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보지 않고 어찌 공주를 안다 하시오”
“걸어보지 않고 어찌 공주를 안다 하시오”
  • 글 사진·이소원 기자
  • 승인 2011.04.29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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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푸마와 함께하는 KOREA TRAVEL 공주

▲ 백제를 대표하는 공산성. 1400년이 넘는 시간을 품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곰나루~무령왕릉~공산성~공주향교~대통사지…약 8km 3~4시간

충청남도 공주시는 백제가 위례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475년(문주왕 1)부터 538년(성왕 16) 부여로 천도하기까지 약 60년간 백제의 도읍이자 고려·조선시대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다. 유물과 유적이 많은 이 공간을 어떻게 하면 속속 살펴 볼 수 있을까. 걷기로 했다. 신체 건강한 사람이라면 무리 없이 또 차량의 위험 없이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것을 우선으로 했다. 다행히 곰나루·무령왕릉·공산성 등이 멀지 않아 백제의 흔적도 음미할 수 있다. 공주를 남과 북으로 가르는 금강 이남부터 공주 시청까지를 전체 바깥 라인으로 잡았다. 

금강 품고 흘러가는 백제 여행

▲ 암곰의 슬픈 사연이 스며 있는 곰나루.
시작은 ‘고마나루’라고도 부르는 곰나루①. 웅비탑을 마주보고 곰나루국민관광지로 들어서자. 곰나루는 무령왕릉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금강으로 잦아드는 강변 일대를 말한다. 예전 금강을 건너던 나루터였다고. 곰나루에 얽힌 전설 때문인지 발자국 하나 없이 쌓인 흰눈이 쓸쓸함을 더한다. 옛날 어느 암곰이 강을 건너온 나무꾼을 납치해 새끼 둘을 낳고 살았단다. 세월이 흐른 어느날 나무꾼은 탈출에 성공했고 끝내 돌아오지 않는 나무꾼을 원망한 암곰은 새끼를 데리고 강물에 빠져 죽었다. 곰의 원한 때문인지 그 뒤로 농사도 잘 되지 않고 배가 뒤집히는 일도 잦았다고. 마을 사람들은 곰의 원한을 달래주는 사당을 세웠다. 길 건너 소나무숲에 자리한 곰사당이다. 국립공주박물관으로 향하는 길에 있으니 들러보는 것도 좋겠다.  
 
큰 길로 나와 도로표지판을 보고 국립공주박물관까지 1.5km 조금 넘게 걷는다. 두 번째 삼거리에서 국립공주박물관을 따라 좌회전하면 조선시대 충청도 관찰사가 공무를 집행하던 선화당과 지난해 9월 문을 연 한옥마을②에 닿는다. 대부분의 박물관은 월요일이 휴관이다. 알아두면 여행 계획을 짤 때 수월하다.

국립공주박물관③에서 바로 무령왕릉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박물관 간판을 마주보고 왼편으로 걸어가다 ‘무령왕릉 가는길’이라는 표지판을 보고 우회전하면 된다. 10분이면 무령왕릉에 닿는다. 화살표가 헛갈릴만도 하니 주의하자. ‘정지산 유적’이라는 표지판과 만나는 삼거리에서 오른쪽 길로 향하면 된다. 야트막한 내리막이 시작되는 순간 거짓말처럼 봉긋하게 솟은 봉분이 모습을 드러낸다. 송산리 고분군이다. 봉분 앞으로 삐죽 솟은 아파트 단지를 바라보며 고분을 에둘러 내려온다.

▲ 백제 25대 무령왕과 왕비의 합장릉인 무령왕릉을 포함한 송산리 고분군. 백제 중기의 왕릉으로 여겨지면 대부분 횡령식 석실을 갖추고 있다. 1997년 폐쇄됐고 전시관에 모형이 자리하고 있다.

드디어 무령왕릉④. 백제 문화의 진수를 맛볼 시간이다. 송산리 고분군(사적 제13호)은 백제 웅진 도읍기 왕과 왕족의 무덤이 군집된 곳으로 무령왕릉을 비롯한 7기의 고분이 있다. 1971년 6호분의 침수를 막기 위해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발견된 7호분(무령왕릉)에선 백제 웅진시대의 면모를 밝혀주는 세기의 유물이 무더기로 나왔다. 여기서 나온 4000점이 넘는 유물은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아쉽게도 무령왕릉 내부는 관람할 수 없다. 보존을 위해 1997년 영구 폐쇄됐기 때문이다. 모형관이 아쉬움을 덜어준다.

무령왕릉 입구로 나와 큰길에서 공주문예회관을 뒤에 두고 금강을 향해 걷는다. 돌담을 오른쪽에 두고 걷다 삼거리에서 교동초등학교 방향으로 우회전한다. 교동이다. 작고 오래된 집들이 아기자기하게 모여 있다. 파란 대문집 앞에서 시래기를 삶고 있는 할머니에게 “공주향교가 어디냐”고 묻자 “저 뒤로 삐죽 솟은 나무를 따라가라”는 답이 돌아온다.

