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슈의 지붕 '에비노 고원'
규슈의 지붕 '에비노 고원'
  • 고아라 | 양계탁 사진기자
  • 승인 2023.08.0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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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장한 산세와 짙은 에메랄드빛의 호수가 끊임없이 펼쳐지는 이곳에선 험난한 트레킹 코스도 달갑기만 하다.



에비노 고원은 일본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기리시마 긴코완국립공원에 자리하고 있다. 해발 1200m에 펼쳐진 아름다운 고원으로 기리시마 연산의 등산로 입구로 이용되기도 한다. 해발 1700m의 가라쿠니다케 산과 해발 1301m의 고시키다케 산이 고원을 둘러싸듯 솟아있어 너른 대지임에도 아늑한 분위기가 감돈다. 에비노 고원은 풍부한 자연의 보고로도 잘 알려져 있다. 산 정상 일대에는 화산 활동이 활발한 지역 특유의 화산호가 여럿 자리하고 있는데, 그중 에서도 롯칸논미이케 호수와 후도이케 호수는 유독 짙은 코발트블루 빛을 띠고 있어 유명하다. 이는 화산의 영향으로 강한 산성을 띠기 때문이다. 호수와 습원 근처에는 끈끈이주걱 등 쉬이 볼 수 없는 습지식물이 자생하고 있으며 완만한 경사지에는 국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광대한 침엽수림이 펼쳐져 있다. 계절마다 색을 달리하는 꽃과 나무는 365일 황홀한 자태로 여행자들을 유혹한다. 봄부터 초여름까지는 전 세계에서 오직 에비노 고원에만 자생한다는 천연기념물인 노카이도, 기리시마를 대표하는 꽃인 미야마키리시마가 고원 전역에 만개하며, 가을이면 선명하게 물든 단풍과 풍성한 억새가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어느 도시를 가도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품은 국립공원을 볼 수 있는 일본인데 그중에서도 최초라니, 트레킹을 시작하기도 전에 마음이 잔뜩 부푼다. 고원 입구로 들어서자 아기자기한 기념품 숍과 레스토랑, 편의점 등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이른 점심시간이긴 하지만 산을 오를 때 몸이 무거우면 방해가 될까 싶어 식사는 트레킹 이후로 미뤘다. 대신 편의점에서 시원한 음료수와 초콜릿을 구입해 가방에 챙겨 넣었다. 트레킹 코스가 시작되는 지점에 이르자 나무로 지은 외벽과 빨간 지붕이 인상적인 에비노 에코 뮤지엄 센터Ebino Eco-Museum Center가 등장한다. 기리시마의 자연에 대해 패널과 영상으로 소개하고 있어 어린아이도 흥미로울 만한 정보가 가득하다. 카운터에는 나라별 언어로 된 에비노 고원의 지도가 있어 미리 챙겨두면 산행 시 도움이 된다.


에비노 고원의 트레킹 코스는 크게 4가지로 나뉜다. 에비노 산을 오르는 에비노 산 코스, 간단히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에비노 고원 코스, 카라쿠니 산을 오르는 코스, 전망대에서 뱌쿠시 호수와 롯카논미 호수, 후도 호수의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화산 호수 코스다. 에비노 고원의 꽃은 호수인 만큼, 화산 호수 코스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출발 지점에서 호수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보려 했지만 산 정상에 꼭꼭 숨은 비밀스러운 호수는 그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에코 뮤지엄 센터 직원에게 살짝 물어보니 뱌쿠시 호수 전망대 하나만 보고 내려와도 두 시간은 족히 걸린다고. 본래 후도 호수 전망대로 바로 갈 수 있는 길이 있었으나 2016년 구마모토 지진의 여파로 막아놓은 상태. 뱌쿠시 호수와 롯칸논미 호수를 거치는 길을 이용해야만 후도 호수에 닿을 수 있다.
트레킹 초입은 비교적 무난하다. 흙길 위에 돌이 잘 깔려있고 경사진 오르막길에는 돌계단이 설치돼 있어 천혜의 자연 속에서 힐링을 즐기며 산책하듯 오를 수 있다. 여름이 유독 무덥기로 유명한 지역인데도 울창한 나무가 그늘을 내어주니 그다지 덥지도 않다. 게다가 한창 무르익은 초록빛 자연이 끊임없이 펼쳐져 콧노래가 절로 난다. 15분 쯤 걸었을까. 길이 갑작스럽게 험해지면서 산이 본 모습을 드러낸다. 전날 폭우가 온 탓인지 바위에 물기가 많아 발을 디딜 때마다 주의해야 한다. 자연스레 속도는 더뎌지고 콧노래는 멈춘 지 오래다.


40분쯤 올랐을 무렵부터는 주변의 지형지물에 의지하게 된다. 단단해 보이는 나무를 붙잡고 한층 무거워진 다리를 옮기다 보니 어느 순간 시야가 탁, 하고 트인다. 무성한 풀숲에 가려져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정상인 것이다. 〈시라토리야마 산 북쪽 전망대白鳥山 北展望台〉라 적힌 푯말이 있는 쪽으로 다가서니 마음의 준비도 없이 웅장한 코발트블루 빛 호수가 시야 가득 쏟아진다. ‘무해하다’는 표현이 맞을까. 인간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자연 그 자체의 화려함에 입이 떡 벌어진다. 거대하지만 잠잠한 호수는 마치 천상계의 푸른 고래가 잠들어있는 듯 매끈하고 우아하다. 호수 뒤편으로는 부드러운 능선의 산이 둘러싸고 있으며 어디선가 화산의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마치 신이 하늘로 돌아가는 듯한 모습에 신성함마저 느 껴진다. ‘최초’라는 타이틀의 위엄이 피부로 와닿는 순간이다.
산 중턱쯤 오를 때까지만 해도 배가 고파 일찍 하산할 생각이었으나, 눈앞에 펼쳐진 대자연의 경이로움에 허기도 잊은 채 한참을 머물렀다. 누군가 등산은 인생을 닮았다고 했다. 편안한 길을 걷다 보면 험난한 길을 마주하고, 다시 편안한 길이 나기도 한다. 더불어 부단한 노력과 땀을 흘린 후에야 정상에 오를 수 있다. 다소 진부한 비유일지도 모르지만 그 어떤 비유보다 잘 어울린다고, 호수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이토록 진귀한 보물을 얻게 되니 그간의 고된 산행마저 소중하게 느껴진다.


에비노 고원
〒889-4302 宮崎県えびの市末永
bes.or.jp/eb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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