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것, 문래창작촌
남기고 싶은 것, 문래창작촌
  • 신은정 | 양계탁 사진기자
  • 승인 2024.02.06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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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공소가 이어진 거리에 예술이 파고들어 만들어진 문래창작촌. 바쁘게 돌아가는 철공소 틈 사이, 곳곳에 남겨진 역동적인 그라피티가 시선을 끄는 곳. 변하지만 바뀌지는 않았으면 하는 서울의 지역 중 하나다.



5년 전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 이사 왔다. 집으로 가는 길에 작은 삼거리가 있는데, 그 모퉁이에는 항상 지나가는 이들을 지켜보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처음엔 경계했고, 다음엔 익숙해졌으며, 언젠가 신경 쓰지 않게 됐을 때 어느 순간부터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당연했던 일상의 한 부분이 나도 모르게 달라졌다. 일상은 그대로인데, 자꾸 변하는 것들 투성이다. 그때부턴 어딜 가든지 달라지지 않은 것에 먼저 눈길을 두게 됐다.
제조업이 한창이던 그 시절 서울은 동네마다 강렬한 특색을 띠고 있었다. 성수동의 수제화, 창신동의 봉제의류, 충무로의 인쇄, 종로의 귀금속 등 각 지역의 정체성은 제조업이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이 필요하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단번에 떠오를 만큼 각 지역을 대표하는 제품들은 명확했다. 문래동 하면 바로 기계나 금속이 떠오르듯 말이다.



문래동에 본격적으로 철공소가 늘어나고 호황기를 맞이한 것은 1970년대다. 일제강점기 때 도시계획에 따라 영등포구가 공업지역으로 지정되며 각종 공장이 자리 잡았는데, 그중에는 전국에서 가장 큰 방직공장도 있었다. 이후 다양한 산업의 공장이 모여들며 70년대부터는 철재상도 빠르게 늘어났고, 70년대 후반 철재상가 건물이 세워지며 문래동 거리는 온통 철공소로 물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조업이 일으킨 한국의 경제는 궤도를 달리했고, 90년대 말에는 중국산 부품이 들어오면서 문을 닫는 곳도 늘었다. 서울이 빠르게 발전하자 제조업은 주춤하기 시작했다. 문래동의 풍경도 달라지고 있었다. 큰 공장들이 빠진 자리에는 아파트, 대형 마트, 공원, 쇼핑센터가 세워지고, 골목을 빼곡하게 채우던 철공소들이 빠진 곳에도 예상치 못한 새로운 물결이 흘러 들어왔다.



저렴한 작업 공간이 필요했던 예술인들은 2000년대부터 문래동의 틈을 채웠다. 젊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회색빛을 띄던 문래동은 젊음의 얼굴, 생동감 넘치는 벽화, 창작의 열정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 사람들이 모이니 식당과 카페도 늘어났다. 그것만이라면 좋을 텐데, 원주민은 자리를 위협받았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 벌어진 것이다. 문래창작촌을 이루던 작은 철공소와 예술 공방들이 많이 사라졌다는 소식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다시 찾아온 문래창작촌에는 눈에 띠게 늘어난 카페와 술집, 식당들이 줄지어 있다. 평일의 이른 시간대에는 카페를 제외하고는 문을 닫은 곳이 더 많다. 죄 없는 술집들이 괜히 눈엣가시처럼 여겨진다.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 중 하나일 텐데 말이다. 그렇게 문래창작촌에서 원주민과 예술인이 만나 한창 조화로운 활기를 띠던 전성기도 20년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이 바뀐다’는 말은 옛말이다. 이제는 작년에 갔던 곳도 금세 달라져 헷갈릴 정도다. 오늘은 찬란했던 그 흔적들을 찾고 싶다.


차가운 공기가 옷깃을 단단히 여미게 하지만 햇빛은 따사로운 겨울의 한적한 평일 낮. 점심시간이 갓 지난 문래동은 외지인이 많이 찾아오는 주말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분주한 철공소가 모여 있는 곳에는 철을 어루만지는 굉음이 간간이 들려오고, 길 건너 고요한 골목에서는 분주히 또 샅샅이 시선을 옮기는 젊은이들을 마주친다.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나오면 식사를 마치고 바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직장인이 여럿이다. 여러 가지 생기가 도는 문래동이다. 지방 출신의 이방인은 서울이 신기했다. 빠르게 변화하지만, 남아야할 것은 남아 있는 혼돈의 도시. 젊은 사람 동네, 늙은 사람 동네로 나뉘지 않고 같은 동네에서도 다양한 나이대가 어우러질 수 있는 곳이 많아서였다. 필자에게는 문래동이 그런 동네였다.
서울의 옛 분위기에 매력을 느끼는 이들은 출사지로 꼭 문래창작촌을 꼽는다. 평일에는 철공소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삐 돌아가기 때문에 카메라를 든 사람은 드물고, 주로 주말에 찾아온다. 철공소 대문에 그려진 화려한 색감의 그라피티는 철공소들이 문을 닫는 주말에만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평일에는 가지런히 접혀 한 쪽에 누워 있다. 정체 모를 연기가 자욱하게 깔린 철공소 거리에 작업복을 입지 않은 평일의 낯선 자는 발걸음이 빨라진다.



미로처럼 뻗은 다른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차곡차곡 쌓인 철 기둥을 지나 몇 발자국 걸으면 갤러리가 있으며, 예술 공방, 다시 철공소다. 알록달록한 벽화에는 기계 부품들이 그려져 있어 이곳의 정체성이 묻어난다. 거리의 조형물도 그렇다. 이곳저곳의 거리를 훑다 눈에 들어온 것은 거리의 틈 사이에 비죽 튀어나온 듯 자리하고 있는 작은 편집숍, 바이바이바이Bye By Buy다. 상가도, 주택도 아닌 것이 어디선가 툭 떨어진 듯 존재감을 뽐낸다. 이곳은 원래 사과 냉장창고로 사용되던 곳을 개조해 만든 곳이라고 한다. 문래동의 창작자들이 만든 상품을 선보이고자 만든 가게로, 아늑한 내부에는 아기자기하고 빈티지한 소품들이 가득 차 있다. 보물 찾기를 하는 것처럼 2000년대 초의 문래동을 이곳에서 찾아본다.
다시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다. 다음에 다시 찾아올 문래창작촌은 지금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오늘만 볼 수 있는 것은 오늘 꼭 보고 싶다.


▶문래동 일상 한 끼
문래돼지불백 본점
지난 2013년 문을 열고 문래동 사람들의 일상이 되어주고 있는 가게. 숯불 향이 매력적인 돼지불고기와 따끈한 우거지 된장국, 신선한 쌈 채소, 달짝지근한 밥도둑 무생채 등이 제공되는 언제 먹어도 부담 없는 메뉴. ‘탄단지’를 빠짐없이 챙길 수 있고 밥과 반찬도 리필 할 수 있어 간단하지만 든든히 한 끼다.
서울 영등포구 당산로 2-1
09:30~21:30
02-2677-2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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