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세월에도 변치 않는 백제 향기
천년 세월에도 변치 않는 백제 향기
  • 박성용 기자
  • 승인 2011.04.29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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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여 년 간 백제 왕도를 지킨 공산성

왕국의 거리에서는 간혹 길을 잃어도 괜찮다. 곳곳에 남은 왕국의 가신들과 후예들이 나그네에게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왕국의 땅, 공주. 찬란했던 고대 영화는 사라졌지만 그 흔적들은 천년이 넘는 세월에도 사금파리처럼 남아 나그네의 발길을 불러들인다.

공주는 고대 백제 왕국의 도읍지. 제22대 문주왕(475~477)부터 제26대 성왕(523~554)까지 약 5대에 걸쳐 60여 년 동안 왕도가 들어선 땅이다. 700년 가깝게 이어진 백제 왕국의 역사에서 보면 그 기간은 짧았지만 화려한 발자취를 남겼다.

▲ 금강을 굽어보는 공산성 만하루와 인공 연못 연지.

공주의 상징 공산성과 인절미
 
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이 도읍을 사비성(부여)으로 천도할 때까지 공주는 백제인들에게 숨을 고르고 힘을 축적시켜준 자양분이었던 것이다. 제25대 무령왕은 민생 안정과 국력을 신장시켜 국제적으로 백제의 지위를 크게 신장시켜 아들인 성왕이 백제 중흥 시대를 열게 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금강을 굽어보고 버티고 선 공산성(웅진성)은 백제 왕국의 정수리인 셈이다. 멀리서 봐도 인상적인 성곽을 간직한 공산성은 그러니까 백제 도성의 아이콘이자 공주의 랜드 마크인 것. ‘고마나루’로 불리는 금강변의 곰나루는 백제 역사의 중심 무대이자 국제적 교통의 관문이었다.  

공산성이 남성의 상징이라면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 고분은 여성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둥근 봉분은 마치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포근하다.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모를 슬픈 사연이 담긴 듯한 둥근 곡선이 주는 이미지는 편안하고도 자칫 무너질까봐 조바심이 난다. 그 앞을 흐르는 금강이 공주의 젖줄이라면 송산리 고분군은 젖꼭지에 해당한다. 무령왕릉 한 군데에서만 108종 4600여 점에 이르는 유물이 나온 것을 보면 백제 문화는 당대 최고 수준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그래서 공주사람들에게 금강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면서부터 힘껏 빨아야 하는 초유가 아닐까.    

강을 끼고 있는 땅은 서로 뺏고 빼앗기는 고단한 역사를 안고 있다. 한강이 그랬고 남쪽으로 눈을 돌리면 금강도 치열한 싸움터였다. 조선시대 평안병사 이괄이 1624년 인조반정 후 공신 책봉 과정에서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켜 한양으로 내려오자 인조 임금은 공주 공산성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이때 공산성은 인조에게 든든한 안식처가 되어 준 곳이다.

▲ 어머니 젖가슴 같은 둥근 고분.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모를 슬픔이 배어 있다.

공산성에 머물던 인조에게 공주사람 임씨가 진상했던 떡이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인절미. 맛에 반해 인조가 무슨 떡이냐고 묻자 떡 이름을 모르는 신하들은 그저 ‘임씨가 만든 떡’이라고만 알고 있었던 것. 인조는 이 떡을 ‘임씨가 만든 맛있는 떡’이라고 해서 임절미(任切味)라는 이름을 내렸다. 그 뒤 임절미는 인절미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공주 산성시장의 여럿 떡집들은 인절미를 간판 주자로 내세워 작은 찰떡 하나에도 공주의 자부심을 버무려내고 있다.

망이·망소이와 전봉준의 꿈
공주는 반란의 땅. 고려 명종 6년(1176) 천민부락 명학소에 살던 망이·망소이 형제가 스스로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로 이름을 짓고 세력을 모아 난을 일으킨 곳이다. 지방 탐관오리들의 횡포에 맞서 공주를 함락해 조정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농민과 천민들로 이루어진 망이·망소이의 난은 신분제 질서를 타파하고 신분해방운동을 외쳤다는 의미에서 주목할 만한 반란이었다. 소(所)는 특별행정구역으로 주로 천민들이 모여 살던 곳. 두 형제의 궐기는 이후 신분제의 사슬이었던 천민집단이 사라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천주교 박해는 18세기 공주에도 불어 닥쳤다. 황새바위는 신자들이 공개 처형된 장소. 당시 충청도 감영이 있었던 공주로 압송된 천주교 신도 수백 명이 이곳에서 순교를 당했다.

망이·망소이의 난 이후 반란의 역사는 80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우리 근대사에서 가장 격렬했던 피비린내 나는 혁명으로 이어졌다. 우금티. 1894년 제2차 동학농민군이 조선 관군과 일본군으로 구성된 연합군과 최후의 격전을 벌인 곳. 농민군 주력부대를 이끌던 전봉준과 북접 부대의 손병희가 힘을 합친 4만 농민군은 공주를 함락하기 위해 우금티에서 50차례에 가까운 진격과 후퇴를 거듭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최신식 무기에 밀려 대패했다. 이로써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혁명의 꿈은 사라지고 녹두장군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터. 훗날 시인 안도현은 우금티에서 패한 전봉준을 아래와 같이 노래했다.


눈 내리는 만경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안도현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 중에서


도읍을 계룡산으로 옮겼다면?

도읍이 사비성으로 옮겨지고 백제가 망했어도 공주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변치 않았다. 당나라는 백제가 멸망하자 웅진도독부를 설치했다. 그 뒤 신문왕 6년(686) 웅천주를 설치하여 13개 군 29개 현을 통괄하는 지역 중심 역할을 했다. 경덕왕 16년(757)에는 옹주로 개칭하였다가 태조 23년(940) 공주로 이름을 바꾸었다. 성종 12년(993)에는 하남도(河南道)에 속하였다가 충혜왕 2년(1341)에는 목(牧)으로 승격하여 지역 중심지가 되었다.

▲ 공산성에서 본 금강.

조선 세조 때에는 공주에 진관이 설치되었으며 1581년(선조14)에 충청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되어 다시 충청도의 중심 위치가 되었다. 그 후 고종 32년(1895) 공주군으로 개편되었고, 충청남도의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1931년 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되면서 공주는 하나의 면이 되면서 군중심지로 되었다.
1938년에 공주면이 읍으로, 1986년에는 공주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공주군과 분리되었다. 1995년에 다시 공주시ㆍ군이 통합되었다.

공주의 또 다른 명물은 계룡산. 공주시의 동남쪽을 병풍처럼 둘러친 계룡산은 동학사ㆍ갑사 등 유서 깊은 절집들을 품안에 거느리고 있다. 계룡산은 지리산에 이어 두 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만큼 명산으로 꼽힌다. 닭의 벼슬을 머리에 쓴 용의 모양과 비슷한 계룡산은 일찍이 무학대사가 조선 개국의 도읍지로 정할 만큼 풍수지리로도 명산에 꼽힌다. 만약 태조 이성계가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계룡산 일대에 도읍을 정했다면 조선의 운명은 과연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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