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엘라벤 클래식 | 잊을 수 없는 우리의 소중한 추억
피엘라벤 클래식 | 잊을 수 없는 우리의 소중한 추억
  • 글 사진 김진섭 기자
  • 승인 2013.12.27 11: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알레샤우레~결승점 ③

텐트 밖으로 나오니 흰 구름이 담긴 수채화 같은 알레샤우레의 아름다운 아침 호수가 우리를 반긴다. 다른 산장들과 달리 언덕 위에 높게 위치해 있는 알레샤우레에서는 물을 뜨기가 어렵기 때문에 별도의 물탱크를 운영한다.

▲ 알레샤우레 전경. 흰 구름이 담긴 수채화 같은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 캠프 명당이다.

물을 뜨러 산장 위쪽으로 올라가니, 한 노인이 호수를 바라보며 여유롭게 백파이프를 태우고 있다. 하얀 파이프 담배 연기가 퍼져 나가는 푸른 호수를 내려다보며 우리가 이 아름다운 트레일의 정점에 서있음을 느꼈다.

▲ 알레샤우레 호수를 내려다보며 멋스럽게 백파이프 담배를 태우는 한 노인.

아침을 먹고 힘들게 걸어온 아이를 위해 산장에 들렀다. 눈이 휘둥그레진 아이는 과자며 사과, 시나몬롤, 초콜릿, 코코아까지 이것저것 고르느라 정신이 없다.

“와! 아빠, 이거 나 다 사도 돼?”
“그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약간의 제재는 필요하다. 다 들고 가야 하므로. 아내의 다리를 위해 의료진도 찾았다. 다행히 간호사인 에바가 산장 안으로 우리를 인도했다. 다리를 살펴보고 통증 부분을 확인한 다음, 양쪽 무릎에 압박붕대를 충분히 감아주며 진통제를 주었다. 전날 걷는 모습을 보며 내일 못 걷지 않을까 걱정이 됐었다.

“좀 괜찮아?”
“응. 나아졌어.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무릎을 굽히지 못하고 절뚝거리면서도 산장을 나오면서 괜찮다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완주하고 싶은 굳은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
“그래. 다행히 힘든 코스는 지나갔고 오늘 내일은 거리도 짧고 완만해서 무리하지 않고 걸으면 될 거야.”

오늘 걸을 길은 그림 같은 호수가 이어져있다. 이전 코스에 비해 높은 산도 없고 스펙타클한 뷰는 없지만 아름다운 물빛과 황금빛 풀밭의 향연이 펼쳐져 수채화 같은 느낌이다. 여유롭게 천천히 걷고 주변을 둘러보며 트레킹다운 트레킹을 했다.

▲ 알레샤우레 산장에서 아내의 다리를 치료해준 고마운 에바씨에게 한국에서 준비한 작은 선물을 전했다.

▲ 한편의 수채화를 연상시키는 아름답게 펼쳐진 초원.

아내는 뒤편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앞서서 걷던 아이와 나는 적당한 곳에서 점심 준비를 했다. 끓는 물을 붓고, 식사 준비가 다 될 때쯤 아내가 도착했다.

“오! 딱 좋은데.”
얼굴은 붓고 힘들어 보이지만, 힘든 내색 없이 여유 있는 그녀의 목소리가 반갑다. 건조식은 점점 지겨워지기 마련인데 나는 반대로 트레일을 이어갈수록 입맛이 돌아오고 있다. 밥을 먹고 있자니, 에리키, 카트리나 커플이 지나간다.

“헤이. 또 만났네요.”
전날 기어코 사우나를 했다는 그들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내일 저녁 트레일을 마치고 바로 차로 떠난다는 그들을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아 함께 사진을 찍고 메일 주소와 작은 선물을 주었다.

“트레일 잘 마무리하세요.”

▲ 이정표마저 아름답다.

▲ 호수 한편에 고운 모래가 깔려 있어 한동안 호수에 발을 담그니 시원하고 상쾌하다.

