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역남로
서역남로
  • 글 사진 박하선 기자
  • 승인 2016.02.17 17: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모래폭풍에 덮인 고대 왕국들

▲ 끝없는 모래바다가 펼쳐진 타클라마칸 사막.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내륙 아시아는 유사 이래 카라반에 의한 동서 교역이 이루어져왔다. 이 교역의 와중에서 카라반의 행렬은 필연적으로 깊은 모래에 둘러싸여 곳곳에 흩어져 있는 여러 오아시스들을 찾기 마련이었는데, 그 오아시스들을 잇는 길이야말로 근세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와 유럽을 맺어주는 주요한 큰길이었다. 그 큰길을 오늘날 우리는 ‘실크로드’라고 말한다.

그 옛날 중국을 떠나 서쪽으로 향하는 카라반은 당시 중국의 서북단에 해당하는 돈황에 도착해서 두 갈림길을 맞았다. 그대로 서쪽으로 가면 하미, 투르판을 거쳐 다시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 서역북로가 그 중 하나이고, 또 하나는 옥문관(玉門關)과 양관(陽關)을 지나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으로 돌아가면서 여러 오아시스들을 만나게 되는 서역남로다.

그렇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카라반들은 더 늦게 개척된 서역북로를 더 선호하였다. 그 이유는 몇 가지 있겠지만 우선 건너야 할 사막 구간이 짧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파미르를 넘어 반대편으로 오는 카라반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렇다 보니 점차 서역남로는 쇠퇴 일변도를 걷게 되었다. 한때 빛나던 오아시스 왕국들인 누란·미란·니야 등이 모래 속에 파묻혀 전설로 남고 말았다.
오늘날 명맥만이 가늘게 이어져 가고 있는 가운데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서역남로의 오아시스들을 찾아 가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실크로드의 보석’으로 통하는 카슈가르를 떠나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단을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서역남로의 여정은 시작됐다. 오늘날 서역남로에서 최대의 오아시스로 남아있는 허티엔(和田)까지는 포장도로에도 불구하고 버스로 10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다.
시간이 지날수록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풀 한 포기 없는 바다와 같은 사막뿐. 모래바다를 넘고 또 넘어도 역시 사방이 모래바다일 뿐이다. 이대로 달려서 저 앞에 보이는 모래바다를 넘다보면 초록빛 오아시스가 나온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하늘 또한 구름 한 점 없이 불같은 태양이 내리쬐는 날이지만 어디서 어디까지가 하늘이고 모래바다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온통 모래빛이다. 그 공허한 세계에서 이따금 모래먼지를 말아 올리는 회오리바람만이 죽은 자의 영혼처럼 울부짖고 있다. 잃어버린 전설을 찾아서 버스는 사막 속을 달리고 또 달렸다.
곤륜산에서 발원한 동쪽의 백옥강(白玉江)과 서쪽의 흑옥강(黑玉江) 사이에 형성된 오아시스 허티엔은 오늘날 공항까지 들어섰을 정도로 꽤 큰 위구르족들의 세계다. 마차를 타고 둘러보는 시가지는 이곳저곳에서 현대식 건물도 눈에 띄지만 바자르(시장) 쪽으로 발길을 옮기니 천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는 듯하다. 줄을 잇는 나귀마차, 가지각색의 모자를 쓰고 흰 수염을 기르고 있는 노인네, 복면을 하고 다니는 여인네, 숯불 연기를 내품으면서 시시커밥(꼬챙이에 고기를 끼어 굽는 전통요리)을 굽고 있는 젊은이, 멋대로 지어진 흙집들, 땅바닥에 쌓아놓은 수많은 과일, 모스크 …. 이 모든 것들이 예나 지금이나 별다르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는 위구르족들의 토속적인 세계가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허티엔의 옛날 모습은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다음과 같이 잘 나타나 있다. “쿠스타나국에 이르렀다. 이 나라는 대부분이 사막이지만 오곡이 풍성하고 과일도 많다. 모직물 등을 산출하여 사람들은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다. 또 이곳에서는 백옥과 예옥이 많다. 기후도 온화하고 사람들은 예의를 알며 학문을 숭상하고 음악을 즐긴다. 불법을 숭상하여 가람이 1백여 군데, 승려는 5천여 명이며 대부분 대승교도이다”라고 매우 호의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때 우전국이라고도 불리던 허티엔은 <대당서역기>의 표현대로 옥(玉)의 산지로 널리 알려졌다. 현재도 곤륜산 기슭에서 산출되고 있는 이 옥들은 모두 연옥이다. 예로부터 품질이 뛰어나 유난히 옥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에게 높은 가격으로 팔려 나갔다. 그래서 이 허티엔의 연옥은 서역남로를 오가는 대상들의 주요 상품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이곳 주민들이 백옥강으로 떠밀려온 옥돌을 주어서 값을 흥정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산 자나 죽은 자 모두에게 만족과 평안을 맛보게 하는 옥의 전설이 아직도 미비하게나마 이어져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과거 허티엔에서 불교가 융성했다는 사실은 주변 도처에 있는 유적지가 증명하고 있다. 