▲ 충청남도 유형문화제 제75호인 공주향교.
파란 대문을 등에 두고 계속 직진하다 두 번째 만나는 오른쪽 샛길로 접어든다. 조용한 마을 사이로 홍살문과 공주향교⑤가 보인다. 공주시 문화재관리소의 지원구 학예사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국립 중등 교육기관이었던 공주향교는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처음 자리를 잡은 것은 고려시대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라며 “개화기에는 근대교육의 장이었고 현재 봄과 가을에 석전(문묘에서 공자를 비롯한 4성 10철 72현을 제사 지내는 의식)을 봉행한다”고 설명했다. 평소에는 잠겨있어 향교 오른쪽으로 자리한 고직실 관리인에게 문의하면 안을 살펴볼 수 있다. 무섭고 든든한 개가 짖는 소리에 놀라지 않을 뚝심이 필요하다.

제민천 따라 만나는 소소한 풍경들
향교에서 제민천 방향으로 200m 가량 직진하다 물줄기가 보이면 좌회전한다. 제민천을 우측에 두고 금강교 방향으로 거슬러 오르면 왕릉교를 조금 못가 황새바위성지⑥에 닿는다. 천주교 박해가 극심했던 1800년대, 충청도 감영이 있던 공주로 이송된 천주교도 300여 명이 순교한 곳이다. 큰 항쇄 칼을 쓴 죄인들이 언덕 바위 앞으로 끌려나와 순교했다고 항쇄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 공산성에서 내려다 본 금강과 금강교 그리고 백제큰다리. 말도 없이 수천년의 시간을 품고 흘러간다.

황새바위성지에서 왕릉교를 건너 직진하면 무령왕릉 모형의 연문과 만난다. 연문을 지나면 공주 시가지와 금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공산성⑦(사적 제12호)에 닿는다. 금강변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크기의 장방형 성으로 능선을 따라 2660m의 성곽이 이어진다. 백제시대 당시에는 토성이었으나 조선 초기에 석성으로 개축했다. 금서루·공북루·쌍수정·동문루 등의 문루를 비롯해 겨울을 빼고는 주말마다 수문장교대의식이 진행되어 볼거리가 풍부하다. 성곽을 따라 금강줄기와 공주 시내를 내려다보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금서루에서 연문 뒤로 자리한 무령왕릉을 보며 아련하게나마 백제의 한 순간을 공유해보자. 한 바퀴 돌아보는데 1시간은 족히 걸린다. 출출하다면 공산성 앞에 몰려 있는 음식점에서 공주 별미인 밤요리를 맛보는 건 어떨까.

▲ 천주교 중동성당. 서양 중세 때 유행하던 고딕건축 양식 건물이 눈길을 끈다.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어 공주 시내가 내려다 보인다.
아쉽지만 공산성을 남겨두고 시내로 향한다. 제민천을 곁에 두고 걸어도 좋고, 공산성에서 내려와 바로 큰길로 내려서도 좋겠다. 큰길을 따라 계속 걸으며 시끌시끌한 시내 기분을 맛볼 수 있다. 산성2교 근처 골목에는 매일장인 산성시장⑧이 선다. 공주 별미로 꼽히는 칼국수를 맛보아도 좋겠다. 산성시장과 공주오일장은 공주에서 첫손에 꼽히는 장이다. 예전에는 공주고교 근처에서 열리는 1·6일장인 공주오일장이 더 벅적거렸다지만 지금에 와서는 매일장인 산성시장을 더 쳐준단다. 시장구경으로 든든해진 발걸음을 중동초등학교 방향으로 돌린다. 아까 걷던 큰길로 나와 직진하면 된다. 중동초등학교를 못가 좌회전해서 200m 가량 직진하면 충남역사박물관이 나온다. 맞은편의 중동성당⑨에 먼저 들렀다가 역사박물관⑩으로 향하자. 언덕에 자리하고 있어 공주 시내의 오종종한 집들이 내려다보인다. 역사박물관에서 영명중고교 방향으로 들어서면 넓지 않은 공터에 비석이 하나 있다. 4·19학생혁명기념비⑪다.

다시 큰 길로 내려서 공주고교 방향으로 직진한다. 공주고교 근처 봉황교 주변이 공주오일장⑫이 서는 장소다. 평소에는 제민천 뚝방에 장이 서지만 눈이 많은 겨울날엔 봉황교 근처에서 장이 펼쳐진다. 몹시 추웠던 오일장날 아침. 날씨 때문인지 8시가 넘도록 사람이 불지 않는다. “아들 공부시키려고  5년만 하려고 했다”는 한 할머니는 “올해 스물여덟인데 공부를 잘 안했어”라며 매서운 바람에 얼어붙은 눈물 같은 눈곱을 자꾸만 떼어낸다. “20년 넘게 장사하면서 전국에서 나를 찾아오는 단골들이 있다니까. 그만둘 수가 없지.”

봉황교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해서 직진한다. 300m 가량 걸었을까. 대통사지⑬가 나온다. 백제 성왕이 창건한 대통사는 우리나라에서 그 위치가 확실히 알려진 가장 오래된 절이다. 525년 선왕인 무령왕의 명복을 빌고 아들 위덕왕의 건강을 기원하기 위하여 이 절을 짓고 법화경의 대통불(大通佛)을 모셨다는 설이 전해진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당간지주(보물 제150호)가 남아 있어 ‘반죽동 당간지주’라고도 부른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도 통일신라 때까지 유지되다가 폐사된 것이리라. 가만, 아까 만난 무령왕을 이곳에서도 만난다. 어쩌면 이 공간은 백제와 공주 그들을 겹겹이 품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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