점심을 먹고 조금 더 걸으니, 호수 한편에는 마치 해안가 모래사장처럼 고운 모래가 깔려 있다. 바다에 와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지나치기가 아쉬워 블랭킷을 펴고 앉아 호수를 바라보다 한번 들어가 보기로 했다. 그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고생한 발을 위해 차가워도 이 정도는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산화와 양말을 벗고 바지를 걷어 올린 다음 호수 물에 발끝을 대자 차가운 물방울이 발에 달려오는 것 같다. 차갑다고 소리 지르면서도 그대로 발목까지 다시 집어넣었다.

“시원해. 다들 들어와 봐. 엄청 시원해.”
한동안 호수에 발을 담그고 나서 다시 신발을 신으니 시원하고 상쾌한 기분이 발바닥부터 올라와 등산화 안을 가득 채운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라, 아내와 아이 모두 동일한 느낌이었다고 한다.

▲ 2일째 싱이로 가는 길에서 만나 함께 걸었던 에스토니아의 에리키와 카트리나 커플을 다시 만났다.

스웨덴 북쪽 언덕 꼭대기에서 맞는 40번째 생일
아름다운 호수길을 한참 지나자 길이 갑자기 황량해진다. 바람이 거세지고 앞쪽에는 커다란 3개의 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갑자기 날이 쌀쌀해져 아이에게 다운재킷을 입히고 쉬면서 아내를 기다렸다.

“서연아, 한국 가면 뭐 먹고 싶어? 다섯 가지만 얘기해봐”
“음……. 설렁탕도 먹고 싶고, 아빠가 오기 전에 사준 삼계탕도 먹고 싶고, 짜장면, 간장게장, 냉면, 갈비탕, 스파게티 그리고 또…….”

5개가 훌쩍 넘어간다. 점심 먹은 지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배가 허전한가 보다.

“아까 사온 과자 하나 꺼내 먹자. 다 먹지는 말고 아빠 엄마 것 몇 개만 남겨줘.”
우리는 블루베리 잼이 박힌 동그란 쿠키를 하나씩 꺼내먹었다. 기다리다 보니 아내가 도착했다. 아내의 배낭에서 프리마로프트 자켓을 꺼내 입히고 다시 길을 나섰다. 수 km를 더 걸어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7시 전에 트레일을 마친 건 처음이다.

▲ 나의 40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쿠키에 면봉을 꽂아 놓고 불을 붙였다.

▲ 먹을 것이 줄수록 배낭이 가벼워질 줄 알았는데 쓰레기가 쌓이니 무게가 제법 묵직하다.

오늘은 산장이 아닌 멋진 야영지를 찾고 싶었는데, 마침 체크포인트를 못 가서 산들이 한눈에 보이는 멋진 곳을 찾았다. 보자마자 여기다 싶어 서둘러 텐트를 피칭하고 아이가 돌을 구해와 화로를 만들었다. 사이트를 다 만들고 나니 아내가 도착했다. 우리는 어느새 나름대로 역할을 분담해 최적화된 트레일을 하고 있었다.

▲ 아이가 돌을 구해 손수 만든 파이어링(Fire ring).
사이트를 세팅하고 땔감을 구해와 저녁을 먹었다. 오늘은 스웨덴 북쪽의 어느 언덕 꼭대기에서 맞는 나의 40번째 생일. 낮에 아이가 아껴두던 과자를 달라고 해 접시를 뒤집어 쌓아놓고, 세면백에서 찾아낸 면봉을 꺼내 잼 부분에 꽂아 놓고 불을 붙였다.

“짠! 얘들아 이것 봐!”
“와~ 케이크네. 어떻게 초 대신 면봉 꽂을 생각을 했어? 정말 대단해. 멋지다!”

아내는 놀라면서도 기뻐했고, 즉석 미역국을 못 사온 것이 미안하다고 했지만, 난 괜찮았다. 이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소중한 케이크고 최고의 생일 파티이므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면봉에 붙인 불을 껐다.