지금은 사막에 버려진 것처럼 초라하게 남아있는 맬리카왓, 라왁 그리고 단단윌릭 등의 사원지가 바로 그러한 곳이다. 현장보다 먼저 이곳을 거쳐 간 법현도 “우전국에는 승려가 수만이고 집집마다 작은 불탑을 세워놓고 있다”라고 전하고 있으며, 우리의 혜초스님 또한 <왕오천축국전> 끝부분에 허티엔 불교에 대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이렇듯 불교 전파는 간다라 지방에서 파미르를 넘어 이곳으로 흘러들었다. 서역남로의 여러 오아시스 왕국으로 전해지면서 그 화려한 꽃이 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불교문하는 쇠퇴하고 이슬람 물결에 밀려 오늘날 흔적들만 사막 속에서 아스라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불교가 전파된 길을 따라서 모래먼지 자욱한 불같은 사막길을 철떡거리며 또 다른 오아시스들을 찾아간다. 옛날처럼 낙타를 의지한 것도 아니고, 또 무언가 꿈을 가지고 흘러가는 대상들이나 구도승들이 겪었던 힘든 여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텅 빈 미지의 사막에서 며칠을 헤맨다는 것은 많은 인내를 필요로 했다. 이곳을 지나갔던 법현은 당시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사하(沙河)에는 악귀와 열풍이 심하여 이를 만나면 모두 죽고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다. 위로는 나는 새도 없고 아래로는 달리는 짐승도 없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막막하고 가야 할 길을 찾으려 해도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 수가 없다. 언제 이 길을 가다 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오직 죽은 사람의 해골만이 길을 가리키는 표지가 되어 준다.” 오아시스 우티엔(于田)을 지나 사막 속의 신흥도시로 도약하고 있는 민풍(民豊)에 닿았다. 과거 융로국이라 불렸던 곳이지만 당시의 흔적이라곤 하나도 찾을 수 없다. 타림분지 내의 석유 채굴로 한족들이 대거 옮겨와 터전을 잡고 있기 때문에 토박이인 위구르족들이 오히려 이민족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볼거리라곤 하나도 없다. 단지 얼마간 사막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 버티고 있는 사구지대만이 길손에게 손짓하고 있을 뿐이었다.
불같은 태양 아래 1시간쯤 걸어서 사구 꼭대기에 올랐다. 사구들은 사막 안쪽으로 한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이곳에 올라오기 전까지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거센 모래바람이 바다의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구들은 마치 굽이치는 파도와도 같았다. 그러고 보면 이 사구들은 깊은 사막에서 오아시스 쪽으로 불어 닥치는 모래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막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날리는 모래 때문에 카메라를 꺼내기가 힘들뿐만 아니라 얼굴조차 제대로 가눌 수가 없다. 한곳에 잠시라도 정지해 있노라면 금방 아랫도리가 모래 속에 파묻혀 버린다. 이것이 바로 홍수보다도 더 무섭다는 모래폭풍 ‘카라브란’이다.
카라브란! 고향을 뺏어버리고, 처자식을 흩어지게 하고, 온 천지를 매몰시켜버린다는 죽음의 모래폭풍. 모래가 물처럼 흐르고 바람소리가 악귀를 부르는 것 같다. 이 광란하는 모래폭풍 속에 홀로 서서 두려움도 잊은 채 저 사막 깊은 곳을 주시해 본다. 저 사막 깊은 곳 어딘가에 오아시스 왕국 니야가 파묻혀 있을 것이다.
니야는 기원 1세기에서 5, 6세기까지 전성기를 누렸던 오아시스 왕국이다. 이곳은 현재의 민풍에서 사막 안쪽으로 120km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타림분지의 사막화가 확장되기 전에는 이 서역남로가 그쪽을 지나고 있었기 때문에 대상들이나 구도승들이 쉬어가기에는 다시없이 좋은 곳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물길의 흐름이 바뀌게 되자 왕국은 모래 속에 파묻히게 되고 전설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근세에 와서 영국의 유명한 탐험가 스타인이전설의 현장을 발굴하여 온 세상에 왕국의 실체가 밝혀지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생명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에 그 흔적들만 초라하게 남아있게 된 것이다.
니야와 더불어 사막의 깊은 모래 속에서 발견된 고대도시의 폐허가 바로 북쪽으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누란과 미란 유적이다. 이곳들은 지금의 차리크릭 인근에 흩어져 있었다. 일찍이 중국과 타림분지를 잇는 실크로드의 목에 해당하는 곳에 위치하고 누란왕국으로 번영을 구가해 오면서 광대한 영역을 세력권 안에 두었다. 하지만 그 영화도 부질없게 기원전 77년 한나라의 간계에 의해 멸망하여 ‘선선국’이라 불리다가 모래 속에 파묻히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수수께끼 같은 옛 도시들의 폐허를 모두 찾아보기에는 여건이 허락지 않아 애석하게도 전설을 전해 듣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불같은 사막을 넘어 또 다른 오아시스를 찾아가는 서역남로의 힘든 여로는 계속되었다. 그것은 마치 전생의 무슨 업보처럼 느껴졌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