을 찾았다. 당시 무학대사는 계룡산을 직접 둘러보고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금빛 닭이 알을 품은 형상)이요,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용이 날아 하늘로 오르는 형상)이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금계’는 부를 상징하고, ‘비룡’은 현명한 임금을 의미하니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면 풍요롭고 평안한 나라가 유지될 것이라는 의미다.

무학대사의 말에 확신을 얻은 이성계는 계룡산 자락인 신도안에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사가 한창이던 1393년 말 문신 하륜이 계룡산 천도를 맹렬히 반대하고 나서면서 파국을 맞았다. 하지만 17세기 말부터 다시 계룡산 천도설이 고개를 들었다. 조선 후기에 유행한 <정감록> 때문이다. <정감록>의 골자는 ‘조선왕조가 곧 망하고, 그 위기가 절정에 이르면 계룡산에서 정진인(鄭眞人)이 나타나 새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다. 많은 백성들의 염원처럼 계룡산에 새 나라가 세워지진 않았지만 수많은 정설과 비화를 보면 과거부터 계룡산이 예사롭지 않은 산임은 분명하다.

▲ 비구니 도량처인 동학사에서는 앳된 얼굴의 비구니 스님들을 만날 수 있다.

옛 이야기에 흠뻑 빠져든 사이 어느새 동학사에 도착했다. 그런데 사찰 입구에 홍살문이 서있는 것이 아닌가. 홍살문은 능(陵)이나 원(園)·묘(廟)·관아(官衙) 등이 있는 마을 입구에 세우는 붉은색의 문으로 출입하는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라는 뜻이 담긴 유교 문화의 산물이다. 동학사에 홍살문이 있는 까닭은 사찰 내에 단종과 사육신을 비롯해 박제상·정몽주·이색·길재 등의 위패를 모시는 숙모전·동계사·삼은각이 있기 때문이다.

옹골차고 아름다운 암봉미 압권
“봄부터 가을까지는 동학사 입구에서 오뉘탑~자연성릉을 거쳐 관음봉으로 오르는 산행이 일반적이에요. 겨울철에는 자연성능 바위 지대가 미끄러워 동학사에서 바로 관음봉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많죠. 동학사~관음봉 구간이 거리는 짧지만 등산로가 가팔라서 제법 힘드실 거에요.”

▲ 40m 높이의 은선폭포 물줄기가 혹한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정갈한 비구니 도량인 동학사를 지나자 포장도로 대신 산길이 나타났다. 등산로를 따라 이어지는 동학계곡은 계류가 꽁꽁 얼어붙은 탓에 수려한 경관은 없었다. 동학사에서 걷기를 30여 분, 은선폭포에 닿았다. 거대한 암반을 따라 떨어지는 폭포수는 그대로 멈춰 거대한 얼음 조각 같았다.

폭포를 지나자 산길이 더욱 가팔라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르기를 30여 분, 드디어 계룡산 산줄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계룡산을 ‘산태극(山太極) 수태극(水太極)의 길지(吉地)’라고 부릅니다. 지리산에서 올라온 산줄기가 계룡산에서 다시 남하하는 형국이라 산태극이요, 또 금강의 지류가 계룡산을 휘돈 후 금강의 원줄기와 합류한다고 해서 수태극이라고 하죠.”
산줄기를 타고 불어오는 매서운 겨울바람에 코끝이 얼얼해졌지만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감탄사가 절로 난다.

▲ 관음봉 고개에 닿기 직전 드디어 계룡산 산세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려한 계룡산의 풍광에 시선을 뺏긴 사이 주능선에 닿았다. 주능선 삼거리에서 오른쪽 능선길을 따라 다시 10여 분을 걷자 계룡산에서 일반인이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 관음봉(816m) 정상이다. 정상에 서자 계룡산의 산세가 환하게 드러났다. 서쪽으로 문필봉(756m)이 보이고 남쪽으로 쌀개릉과 천황봉(845m)이 승천하는 용의 모습처럼 힘차게 꿈틀거린다. 삼불봉에서 자연성릉을 지나 관음봉까지 이어지는 능선길은 감탄을 자아내는 수려한 암릉길이다.

“계룡산의 백미는 저기 보이는 자연성릉이에요. 조물주가 정성스레 빚어 놓은 조각 같지 않나요?”

시시각각 변하는 신령하고 영험한 산세

▲ 신령한 기운을 찾아 계룡산을 찾은 사람들이 염원을 담아 쌓은 돌탑들.
계룡산은 산행을 시작한 지 2시간 만에 정상을 보여줬다. 그만큼 계룡산은 웅장한 자태를 뽐내지도 않거니와 높지도 않은 산이다. 하지만 그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산줄기와 물줄기가 태극의 형상으로 서로 휘감아 흐르며 신령한 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전국의 수많은 도사님들 중 계룡산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만큼 계룡산의 기운이 영험하고 신령하다는 소리다.

하늘에서 굵은 눈송이가 내리기 시작했다. 발 아래 펼쳐진 비현실적인 풍경이 눈송이와 어우러져 더욱 그림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도심에서는 반갑지 않던 눈이 계룡산 정상에서는 반갑기가 그지없다.
“30년 동안 수없이 계룡산을 올랐지만 오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에요. 사계절이 다르고, 다달이 다르고, 또 매일이 다르죠.”

가파른 산길을 되짚어 내려가는 동안 눈송이가 더욱 굵어졌다. 불과 30분 만에 다시 밟는 산길이 화사한 눈송이 덕분인지 새롭기만 하다. 자연은 이렇게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준다. 다음에 만나는 계룡산은 또 어떤 풍경으로 우리를 맞이할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