“아빠 사랑해요.”
“자기야, 사랑해.”
“고마워.”
아내와 마지막 와인 한 모금을 나누며 함께 따뜻한 모닥불을 쬈다. 그렇게 가족과 함께 스웨덴 북쪽의 어느 광활한 풍경 속에서 내 생애 잊을 수 없는 생일을 보냈다.

GPS 누적거리 120km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서둘러 텐트를 털어 배낭에 넣고 쓰레기도 패킹했다. 먹을 것이 줄수록 배낭이 가벼워질 줄 알았는데 쓰레기가 쌓이니 이 무게도 제법 무겁다. 게다가 젖은 빨래까지 한 몫 해서, 배낭은 점점 묵직해진다. 그래도 오늘은 우리 트레일의 마지막 날이니 힘을 내자.

▲ 체크포인트를 못 가서 산들이 한눈에 보이는 멋진 곳을 찾아 서둘러 텐트를 피칭했다.

▲ 결승점 전 GPS 누적거리 122km, 몇몇 지점에서 길을 돌아 거리가 좀더 나왔다.

근처 체크포인트에 들러 스탬프를 받고 제공해주는 팬케이크를 먹었다. 오늘 걸을 아비스코는 국립공원으로 위도 상으로는 북쪽으로 훨씬 더 올라와 있지만, 그 동안의 길과 달리 체크포인트를 지나자 거짓말처럼 나무가 없는 황량한 산에서 푹신한 황금색 이끼와 자작나무가 가득한 독특한 숲으로 바뀐다. 자작나무는 길쭉하게 솟은 일반적인 자작나무가 아닌 가지가 얇게 여러 개로 펼쳐져 숲은 마치 영화 아바타의 한 장면 같다. 게다가 축축한 비와 하얗게 펼쳐진 아침 안개 때문에 더욱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지막 건조식을 꺼내 점심을 먹는다. 지금까지 입맛이 없어서 제대로 못 먹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맛이 괜찮아진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많이 챙겨올 걸. 아이는 반 아이들에게 선물로 주게 30개를 넣어 달라고 했건만, 아빠는 배낭 무겁다고 1개도 더 넣지 않았으니 얼마나 야속했을까. 서둘러 숲길을 걷다보니 피니시 팻말이 보인다. 5km, 3km, 점점 결승점이 가까이 온다.

▲ 점점 결승점이 가까이 온다.

▲ 아비스코의 숲은 더욱 울창해지고 길 왼편에는 웅장한 계곡물이 엄청난 소리로 휘돌아치며 흐른다.

숲은 더욱 울창해지고 길 왼편에는 웅장한 계곡물이 엄청난 소리로 휘돌아치며 흐른다. 정말 다왔나보다. GPS의 누적거리는 120km를 지나고 있다. 우리가 약간 헤맨 길까지 포함돼서 조금 늘어난 것 같다.

마지막 500m를 남기고 아내를 기다려 합류했다. 아내는 뒤에서 혼자 걸으며 많은 생각들을 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들, 부모님 생각, 가족들 생각. 그동안 바빠서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여러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라, 걷는 내내 너무 좋았다고 한다. 다리 아픈 것도 잊고, 힘을 내 걷다 보니 얼마 남지 않은 길이 반가우면서도 아쉽기도 했다.

박수와 환호로 축하를
이런 저런 생각도 잠시, 모퉁이를 돌아 도착 라인에 들어선 우리는 갑자기 들려오는 커다란 박수 소리와 환호성에 어쩔 줄 몰랐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과 운영진들이 일어서서 우리를 축하해주었다. 약간 쑥스러웠지만, 건네준 시원한 주스를 마시며 완주의 기쁨을 만끽했다. 하이킹 패스로 최종 시간을 체크 받고 빛나는 메달과 와펜도 받았다. 기쁘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 모퉁이를 돌아 결승점에 들어선 우리는 갑자기 들려오는 커다란 박수소리와 환호성에 어쩔 줄 몰랐다.

배낭을 내려놓고 쉬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도 속속 결승점에 도착한다. 우리도 박수로 환호하며 진심으로 축하를 보낸다. 그 중에는 첫날 만난 독일인 플루이언과 마이크, 둘째 날 만난 에리키와 카트리나, 셋째 날 만난 이튼과 스톡홀름 아가씨도 있었다. 함께 결승점에서 만난 이들과 축하를 나누고, 첫날 시작점에서 안전을 기원하며 사미족의 노래를 불러주던 운영진 안나와도 인사했다. 짧은 커트머리에 재킷을 걸친 그녀에게서 풍기는 스타일리시한 아웃도어 포스는 아내도 부러워할 정도였다.

▲ 하이킹 패스로 최종 시간을 체크 받고 빛나는 메달과 와펜도 받았다. 기쁘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여유롭게 아비스코 국립공원 뒷쪽 캠프 사이트에 텐트를 치고 꿈에 그리던 사우나를 했다. 다행히 남녀가 구분된 사우나였다. 고생한 피부를 위해 시원한 마스크팩도 하나씩 붙이고 느긋하게 파티가 열리는 ‘트레커 인 티피’로 향했다. 얼마만에 누려보는 안락한 호사인가. 축하와 시상이 열리고 있었는데, 돌이 갓 지난 제일 어린 참가자와 74세의 제일 나이 많은 참가자, 11살 이하로 트레일을 완주한 용감한 아이들에게 선물이 주어졌다. 턱걸이로 걸린 우리 딸아이는 주니어가 됐으니 좀 더 큰 배낭을 메라는 격려의 말과 함께 35ℓ 새 배낭을 선물로 받았다. 내년에는 피엘라벤 클래식이 10주년을 맞아 더 풍성한 행사가 기획될 예정이다. 몇몇 트레커들은 무료로 참가할 수 있는 행운도 거머쥐었다.

▲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해준 이번 트레일은 가족과 함께여서 더욱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사람은 출발점에서부터 쓰레기를 6.8kg이나 모아온 사람이다. 자기 배낭도 무거울 텐데 정말 대단하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 길을 걷고 야영했을 텐데, 걷는 내내 우리는 떨어진 쓰레기나 비닐 조각 하나 보지 못했다. 자연을 사랑하고, 잘 보존하려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아름다운 선순환이다. 걷기 적절한 기온,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깨끗한 물, 광대하고 아름다운 풍경, 아마도 이 3박자가 맞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아웃도어 문화가 발달할 수밖에 없는 천혜의 환경인 스웨덴은 분명 축복 받은 나라다.

완주한 사람들은 흥겨운 마음으로 ‘트레커 인 티피’ 안팎에서 모두 밤을 즐겼다. 아이를 재운 뒤 우리는 트레커인에서 신나는 공연도 만끽했다. 아내도 테이블 위에까지 올라가 신나게 몸을 흔들고, 모두는 어깨동무를 하며 피날레 공연을 즐겼다. 산에서는 얌전하던 사람들도 이날만큼은 그동안의 힘든 여정도 잊은 채 기쁨의 에너지를 발산했다.

다음날 아침, 식사 후 더플백을 찾고 짐을 정리했다. 만감이 교차하지만 아쉬움을 달래며 기념 셔츠를 구입했다. 돌아갈 시간. 키루나행 버스를 타기 위해 나서며 안나와 인사하고, 작은 선물을 건네고 아비스코를 나섰다. 아침부터 나와 쓰레기를 줍고 사이트를 정리하는 그녀의 모습이 아름답다. 어제 봤던 최연소 완주자에게도 작은 선물을 건네며 축하해줬다.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가족을 돌아보며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해준 이번 트레일. 가족과 함께여서 더욱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함께 해줘서 고맙고 사랑해. 한국 가서 먹고 싶은 것 다 사줄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